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살 적이었던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심부름을 다녀오면서 가게 입구에 진열되어 있던 예쁜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그 메모지가 탐났던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심부름 하고 남은 돈으로 그것을 사서 돌아왔다. 심부름 품목과 영수증, 거스름돈을 비교해보신 어머니는 잔액이 맞지 않자 그 이유를 물어보셨고, 결국 나는 어머니의 돈을 함부로 썼다는 이유로 눈물을 쏙 뺄 만큼 호되게 혼이 났다. 채 백 원도 되지 않던 가격이었지만 그 날 이후로 나는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함부로 쓰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돈에 관한 문제뿐 아니라 정직, 신뢰와 같은 도덕적 덕목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 한 편을 장황하게 끄집어내는 이유는 약 한 달 전부터 수면 위로 떠오른 한 춤계 뉴스 때문이다. 그것은 올해로 2회를 맞이했던《대한민국 전통무용제전》에 관한 것으로, 지난해(2014년) 사업을 위해 지원된 정부보조금이 주최측의 개인 ‘쌈짓돈으로 전락’되었다는 의혹(대전투데이, 2015년 10월 22일자)을 보도한 것이다.《대한민국 전통무용제전》은 근대 전통춤의 선구자인 한성준(韓成俊) 선생을 기념하기 위한 전통춤 축제로서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와 연낙재가 주최하는 행사이다. 해당 기관의 대표인 모(某) 교수는 이 사업을 위해 지원받은 국비와 군비, 도비 등 4억 원 중에서 2억 6700여 만 원 458건에 대해 지출과 관련된 증빙 서류를 제출하지 못했으며, 그밖에 사업과 관련한 다른 증빙서류들도 미비하였다 한다. 이러한 이유로 본 행사를 후원했던 홍성군은 해당 금액 환수 요청과 함께 대표자를 경찰에 고발한 상태이다.
정부지원금의 부당 착복 문제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십 여 년 전 역시 수억 원 대의 정부보조금을 받아 집행되었던 한 국제무용콩쿠르 역시 낮은 평가를 받고 재심의를 한 일이 있다(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해당 콩쿠르는 여전히 정부지원금을 받아 열리고 있다). 일부 거대 단체가 정부기금을 독식하고 있다는 기사도 심심찮게 보아 왔다. 게다가 지원금 부당 착복이야 굳이 춤계만의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우리 춤계가 도덕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새삼 깨달은 것은 이 소식에 대한 춤계의 후속 반응 때문이었다. 언론에 의하면 한국춤문화유산기념사업회는 홍성군 측에 행사 보조사업비 정산 재검토를 비롯해 행정권 남용에 대한 해명과 사과, 관계 공무원 문책 등 철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애초에 본인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서류 제출, 경찰 출석 등의 관(官)의 요구를 묵살하다가 이런 식으로 반격하는 것은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부 무용인들과 전통춤 관계자들은 지난 11월 23일,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에 대해 충남 홍성군이 행정권을 남용했다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춤계 인사 45명의 성명을 발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태에 대한 진위여부를 알아보지 않은 채, "홍성군은 자기 고장 출신의 역사적 인물을 조명한 행사의 사업비 정산과 관련해 불법적인 행정조치와 고발로 행사 전체의 성과와 대외적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켰다"고 주장하며 대표자인 모(某) 교수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나는 항상 궁금했다. 왜 우리 춤계는 내부의 부조리와 잘못에 한없이 너그러워질까. 춤계에 몸담은 후 보고 들어온, 혹은 직접 겪어온 부조리함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회의감이 밀려온다. 이쯤 되면 내부로부터 자성(自省)의 목소리가 들릴 법도 한데 오히려 ‘제 식구 감싸기’ 식으로 부정(不正)을 옹호하는 모습만 보이니, 이는 결코 건강한 춤 생태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한 젊은 안무가가 국립국악원의 예술 검열 사태에 항의하여 공연 거부 및 일인시위 행동을 취한 일이 있다. 그가 사회의 불합리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고 온몸으로 외로운 투쟁을 벌이는 동안, 우리 춤계는 무엇을 함께 했던가? 지원금 검열에 걸린 행사를 옹호하기 위해 한 목소리를 낸 춤계 인사들, 그들이 과연 그 젊은 안무가와 같은 편에 서서 사회의 불합리를 향해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한쪽 진영에는 정직성과 도덕적 양심이 결여된 교수와, 사태를 면밀히 파악해보지도 않은 채 무조건 그를 두둔하고 나선 춤계의 여러 인사들이 있고, 한 쪽 진영에는 건강하고 올바른 춤과 예술 생태계를 위해서 꿋꿋이 행동하는 젊은 무용인이 있다. 또 다른 진영에는 이 사태들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거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며 수군거리는 이들이 있다. 이 일련의 상황이 그려내는 씁쓸함과 비참함이 참으로 크다.
11월 23일의 기자회견장에 내 걸린 플래카드에는 “홍성군은 위대한 전통예인 한성준을 버렸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그토록 그들이 기억하고 싶다고 언급한 한성준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는 장본인이 과연 어느 쪽인지, 모두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글_ 편집장 이희나(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참고자료
국제뉴스/ 대전투데이 (2015. 10. 22)
뉴스1코리아/ 뉴시스/ 서울경제/ 연합뉴스/ 이데일리 (2015. 11. 23)
국제뉴스/ 대전투데이/ 아시아투데이 (2015. 11. 25)
충남일보 (2015.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