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이라는 깃발이 나부끼고 융복합 예술이 각광받는 시대입니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악가무(樂歌舞)에 시서화(詩書畵)를 아우르는 융복합 예술의 총화는 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 가장 융성해야할 예술가들은 무용가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문화중심에 서 있어야 할 춤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지난 3개월간 캐나다 밴쿠버에서 지내다가 며칠 전에 귀국했습니다. 그곳에서 태양의 서커스, 푸쉬국제공연예술제(PUSH), 르빠쥬의 최신작 <886>, 원주민들의 토킹스틱페스티벌(Talking Stick Festival) 등 대극장, 실험극장, 무용센터, 그리고 커뮤니티센터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공연들을 보고 왔습니다. 그곳에는 예술가들의 공연에서부터 지역민들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공연들이 상시로 열리며, 가는 곳 마다 관객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좋은 공연이다 싶으면 매진되기 일쑤였습니다. 그곳의 공연들 또한 요즘의 우리네 공연들처럼 테크놀로지, 내레이션, 사운드, 서커스 등 다장르의 융복합 예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라면 그 중심에 언제나 움직임과 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네 공연장의 풍경과 여러 측면에서 비교가 되었는데,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객석의 90퍼센트 이상이 일반 관객들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네처럼 현판, 현수막, 깃발, 포스터 등 요란한 홍보물을 찾아 볼 수 없는데도 그 많은 관객들이 스스로 공연 정보를 찾고 표를 구입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극장의 구성원들도 제게는 낯선 모습이었습니다. 객석의 출입구를 지키는 어셔들은 노인과 학생들이었고, 이들은 봉사의 대가로 공연을 관람하는 것 같았습니다.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은 도시 상황을 고려하여 공연을 정시에 시작하지 않고 관객들에게 여유를 주는 극장측의 유연성도 눈여겨볼 만 했습니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공연을 대하는 관객들의 태도였습니다. 어떠한 공연이든 진심에서 우러나는 박수로 공연자들에게 격려와 감사의 마음을 보내고, 조금만 감동스러워도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그곳 관객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저들의 관람 태도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우리네 관객들은 왜 저런 태도를 보여주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서 우리네 춤에 대해 여러모로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타지에 있어서인지 성찰이 따랐습니다. 소위 춤과 관련하여 연구, 기획, 교육, 행정, 아카이브를 담당하는 나라는 춤 전문가는 정녕 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라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또, 무용과에 진학한 이래로 수십 년을 춤 관객으로 살아온 나의 태도는 어떠했는가를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곧 내가 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개뿔, 춤도 모르잖아!” 이 사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 “춤을 안다”는 이웃 분들이 춤생태계로 왕림하여 무대를 진두지휘하고 강습까지 해주는 일이 허다하니 감사하다고 표현해야 하는지, 분개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창작의 기회, 무대의 기회, 생존의 기회에 목말라하는 무용가들을 제치고 이웃 분들에게 번듯한 기회를 내어주는 것도 무용가들이니 말입니다. 용병 예술가를 고용해서라도 춤계에서 선제권이나 권력을 쥐고 싶어 하는 ‘욕망의 무용가들’ 말입니다. 용병들의 춤에 대한 ‘앎’과 ‘상상력’이 그럴 듯 했다면, ‘분개’와 같은 단어가 등장할 리가 없겠지요. 춤공연의 32년차 관객이자 춤현장의 전문가로 21년간 활동한 나라는 사람의 눈에 그들의 무대는 “개뿔, 춤도 모르면서!”일뿐입니다. 그런 무대에는 요란한 표제와 휘황찬란한 스펙터클만 존재할 뿐 어떠한 감동도, 어떠한 영감도 받을 수 없습니다.
에릭 홉스봄이라는 역사학자는 유작 『파열의 시대』에서 지난 세기의 전위 예술, 개념 예술, 스펙터클의 예술 등은 소수계층의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전근대적 부르주아 예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홉스봄에 따르면 보다 전위적이고, 보다 개념적으로 나아가는 예술일수록 이해를 구하기 위해 혹은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류학자의 글과 같이 부연설명을 필요로 하므로, 근본적으로 실패한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감동과 영감을 주는 공연에는 굳이 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공연에는 관객들도 넘쳐나기 마련입니다. 또, 좋은 공연이 좋은 관객을 만드는 것이 진리입니다. 어느 무용학자는 춤을 가리켜 “세상의 앎을 몸으로 아카이빙”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무를 가리켜 “세상을 짓은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좋은 춤 공연이란 춤을 통해 무용가의 앎의 세계와 삶의 세상을 보고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용가 여러분, 지금 우리 시대에서 융복합 예술의 조타(操舵)는 여러분의 손에 있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말아 주십시오. 자신의 특권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일은 이제 그만 두시고,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고 스스로 세상을 지어 춤의 힘을 보여주십시오.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 사족입니다: 댄스포스트코리아의 편집진, 필진, 광고주, 독자 여러분들께 사죄의 말씀 올립니다. 1, 2월호 통합 이슈를 발행하고, 또 발송까지 늦어진 것은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 앞으로 더 성실하고 알찬 내용으로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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