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를 쓸 때가 다가오면 그 얼마 전부터 글의 주제에 대한 고민에 빠진다. ‘인사이트’라는 글의 성격상 현 시점의 춤계 상황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목소리를 담고 있어야 하는데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한국의 춤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기 힘들기 때문이다. 클릭 한 번이면 전 세계에서의 소식을 한눈에 접할 수 있는 오늘날 이런 볼멘소리를 하는 것은 단순히 게으름에 대한 핑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비행시간 9시간 반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기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눈은 자연스레 주변을 살피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이곳 러시아의 춤 상황에 대해 논할 수 있을만한 정보와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스크바에 일 년 남짓 거주하면서 우리나라와는 매우 다른, 무척 부러운 현상을 한 가지 목격했고, 오늘은 그에 대해 조금 끄적여 보고자 한다.
한때 발레의 중심지였으며 여전히 세계 최고라고 하는 볼쇼이발레단과 마린스키발레단이 있는 이곳에서 발레가 사랑받는 것은 당연하다. 익히 알다시피 러시아는 체홉, 푸쉬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나라이며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메이에르홀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조국이다. (우리에게는 불쾌한 기억을 안겨주기도 했던)소치 동계올림픽의 개막식만 보더라도 러시아의 문화유산, 특히 그들의 공연문화유산이 얼마나 방대하며 사랑받고 있는지, 그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너무 잘 알 수 있었다.
새삼 러시아 문화예술의 위대함을 피력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스쳐지나갔던 오래된 낡은 건물들에 수많은 소규모의 공연장이 있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공연들이 향유되고 있는 것에서 나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러시아의 공연티켓예매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주말이나 평일 상관없이 매일매일 미처 다 확인하기도 힘든 양의 공연 리스트가 있다. 이 사이트에서 티켓을 판매하지 않는 공연들까지 따져보면 그 양은 엄청나다. 발레공연 역시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극장에서 매일같이 열린다. 그런데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러시아 대중들은 정말로 그 많은 공연들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춤 공연장에서 전공자들을 목격하듯 이곳의 예술 전공생들도 공연장을 찾겠지만, 그들은 티켓강매에 의한 의무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 않을까? 일반 대중들이 영화를 보러가듯 공연장을 찾는 것이 일상화되어있는 곳이기에 우리나라처럼 썰렁한 가족잔치로 끝나는 공연이란 있을 수 없다. 일부 댄스 페스티벌이나 대규모 고급 극장의 공연 티켓은 불티나게 팔려나가지만 단지 그 공연에 한해서일 뿐, 우리의 춤, 공연예술의 인프라는 해가 거듭되어도 그다지 변화하지 않는다.
러시아인들에게 공연예술은 특별한 이벤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삶의 일부이다. 피아노 선율을 감상하기 위해,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몸짓을 보기 위해 꼬깃꼬깃 접힌 돈을 들고서 공연장 티켓박스에 줄을 서는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상인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 크고 화려한 무대가 흥행을 하는 만큼 작고 소박한 무대 역시 찾아와 사랑해주는 관객들이 있다는 것, 이처럼 풍요로운 공연 문화에서 러시아 문화예술의 힘을 느낀다.
글_ 편집장 이희나(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