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하게 우린 사골국물 맛 프리스타일 댄싱. 1월 29일 서울호서예술실용전문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Golden Era of Hiphop〉에서는 프리스타일 댄싱이 전달하는 힙합의 수행적이고 저항적인 힘을 즐길 수 있었다.
그동안 TV에서 보여주는 댄스배틀 프로그램을 보면서 나는 배틀이 쇼로 전시되는 포맷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물론 퍼포먼스 콘테스트와는 다른 배틀만의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규격화된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느낌은 다인원 배틀 혹은 크루 배틀에서 특히 잘 느껴지는데, 여러 명이 합을 맞추려면 필연적으로 짜여진 안무를 구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짜여진 퍼포먼스는 관객의 입장에서 감탄할만한 그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가의 생동감을 전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TV가 아닌 실제 댄스배틀 행사에서 볼 수 있는 다인원 배틀은 합을 맞춘 안무와 개인 멤버의 프리스타일이 뒤섞이기 때문에 퍼포먼스 콘테스트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이나 코레오 분야의 대두와 함께 자란 어린 세대 댄서들의 다인원 배틀은 퍼포먼스에 더 가까운 느낌을 줄 때가 종종 있다.
〈Golden Era of Hiphop〉은 시종일관 프리스타일 댄싱으로 전체 행사 시간을 채운다(나는 16강인 본선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배틀은 1:1 개인 배틀로만 구성되었고 쇼케이스로 불리는 저지들의 댄싱도 프리스타일이었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참여 게스트들의 단체 퍼포먼스로, 완벽히 짜여진, 소위 칼군무식의 일사불란한 춤이 될 법한 단체 퍼포먼스가 개별 댄서의 프리스타일이 돋보이는 구성을 충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는 9명의 여성댄서들로 구성된 Nine Queens와 8명의 남성 댄서들로 이루어진 Golden Hour가 게스트 쇼케이스를 하였는데, 인원들 모두가 이 분야에서 뼈가 굵은 댄서들이어서 (남성 댄서들 나이를 합하면 300살이 넘는다고 한다) 더 오래 고아낸 프리스타일의 맛을 보여주었다. Nine Queens의 여성 댄서들은 프리함을 유지하면서도 시중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전력으로 몸의 힘을 쏟아내는 춤을 보여주었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열광하는 요즘 대중들은 이런 종류의 ‘멋진 언니’를 보고 싶어하지 않을까?
이번 행사에 참여한 댄서들의 면면을 보면 ‘선생님’으로 불리는 노련한 댄서들과 학생 혹은 신출내기 댄서들이 고루 참가한 것으로 보였다. 이점은 본선에서 배틀 상대를 정할 때 특히 눈에 띄었다. 배틀 상대를 주최측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카드뽑기와 댄서들의 직접 지목방식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엠씨 Dolock에 따르면 “너, 나와”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이런 대진 방식은 일견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소위 ‘약자지목’이 난무할 것도 같은데, 이번 행사는 오히려 신예들이 중견 댄서들을 지목하는 현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는 힙합 공동체의 밀접한 네트워크를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배틀이 이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서로의 사제 관계, 출신 지역, 연인이나 친구 관계, 그간의 승패 역사를 알고 있는 참여자들로 이루어진 매우 밀접한 공동체는 댄스배틀의 의미와 서사의 거미줄을 이루었다. 500여 명이 참가한 매우 큰 규모의 이 행사는 참가자 대부분이 무대 위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기 때문에 정작 댄서들이 누빌 수 있는 공간은 그닥 넓다고 할 수 없었는데, 그 때문에 배틀 상대 및 배틀 참여자들로 이루어진 사이퍼가 아주 가까이에서 반응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실시간 즉흥을 핵심으로 하는 프리스타일 댄싱에 이러한 교감과 반응이 뒤섞여 댄스배틀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대화’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신기하게도 전날 보았던 한국무용공연을 떠올릴 수 있었는데, 원숙한 무용가들이 악사들과 실시간으로 교감하면서 거의 즉흥처럼 보이는 춤을 펼쳐보였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굉장히 달라 보이는 두 춤 장르가 이런 점에서 공통된다는 사실이 재밌게 느껴졌다.
