지난 2월 19일, 현대무용가 천 모 씨의 피감독자 간음에 대한 대법원 상고심에서 피고인 측 상고가 최종 기각되며 원심 유지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로써 2019년 5월 29일 공소장이 접수되어 7월 18일 처음 열린 공판을 시작으로 1년 9개월여에 걸친 법정 다툼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2019년 5월 14일 공소장이 접수되어 7월 17일 첫 공판이 열린 뒤 비슷한 경로로 항소심과 상고심을 거친 현대무용가 류 모 씨의 위력에 의한 강제추행 사건이 지난해 8월 18일 역시 대법원 상고 기각으로 종결된 것과 비교하면 더딘 진행으로 느껴지긴 하나 6번의 공판이 열렸던 1심이 1년 넘게 진행된 것에 비해 항소심과 상고심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성범죄의 경우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고 재판 결과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왔을 때(예컨대 무죄나 집행유예 등) 불복하는 경향이 유독 강하며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낸 뒤 무고나 명예훼손 등의 보복성 고소로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는 것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최근에는 업무방해죄가 추가되어 가해자가 이들 3개 죄목으로 피해자를 고소하는 전략이 하나의 공식처럼 되어가고 있다).
천 씨 역시 항소심 선고 전 결심공판에서 “낮은 곳(천 씨는 1심 선고 현장에서 법정 구속되었다)에 내려와 보니 피해자의 고통을 알겠다”고, “피해자를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말한 뒤 판사를 향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어떤 처벌이 내려져도 달게 받겠다”며 최후 진술을 마쳤으나 선고가 있은 지 4일 뒤 판결에 불복하며 상고장을 제출했다(1심 선고 뒤에는 바로 다음 날 항소장을 제출한 바 있다).
검사는 원심이 선고한 형(징역 1년 6월,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명령 40시간, 아동·청소년 관련기관 및 장애인 복지시설 취업제한명령 3년)이 너무 가벼워 부당하다는 취지로, 천 씨의 변호인단은 피해자와는 대학교 선후배 관계로 피해자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하였을 뿐 피고인은 피해자를 보호하거나 감독하는 사람이 아니고 피해자에게 위력을 행사한 적이 없기에 원심이 선고한 형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는 취지로 항소를 제기하였다.
보호감독자 지위에 있었는가와 위력을 행사했는가에 대한 판단
2020년 7월 15일 열린 항소심 첫 공판에서, 천 씨는 시대가 바뀌어 무용계에서 이제는 학생들이 ‘갑’의 지위에 있으며, 자신과 같은 무용강사는 학생들 앞에 ‘을’이라며 보호감독자 지위와 위력 행사를 모두 부인하였고, 오히려 피해자가 자신에게 이성적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추측으로 합의에 의한 성관계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항소심을 맡은 서울동부지법 제3형사부에서는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은 상세한 논거를 들어 천 씨가 극구 부인한 보호감독자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
현대무용전공은 학년 당 학생수가 10~11명 정도에 불과하고 전체 강사수도 11~12명 정도인데, 강사들은 학생들에 대한 수업과 공연 준비 과정(공연은 학생들이 졸업하기 위한 요건인데,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강사들로부터 도움을 받게 된다)에서 학생들의 무용실력, 평판 등에 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은 강사들 중에서 무용경력과 나이가 많은 편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현대무용전공을 담당하는 유일한 교수인 A와 상당한 친분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A교수는 B공연에 참가하는 현대무용전공 학생들의 인솔을 피고인에게 맡겼다). 또한 현대무용전공의 강사와 조교들 중 대부분은 피고인이 이 사건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C무용단 소속 단원이다(피고인이 C무용단 대표를 맡기 전에 위 A교수가 대표를 역임한 적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는 졸업 전에 피고인의 수업을 다시 듣거나 공연 준비 과정에서 피고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피고인은 강사들, 조교들과 사이에서 피해자 등 학생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면서 강사들, 조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피고인과 피해자가 주고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내용 등을 살펴보면, 피고인과 피해자는 서로를 스승과 제자 관계로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증거기록 번호 생략, 이니셜 재설정)
또한 천 씨가 강력히 부인하고 문제제기하는 위력 행사와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이미 원심(서울동부지법 형사9단독) 판결문에서 다음과 같은 다수의 대법원 판결을 인용하여 상세하게 서술한 바 있다.
