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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이 선택한 당신, 어떻게 살 것인가?

 지난달 경상대학에서 열린 ‘One Asia in Dance’ 국제포럼에서 “아시아춤의 세계관”에 대해 발제하였습니다. 이 주제는 아시아 지역에서 무용수로 자라나서 민족무용학(Dance Ethnology)을 공부하고 아시아춤을 특성화한 국제예술페스티벌의 기획자로, 또 무용잡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고, 이제는 춤의 현장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무용인류학자로 전환한 필자의 정체성을 반추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특히 구술사라는 방법으로 원로 무용가들의 생애사를 기록하거나 특정 주제에 대해 무용가들의 증언을 채집하는 현장에서 들었던 근원적인 질문, 즉 “아시아 무용가들은 왜 춤을 추는가?”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미완(未完)의 소견(所見)이지만 암울한 무용생태계에서 “왜 나는 춤을 추는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번민하는 동료들과 후배들을 보며 발제 내용의 일부를 공유해볼까 합니다.

 대부분의 우리 무용가들은 어릴 때부터 춤에 특별한 자질을 보여 춤에 입문하였다고 진술합니다. 춤과의 만남을 숙명(宿命)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를테면, “내가 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춤이 나를 선택했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무용가들의 숙명의식은 인도의 전통사상인 ‘카르마(Karma)’와 ‘다르마(Dharma)’를 떠올리게 합니다. 카르마는 불변의 숙명으로서 업(業)에 해당하며, 다르마는 정해진 카르마를 채워나가는 운명(運命)으로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잣대'로서의 질서이자 본성으로 해석됩니다. 무용가들에게 춤이라는 것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카르마이고 숙명이며, 차차 성장해가면서 무용가의 삶을 자신의 다르마이고 운명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무용가로서의 카르마와 다르마를 깨우치고 나면 매순간마다 고민을 하게 됩니다. 바로 지금 여러분들이 번뇌하는 그런 생각들로 말입니다.

 아시아의 무용가들은 춤의 철학에 대해 질문을 하면 공통적으로 춤추는 자신의 몸을 우주에 연관시켜 설명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몸은 소우주이며, 자신의 몸을 둘러싼 외부세계는 대우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춤을 추며 자신의 몸을 통해 우주와 교감을 추구한다는 것이지요. 주변세계와의 교감을 추구하는 것은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세계관이며, 춤추는 나의 정체성이 없어질 정도로 혼신을 다해 춤을 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혼신하고 헌신하는 것이 우리 무용가들의 숙명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춤을 춘다는 것은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는 종교의 길이며 도(道)의 세계로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춤을 위한 정진에는 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났던 원로무용가들은 한 결 같이 후학들에게 중단 없는 수련을 촉구하지만 욕심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는 『주역(周易)』에서의 ‘지산겸(地山謙)’이란 괘 를 떠올리게 합니다. 지산겸은 “잘 익은 벼라야 고개를 숙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공(功)과 지식(知識)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고 남보다 앞서려고 하므로 서로 막혀 통(通)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겸(謙)은 이러한 모든 것을 갖추었으되, 자신(自身)을 낮추고 남을 높이려 하고, 자신(自身)을 그늘에 두고 남을 드러내고자하니 만사(萬事)에 있어 형통(亨通)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산겸은 도달했으나 내려오고, 채웠으나 비운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아시아의 미학인 ‘노경(老境)’과 상통합니다. 춤에 있어서 ‘노경’은 “손 하나만 들어도 춤이 된다”라는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춤의 수련을 쌓아 경지에 오른 무용가는 무대 위에서 손만 들어도 절로 춤이 된다는 표현이지요. 애써 움직이지 않으니 보는 사람은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감상하며, 오랜 시간동안 축적한 내공(內攻)으로 움직이니 작은 움직임에도 보는 사람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용가 여러분이 번민하는 근원적인 문제의식은 비단 여러분 개인의 것만이 아닙니다. 무용가로서 업(業)을 택한 이상은 최고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부단히 수련해 가십시오. 그러나 탐욕은 금물입니다. 자신과 동료를, 나아가서는 무용생태계를 오염시키는 근원은 탐욕입니다.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