‘선생님’과의 대결을 청하는 것은 무용분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배틀에서 보여준 이런 모습은 배틀이 치열한 경쟁의 의미보다 참여, 공유, 지지, 그리고 역사에 대한 리스펙을 보여주는 과정의 의미를 띠었기 때문이다. 패배는 공동체에서 낙오자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셰릴 도즈 교수가 필라델피아의 댄서를 인터뷰한 것에 따르면 “내가 승패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이기기 시작한다!(So the moment I stop caring about winning or losing is the moment I actually started winning!)”라고 표현할 수 있다. 패배를 다루는 이런 방식은 TV에서 볼 수 있는 댄스경연의 심한 스트레스와 눈물바람, 죄책감으로 뒤범벅이 되는 서사와 대조된다.
또 한 가지 ‘선생님’과의 대결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몸이 가지는 저항적 힘이다. 이번 행사가 아니더라도 스트릿댄스 행사에서는 다양한 바디를 볼 수 있다. 춤추기에 적합한 바디 타입에 대한 정답이 정해져 있는 발레를 전공한 나에게 이것은 신선한 위로이기도 했다. 키가 작거나, 크거나, 유연하거나 뻣뻣하거나, 말랐거나 살집이 있거나 다양한 바디는 프리스타일 댄싱에서 댄서 고유의 독창적 바이브를 만들어내는 구성요소가 된다. 이렇게 고유한 바디를 통해 개별 댄서가 자신의 룰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선생님’과의 배틀이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 않다면 일방적으로 고수가 압살하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이렇게 프리스타일 댄싱의 멋짐에 흠뻑 빠지는 가운데에도 아리송한 지점은 있었다. 저렇게 고도의 춤을 출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을 했을 텐데, 프리스타일을 위해 훈련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예전에 어떤 선생님은 “수준 높은 자유로움”을 위해 기본 테크닉을 훈련한다고 얘기해주었다. 그런데 이 훈련이란 말이 껄끄럽다. 보통 훈련은 효율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프리스타일에서 무엇을 위한 효율이란 말인가? 또 다른 선생님은 미국 쪽 댄서가 “너희는 왜 이걸 학습으로 배워?”라고 의문을 표시했다는 말도 해주었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리스펙이 훈련으로 바뀌는 순간 춤이 어떻게 바뀌는지. 그 아슬아슬한 균형을 어떻게 찾을 것인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한 또 하나의 지점은 참가자들의 국제성이다. 물론 댄스 자체의 세계화와 디지털 미디어를 통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보면 이 행사에 참가한 심판들과 참가자들의 다국적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본선부터 관람한 나는 해외에서 온 심판들인 미국 브루클린 테리(엘리트 포스 출신), 프랑스의 나이코, 일본의 야스와 함께 대만과 일본에서 온 배틀 참가자를 볼 수 있었다. 이런 구성은 이 행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수준의 행사라는 인상을 주며, 그 때문에 많은 국내 참가자들과 관람객에게도 매력적인 행사가 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글로벌 수준으로 확장되는 커뮤니티는 필연적으로 춤을 둘러싼 역학을 변화시킨다. 앞서 말한 밀접한 네크워크를 공유하지 못하는 해외 참가자는 배틀과 승패의 의미를 다르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실제로 자신의 배틀이 아니라도 계속 무대에 비좁게 끼어 앉아 행사 자체를 즐겼던 댄서들과는 달리 한 해외 참가자는 자신의 춤이 끝날 때마다 무대 뒤로 퇴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로의 백그라운드를 다 아는 댄서들에게 이 행사가 주는 두터운 의미가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작용하지는 않은 것 같다. 댄서들의 이동과 그에 따른 춤의 이주는 계속 탐색해야 할 주제이다.
글_ 김수인(무용이론가)
자문_ 송유리
사진제공_ Golden Era of Hiph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