피감독자간음죄에 있어서의 ‘위력’이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유형적이든 무형적이든 묻지 않으므로, 폭행·협박뿐 아니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고, 그로 인하여 현실적으로 피해자의 자유의사가 제압될 것까지 요하는 것은 아니며, ‘위력’으로써 간음하였는지 여부는 행사한 유형력의 내용과 정도 내지 이용한 행위자의 지위나 권세의 종류, 피해자의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인 행위 태양, 범행 당시의 정황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2007. 8. 23. 선고 2007도4818 판결, 대법원 2012. 4. 26. 선고 2012도1029 판결 등 참조).
남녀 간의 정사를 내용으로 하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 등의 범죄에 있어서는 행위의 성질상 당사자 간에서 극비리에 또는 외부에서 알기 어려운 상태 하에서 감행되는 것이 보통이고 그 피해자 외에는 이에 대한 물적 증거나 직접적 목격증인 등의 증언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니 이런 범죄는 피해자의 피해전말에 관한 증언을 토대로 하여 범행의 전후사정에 관한 제반증거를 종합하여 우리의 경험법칙에 비추어서 범행이 있었다고 인정될 수 있는 경우에는 이를 유죄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고(대법원 1976. 2. 10. 선고 74도1519 판결 등 참조), 피해자 등의 진술은 그 진술 내용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며, 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고, 또한 허위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이상, 표현상의 차이로 인하여 사소한 부분에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거나 최초의 단정적인 진술이 다소 불명확한 진술로 바뀌었다고 하여 그 진술의 신빙성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될 것이며(대법원 2006. 11. 23. 선고 2006도5407 판결 등 참조),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의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부정적인 여론이나 불이익한 처우 및 신분 노출의 피해 등을 입기도 하여 온 점 등에 비추어보면,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므로,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행 등의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대법원 2019. 7. 11. 선고 2018도2614 판결 등 참조).
천 씨는 이와 같이 보호감독자 지위와 위력 행사를 부인하며 피해자의 진술에서 불분명한 부분이 있거나 사건과 관련성이 없는 범위에서 사실과 불일치하는 부분을 찾아내 신빙성에 문제제기를 했을 뿐 아니라, 피해자의 고소를 무고로 몰고 사실이 아닌 진술로 피해자를 음해하는 등 저열한 방식으로 법정다툼을 전개해나갔다.
(천 씨는 피해자가 사건 이후 자신과 연인관계로 발전하기를 희망하였으나 자신이 사건 전부터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와 관계를 지속하자 무고를 한 것이라며 성폭행을 부인하고, 또한 피해자가 사건 직후인 새벽 혼자서 범행 장소인 모텔을 떠났다고 진술한 것과 반대로 피해자와 다음날 오전에 함께 모텔에서 나왔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진술은 피해자가 모텔을 떠났다고 진술한 시간에서 한 시간여 뒤 자신의 집 근처에서 통화를 했다는 사실이 발신기지국 위치자료를 근거로 입증되어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집 근처에 가서 남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다시 모텔로 돌아왔다는 납득할 수 없는 설명을 하며 합의하의 성관계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무용계에 작동하는 유리에스컬레이터가 낳은 결과물
성평등 예술지원정책, 어디까지 왔나 (블랙페이지 2020년 4월호)
현대무용가 천 씨는 무용계에 작동하는 유리에스컬레이터를 착실히 올라탄 케이스다. 그의 모교는 이화여대에 이어 두 번째로 무용학과가 설치된 곳으로, 남녀공학에 무용학과가 설치된 것으로는 최초였다. 이후 아카데미즘 아래 남성 무용수들을 길러내는 산실 역할을 했고, 특히 현대무용 쪽 두 협회, 한국현대무용협회와 한국현대춤협회는 협회장의 대다수가 이 학교 출신 교수들이 역임하고 있다. 천 씨 역시 모교 무용학과에서 강사 및 겸임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이 사건으로 고소되기 전까지 동문무용단의 대표직을 역임했다.
천 씨는 무용콩쿠르 입상을 통해 병역 혜택을 받은 사실에 대해 모교에서 발행되는 학보에서 다음과 같은 인터뷰를 한 바 있는데, 인터뷰에는 이렇듯 남성 무용수를 길러내기 위한 무용계 유리에스컬레이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드러나 있다. (병역 혜택이 걸려 있는 무용콩쿠르에 한 사람이 4번이나 출전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무용인들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