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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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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에게 책상을 허(許)하라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련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일본제국의 온갔 판도내(版圖內)와 아세아의 문명 도시에는 어느 곳이든 다 있는 딴스홀이 유독 우리 조선에만, 우리 서울에만 허락되지 않는다함은 심히 통한할 일로 이제 각하에게 이 글을 드리는 본의도 오직 여기 있나이다.”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종합문예지 <삼천리>의 1937년 1월호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제목으로 위와 같은 글이 실렸다. 당시의 끽다점 비너스의 마담, 대일본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 조선권번의 기생, 여배우 등이 공동으로 올린 것으로 일종의 탄원서이다. 77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읽어보면 헛웃음이 도는 글이지만, 그 당시의 문화예술인들에게 ’딴스홀‘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면 저런 글을 공개적으로 올렸을까 싶다.

 

 얼마 전에 현대무용가 H가 우리 자료원을 방문했다. 그녀는 책으로 둘러싸인 연구공간을 둘러보더니 부럽다고 했다. 그녀는 홍은창작센터에 입주한 안무가이다. 그녀의 연구공간을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선생이야말로 좋은 연구공간을 갖고 있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우리 자료원은 변두리에 위치하며 연구공간은 좁고 누추하여 그녀의 널찍하고 안락한 공간과는 비견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H는 내년이면 창작센터에 입주한지 3년이 되어서 나와야 하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다고 하였다. 순간 의아했다. 안무가에게 연구공간이 왜 꼭 필요한 것일까?

 

 H에 의하면, 요즘의 창작과정은 과거와 달라서 무용수들과, 또는 협력예술가들과 연구하고 토론할 책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창작에 도움이 될 자료를 실시간으로 검색할 컴퓨터도 있어야하고, 언제든지 볼 수 있는 문헌들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차, 싶었다. 현대무용이 컨템포러리댄스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개념과 리서치가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제 안무가들에게는 창작을 구현하는 연습공간뿐만 아니라 창작을 고민하는 연구공간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은 안무가들에게 작품에 깊이를 가져다주는 중요한 창작과정일 것이다. 창작자에게 고민이란 것은 작품을 위해 자신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이며, 자신과 진솔하게 나누는 깊이 있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대는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고, 고민의 힘이 살아가는 힘”이라고 한다. 일본의 세이가쿠인대학 학장으로 있는 한국인 교수 강상중이 『고민하는 힘』이란 책에서 역설한 말이다. 강상중은 이 책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철저하게 고민하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갈 것”을 강조한다. 그가 고민을 위해 던진 9가지 질문 중에서 몇 가지는 올바른 삶과 창작의 가치를 고민하는 안무가들에게 방향키를 제시해 줄 것 같다. 이를테면, “나는 누구인가?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춤]을 [추]는가? 늙어서 ‘최강’이 되어라”이다.

 

 자신의 창작을 위해 지긋지긋할 정도로 깊이 있게 고민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깨우침을 갖게 되고, 그런 깨우침으로 만든 작품은 관객들에게도 깊은 성장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니 안무가들이여, 이제는 절박한 심정으로 책상 앞에서 고민하라!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