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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계의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아 온 것은 무엇인가 - 말의 구술문화에서 실천의 정책문화로의 전환을 위하여

이 글은 2025년 12월 17일 예술가의집 다목적홀에서 열린 한국춤비평가협회 주최 ‘국내 춤현장 동향 비평시각 진단 포럼’에서의 발제를 바탕으로 확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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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127-2 (2026.3.20.) 발행


글_최해리(무용인류학자, 댄스포스트코리아 발행인)

 


한국 무용계는 오랫동안 외부의 조건을 탓해 왔다. 지원이 부족하고, 제도가 미비하며, 정책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지적은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동일한 문제가 반복되는 현실을 직시한다면, 이제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왜 우리는 서로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가. 나는 그 원인을 개인의 윤리가 아니라 구조에서 찾고자 한다. 한국 무용계는 여전히 ‘구술사회’의 관성 속에 머물러 있다. 말과 관계, 암묵적 위계가 지식과 기회를 배분하는 구조 속에서 기준은 명문화되지 않고, 과정은 기록되지 않으며, 책임은 추적되지 않는다. 그 결과 권력은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집중되고, 견제 장치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 구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우연이 아니다. 소문이 사실을 대체하고, 비판은 불화로 규정되며, 문제 제기는 곧 관계에서의 배제와 불이익으로 이어진다. ‘매장’이라는 표현이 관용어처럼 사용되는 환경에서, 침묵은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생존 방식이 된다.


2025년 국정감사에서 무용계의 여러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된 것은 이러한 구조적 병폐가 누적된 결과였다. 교육 현장에서의 갑질과 권력 남용, 불투명한 심사와 지원 구조, 그리고 예술고등학교 학생의 극단적 선택과 공연 중에 발생한 무대 추락 사고와 같은 심각한 사건들이 잇따라 드러났음에도, 이에 대한 책임 있는 사과와 실질적인 제도 개선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이후의 태도이다. 일부 기득권은 이 문제들을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개인의 일탈로 축소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대응해 왔다. 어떤 경우에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문제 제기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무책임을 넘어, 무용계 내부의 윤리적 기반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내는 징후이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무용계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외부의 무관심만이 아니다. 내부의 비투명성과 권력 독점,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관행이 더 큰 장애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정책과 제도에 대한 이해 없이 개인의 정치 네트워크를 통해 해결을 시도하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보다 계파적 이해를 앞세우며, 협력보다는 경쟁과 배제를 선택한다. 이는 전략이라기보다 구조적 자해에 가깝다.


이제 전환이 필요하다. 구술의 관성에서 벗어나, 정책의 구조로 이동해야 한다. 염원은 말로 공유되는 순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것이 민원으로 축적되고, 정책으로 설계되며, 제도로 실현되는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염원 → 민원 → 정책 → 실현이라는 공적 시스템으로의 이행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몇 가지 최소한의 원칙이 확립되어야 한다. 심사와 지원의 기준은 공개되어야 하고, 과정은 기록되어야 하며, 결과는 검증 가능해야 한다. 윤리강령은 선언이 아니라 실제 제재가 가능한 규범이어야 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이 보호받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편파적 지원과 권력 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병행되어야 한다. 


새 정부에 요구할 과제 역시 분명하다. 무용진흥법의 실질적 제정과 제도화, 무용전문 도서관‧박물관, 국립무용원과 같은 인프라 구축, 그리고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하는 정책 설계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한 전제가 따른다. 무용계 스스로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떤 정책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구조 속에서는 제도 역시 또 다른 권력의 도구로 변질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책 요구와 내부 개혁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무용은 사라지는 예술이다. 그러나 무용계의 구조까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서로가 아니라, 서로를 소모시키는 방식이다. 더 이상 말로만 문제를 공유하는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구조를 바꾸는 실천으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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