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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춤 읽기”에 대한 단상

 우리 댄스웹진에 <인문학적 춤읽기>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인문학적 춤읽기>는 이 웹진을 발간하는 한국춤문화자료원이 기획하고 국립예술자료원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교양 프로그램의 명칭입니다. 재작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참가자들이나 주최측의 호응 속에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해의 프로그램도 기획이 완료되었고, 하반기에 강좌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사회자 어록을 모방해서) “그런데 말입니다,” 불과 1주일 전에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인문학적 무용읽기>라는 강좌를 시작한다며 홍보물을 만들고 보도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새로운 예술감독이 부임하고 학술팀까지 꾸린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왜 타기관의 제목을 모방했을까요?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사실 한국춤문화자료원은 <인문학적 춤읽기>를 기획하며 무용계의 무분별한 모방과 표절 풍토를 우려하여 상표등록까지 고려했지만 무용인들의 양심과 도덕성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획에 참여했던 지식인 한분이 “~적 춤문화 읽기”로 강좌 명칭을 모방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작년에 필자가 강의한 <인간은 왜 춤을 추는가>라는 제목을 표절하여 올해 초에 동일한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그리고는 같은 명칭으로 강좌를 개설하였습니다. 예술작품에서는 동명의 제목이 가능합니다. (이 또한 재연작품, 오마쥬 혹은 패러디가 아니라면 창작자들은 회피하겠지요.) 그렇지만 학술적 지식에 기반한 아이디어, 즉 제목을 모방하거나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은 엄연히 부정행위입니다. 믿기지 않습니까? 교육과학기술부가 2012년에 공표한 ‘연구윤리확보를 위한 지침’은 “타인의 아이디어, 연구내용, 결과 등을 적절한 인용없이 사용하는 행위”는 표절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지적 결핍에 허덕이는 무용가들에게 “인문학적”이라는 문구는 판단력을 마비시킬 정도로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모양입니다. 작년에 한국춤문화자료원이 댄스웹진을 창간하며 내세운 비전 하나가 “지식의 공유”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지식이 탐이 나신다면, 우리의 아이디어가 매력적이라면 가져다 쓰셔도 좋습니다. 단, 출처를 밝히거나 최소한 미리 알려는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춤에만 몰두하던 우리 무용가들이 언제부터, 왜 인문학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을까 무척 궁금합니다. 언젠가는 이 현상을 연구문제로 삼고, 이 시대 무용계를 관통한 인물들과 주변 환경을 면밀히 검토해서 우리 무용 역사의 한 단면으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춤보다는 인문학을 중시하는 요즘의 무용계 현상을 바라보며 춤의 본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몸이라고요? 사유라고요? 아닙니다. 숨입니다. 춤추는 사람의 호흡입니다.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거쳐 장인(匠人)의 경지에 오른 무용가들의 호흡은 자연스럽고 고르며 또 깊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춤에는 품격이 묻어나고 몸에는 아우라가 빛납니다. 그런 춤이니 관객들은 저절로 숨을 죽이게 되고 그런 몸이니 관객들은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대 위의 춤은 그 무대에 오른 무용가에 의해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용가들이 더 이상 타인들의 아이디어나 외래 사유에 편승하지 말고 깊고 깊은 자신의 호흡으로 춤을 만들고, 깊고 깊은 자신의 숨으로 몸을 만드는 연습에 충실하고 춤의 완성을 위해 노력해주었으면 합니다.


 관객들을 위해 인문학적 춤교육을 시키신다는 분들, 제발 입에 붙지도 않는 데리다의 말로 무용을 데리고 “데데” 거리지 말고, 자신의 몸에 소화되지도 않은 들뢰즈의 사유로 관객들을 “들들” 볶아대지 말았으면 합니다. 관객들은 이런 분들의 말놀음에, 실종된 춤에 싫증나고 있습니다. 관객들은 진정한 춤을 보고 싶어 합니다. 뜬금없는 비유겠지만 전 세계의 아이폰 소비자들은 스티브 잡스가 창조한 스마트폰을 사용해 보고 바로 잡스를 칭송했습니다. 소비자의 직관을 고려한 스마트한 기기에 감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용을 보는 관객들은 어떠한 설명도 필요없이 춤을 보며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아이폰과 같은 스마트 기기에서 실시간으로 지식과 정보를 검색하는 현대의 관객들은 매우 스마트합니다. 데리다, 들뢰즈, 아감벤, 지젝, 바디우 등 철학자들의 주요 어록들은 스마트폰에서 언제든지 쉽고 재빠르게 찾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의 어록들로 자신들의 창조 작업을 포장하려고 들지 말고, 자신의 호흡으로 읽어 창조 작업에 서서히 용해해 보십시오.


 동양학을 하시는 철학자 한 분은 인문학을 “삶에 새겨진 무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무용가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자신과 타인의 삶을 깊게 이해하고, 그 이해한 바를 자신의 숨으로 자신의 춤으로 자연스레 내뿜기 위함이 아닐까요? 관객들은 바로 이와 같은 춤을 직관적으로 알아채고 감동합니다. 그리고 무용지식인은 이런 춤을 만든 무용가의 생애와 어록을 기록으로 남기게 됩니다. 한시 바삐 무용생태계가 맑아져서 무용가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결로 숨을 쉬고, 제대로 된 춤을 출 수 있는 시절이 도래하길 바랍니다. 지금으로선 우리 무용가들의 어록을 정리할 날에 기약이 없으므로 지식인으로서의 연명이 부끄러워 헛숨만 내뱉고 있습니다. 흡~하고 깊게 숨을 들여 마십니다. 후~하고 깊은 숨을 내쉽니다. 그리고는 인(忍)!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