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사로운 햇살과 높아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계절이 관통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2017년 현재 대한민국은 ‘축제공화국’이라 불릴 만치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축제가 열리고 있다. 서울에서만도 여러 국제 행사와 공연 축제들이 동시다발로 진행 중이다. 특히 금년은 추석연휴가 무려 10일간이나 이어진 관계로 축제나 행사 주최자들이 개최 시기나 공연 일정에 신경을 썼다지만 공연 일정이 하루에도 몇 개나 중첩된다. 이율배반의 시공간 속을 갈등하며 오가다가 기억할 만한 풍경들과 조우했고, 여기서 필자 못지않게 지인들이 행복해 하는 표정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이 지면을 빌어 의미 있었던 풍경 몇 개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풍경 하나, 월간 <춤> 지령 500호 발간
얼마 전 공연장에서 월간 <춤>지 편집장으로부터 10월호를 선물 받았다. 붉은색 꽃들로 소담스레 채워진 화병 그림의 표지 한 쪽에 ‘500호 기념호’란 글씨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무려 41년간 단 한 호의 결간도 없이 춤 잡지를, 그것도 월간으로 발행해왔다는 것은 전례가 없다. <춤>지의 위대한 여정에 놀랍고 감사하며, 또 한편으로는 숙연해진다. 춤에 대한 시선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던 지난 시절의 우리 사회에 ‘춤’을 전면에 내세운 월간지를 창간했던 고(故) 조동화 선생의 뚝심, 그리고 무용계를 ‘지성’의 성숙한 단계로 진입시키고자 노력했던 그의 선구자적 행보에 새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사다난하고 어려웠던 환경 속에서도 오직 한 길을 걸었던 원로 예술가들의 지혜와 실천, 배려의 마음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반면 변환의 시대마다 권력 주변을 서성대고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 무용계 지도자들을 떠올리며 일견 마음이 무거워진다. 종이가 사라진 시대가 되면서 젊은 무용가들이 더 책을 읽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지만 오래된 이 잡지가 아날로그 감성을 오롯이 지켜내며 우리 곁에 오랫동안 남아주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풍경 둘, 20회를 맞은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의 성년식
신촌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실었다. 스무 번 째 SIDance 개막공연을 관람하고 축하 인사를 건네기 위해 서강대 메리홀로 걸음을 옮겼다. SIDance가 출발할 즈음인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필자는 이 축제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왔다. 국립극장을 시작으로 최근의 춘천아트페스티벌에 이르기까지 축제부장을 도맡아 해왔기에 축제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이 무용축제는 언론사에 재직하던 한 패기만만했던 춤평론가가 “꼭 하고 싶다는 마음과 꼭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출범 직후에 터진 IMF사태로 어려운 경제 여건을 극복하고 SIDance는 이제 대한민국을 넘어 국제적인 브랜드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가혹한 희생을 감내하며 이 행사를 지켜 온 예술감독의 열정에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금년 20회 개최를 변곡점으로 2018년부터는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축제를 이끌겠다는 그의 프로그램 인사말이 사뭇 의미심장하게 그리고 묵직한 울림으로 각인된다.
풍경 셋, 제17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의 공동제작 성공
SPAF 2017에서 해외 초청작 몇 편을 관람했다. 그 중 디미트리스 파파이오아누의 <위대한 조련사>는 이번 가을 시즌의 공연홍수들 속에 단연 빛나는 명품이자 SPAF의 걸작으로 손꼽고 싶다. 이 공연은 금년 아비뇽페스티벌에 초연되어 “우리를 죽음에 길들이며 인생과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란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SPAF 오픈 전부터 입소문이 나 있었던 터라 매진사태를 기록하며 관심을 증폭시켰다. 휴식시간도 없는 1시간 45분간의 공연은 막이 올랐을 때부터 숨 쉴 틈 없이 긴장감으로 몰아넣었고, 막이 내릴 때까지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안무가이자 연출자인 천재 아티스트가 펼쳐 놓은 한 편의 대서사시에 감탄과 함께 기립박수로 화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 <위대한 조련사>의 작업에 SPAF가 전 세계 대표 페스티벌과 함께 공동제작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은 공연기획자의 입장에서 너무도 반갑고 일견 뿌듯했다. 우리 공연예술축제의 위상과 전문 코디네이터의 기획력과 선구안, 그리고 우리나라 국제교류의 안목이 세계 수준임을 실감케 해 준 쾌거이다. 공연 후, 로비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노 안무자가 파파이오아누와 기념사진을 찍는 풍경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 역시 공연의 감동을 오래도록 간직하고픈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후 지인들과 차를 마시며 왜 우리는 이런 공연을 만들지 못할까하는 부러움과 반성과 함께 이러 저러한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가을밤은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2017년, 진정성 있는 몸과 춤의 가치에 대해 고민해 본다. 특히 다음 세대 무용가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반문해 본다. 윗세대는 마음을 비우고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 아랫세대는 예술가로서의 실존과 존재감부터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춤으로 의미 있는 시간을 지어 행복한 공간을 더 자주 노출시켜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아닐까 생각된다. 깊어가는 이 아름다운 만추에 추일서정(秋日抒情)의 감성으로 춤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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