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古拙)’이라는 말이 있다. 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을 일컫는 말이다. 자칫 서투르고 유치해 보이지만 실은 대가의 반열에 올라섰을 때에야 표현할 수 있는 멋이다. 아이의 장난 같은 선 긋기, 아무런 꾸밈이 없는 어린 아이의 몸놀이 같은 움직임이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러나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는 피나는 연습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가 춤을 배우기 시작해서 춤꾼이 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적 훈련을 통해 ‘춤추는 몸’이 되어야 하며, 그 이후에야 춤꾼의 몸에서 자기만의 독창적인 움직임이 배어나올 수 있는 것이다. 춤은 인간의 몸을 움직여 표현하고 소통하는 예술이기에 창작과 행위 사이는 더욱 긴밀해진다.
일상생활과 춤을 통합하고자 극장 공간을 탈피하고 일상적 동작과 복장 등을 사용하였던 포스트모던댄스는 춤역사에 엄청난 파격을 안겨주었다. 일상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반인과 무용수의 경계를 허물기도 하였다. 그런데 포스트모던댄스를 주창했던 저드슨 댄스 그룹의 구성원들은 어설픈 춤꾼들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던댄스의 테크닉을 훈련했던 전문 춤꾼들이었다. 일상성을 강조했던 포스트모던댄스가 매너리즘에 빠지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게 되자 다시금 춤 테크닉이 부활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춤이 해체되고 ‘농 당스’가 만연한 프랑스의 춤계에서 진정한 의미의 ‘안무가’를 찾기가 힘들다고 했던 컨템포러리 댄스의 대가 수잔 버지(Susan Buirge)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요즈음 ‘컨템포러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많은 시도가 있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춤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컨템포러리’라는 말이 붙는 순간 춤은 사라지고 개념놀이, 말놀이로 탈바꿈한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근 10여 년 동안 컨템포러리 댄스라 하여 우리나라에 소개된 유럽의 많은 공연들에 기인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공연 중 일부는 매우 독창적이고 기발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었으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했다. 춤이 없는 춤, 일반인들이 추는 것 같은 춤, 움직임보다는 몸을 드러내는 전시성의 공연 등, 그야말로 서구 철학의 고민이 묻어있는 ‘그들의’ 컨템포러리 댄스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 춤계도 이와 같은 방식을 차용하고 그것의 모양새를 따라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컨템포러리인 양 환영하는 흐름이 생겼다. ‘oo 리서치’ 등의 수식어를 붙인 공연, 강연 형태의 공연, 일반인 출연자가 등장하여 발언을 하고 스스로를 전시하는 공연… 오히려 춤 잘 추는 춤꾼이 무대에서 사라지고 훈련된 몸에서 나오는 안무가 해체되고 있다. 이제는 순수하게 몸 움직임만으로 승부하면 시대에 뒤처지는 진부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관객은 순수하게 몸놀이를 감각하고 싶은데 개념과 말놀이가 이를 가로막고 있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조차 창작자 내면의 절실함이라는 것은 결여된 채 누군가가 허울 좋게 포장해 놓은, “실행보다 해석이 더 그럴듯한” 공연들이다. 도대체 이것의 어느 부분이 ‘컨템포러리’한가? 과연 이 공연들이 한국의, 우리 시대의, 우리 춤계의 ‘동시대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여기서는 어떠한 안무적 고민도, 몸에 대한 진정성도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앞서 언급했듯 몸을 그저 ‘사용하고 움직인다’고 해서 그것이 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일상답게 춤추기 위해 일반인이 무대 위에 서서 정제되지 않은 ‘나이트용 막춤’을 휘갈기는 것은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이 같은 공연 현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현한 우리 웹진의 한 리뷰에 악플이 달렸다. 몸놀이의 장이 되어야 할 춤공연이 관념놀이의 장으로 변해가는 현상을 지적하고 있는 글을 새겨보지 않은 채 치기어린 비판의 댓글이 달린 것이다. 본 웹진의 글에 대한 의견제시나 건전한 논쟁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인신공격성 글은 춤생태계에 악영향을 초래하고 그 반향이 고스란히 본인에게 돌아갈 수 있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글_ 편집장 이희나(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