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Vol.128-2 (2026.4.20.) 발행
글_ 장지원(본지 편집주간)
사진제공_ 한국춤비평가협회

얼마 전 문화예술평론가 1세대이자 한국 문화예술의 르네상스를 꿈꿨던 고(故) 박용구 선생의 10주기 추모행사가 있었다. 정식 명칭은 ‘박용구를 기억하는 어깨동무 모듬 잔치-10주기 추모 모임’이었는데, 한국춤비평가협회(회장 이종호)가 주최하고 아르코예술기록원이 협력해 4월 7일 대학로 예술가의집 다목적 홀에서 고인을 기억하며 개최되었다. 박용구 선생은 향년 10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0세기 척박한 예술 환경에서도 음악·무용평론가, 극작가, 연출가로 활동해 온 다방면의 지식인이었다. 이날 추모 행사에서는 발레리나 강수진의 세계적인 활약을 높이 평가했던 고인이 생전에 그녀를 위해 육필로 쓴 창작 발레 대본 <팔담(八潭)>과 뮤지컬 드라마 <백학이 된 옥녀(白鶴이 된 玉女>(이하 옥녀)의 육필 대본이 처음 공개되었다. 발레 대본은 그 원본이 강수진에게, 뮤지컬 대본은 아르코예술기록원에 전달되었다.
행사의 진행은 장광열(전 월간 <객석> 편집장)이 사회를 맡았고, 재불 무용가인 딸 박화경이 유족 대표로 줌으로 인사말을 전했다. 이후 고인의 육성이 담긴 생전 영상 감상, 평론가 박용구의 삶과 예술에 대한 강연 김채현(박용구 구술채록 연구자), 고인의 저술서를 통해 본 박용구의 어록을 정보원(아르코예술기록원장), 이지현(춤비평가)이 읽으며 주요 어록들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밖에도 내가 기억하는 박용구라는 순서에서는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이상일(비평가) 등 예술가, 비평가와 지인들의 추억담을 들어 보는 순서가 이어졌고, 박용구가 한국발레에 끼친 영향과 구술사의 오류 고찰에 대해 장지영(국민일보 문화부 선임기자)이 쓴 글이 대독되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순서를 통해 박용구 선생에 대한 다각도의 조명이 이뤄졌다.
이번 행사는 故 박용구 선생의 10주기 추모만이 아니라 비평가, 이론가, 아카이브, 역사화에 대한 관심과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우선 선생의 육필 대본 공개를 통해 단순히 개인을 기리는 차원을 넘어, 한국 현대 예술사의 공백을 메우고 개인 기록물의 공공적 가치를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학술적 의의를 지녔다. 더 확장해 보자면 미발표 텍스트의 발굴과 예술적 영감의 확장이라는 측면도 크다. 고인이 발레리나 강수진을 위해 집필한 발레 대본 <팔담>과 뮤지컬 드라마 <옥녀>의 육필 대본 공개는 한국 공연예술사의 중요한 사료적 발견이다. 이는 예술적 교감의 증거로써 비평가가 단순히 관찰자에 머물지 않고, 창작자에게 영감을 제공하며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비평과 창작의 상호작용'을 입증하기도 했다. 1세대 평론가로서 그가 지향했던 '한국적 발레'와 '뮤지컬 드라마'의 미학적 원형을 연구할 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하면서 그가 장르의 선구적 시도를 도모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박용구 선생은 한국 예술의 근현대화를 이끈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비평 철학이 어떻게 다음 세대(강수진 등)와 기관(아르코예술기록원) 등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며, 끊어졌던 한국 예술의 계보를 복원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 개인 기록의 필요성도 인식하게 되었는데, 개인의 육필 대본, 어록, 영상 등은 공공 기록이 담지 못하는 개인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핵심 수단이다. 개인 기록을 통해 공식 기록의 보완과 입체적 역사 구성이 가능해진다. 국가나 단체와 같은 공식 혹은 공적 기록 기록은 결과 중심적이지만 반면에 박용구 선생의 육필 대본과 같은 개인 기록은 그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아이디어, 창작 의도, 수정 과정, 같이 활동한 인물들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이는 거대 담론 위주의 역사학을 보완하여 보다 다각도의 예술사를 구성하게 하는 장점을 지녔다. 특히 '기억'에서 '기록'으로의 전이가 요구되는 바는 주변 인물들의 추억담과 육성 영상과 같은 ‘개별적 기억’ 들은 휘발성이 강하기에 이를 공유하고 기록물로 정리하는 과정은 개인의 기억을 사회적 공유 자산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어디선가 읽은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사라지지만, 기록된 기억은 역사가 된다."는 말은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 더해 아르코예술기록원이나 각종 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구술채록’은 개인의 사적 기억과 공공 기록의 양면을 충족시키며 중요한 방법론으로 대두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서 개인의 육필 기록은 저자의 호흡과 필적을 통해 그 당시의 시대정신과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따라서 아날로그적 진정성 보존이라는 면에서 <팔담> 원본이 강수진에게 전달되고, <옥녀>가 아르코예술기록원에 기증되는 것은 이러한 물질적 진정성을 공공의 영역에서 보존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더불어 기록을 통한 미래 가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 이번 추모 행사는 박용구라는 한 거장의 삶을 반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남긴 기록물들을 공적인 역사적 자원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개인 기록의 체계적인 수집과 보존은 미래 세대 연구자들에게는 학술적 토대를, 창작자들에게는 새로운 영감의 원천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박용구 선생의 육필 대본 기증이나 그에 대한 다각도의 아카이브 작업이 한국 문화예술의 자양분을 보존하는 '공적 책임의 실천'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번 행사를 기점으로 개인 아카이브의 중요성과 사회적 공유 자산으로의 전환이라는 측면을 다시금 되새기고 오늘날로 소환해 역사화하는 작업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현재까지 무용계에서는 구술채록으로 되돌아보았을 때 주로 실행자들을 다루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시대를 읽고 객관화하는 비평가, 이론가들에 주목해 아카이브 작업에 충실을 기하고 구술채록을 통해 역사화 하는데 관심을 가진다면 21세기처럼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전반적인 예술계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과 글을 바탕으로 비교적 개인의 기록을 남기는데 능숙하고 한국 문화계에 다방면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한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공적 역사가 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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