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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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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무용학을 기대하며

 박사학위 인플레이션이다. 사회 어느 분야가 다 그렇듯 무용계도 마찬가지이다. 철저하게 실기 중심인 한국의 무용학, 무용계의 카르텔에서 박사학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지 가끔 의문이 들지만 다들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하려 한다. 그러다보니 공연 팸플릿에 나온 주요 무용수들의 약력을 보면 다들 박사 수료자들이다. 이것이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비롯된 선택이라 순수하게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없지 않으니 학위에 대한 진정성을 흐리게 한다.

 이러한 원인은 한국 무용계에서 대학의 비중이 크기 때문일 듯하다. 공연 활동의 중심이 학교 무용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으니 석, 박사 학위 과정을 통해 소속감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대학에서 수업을 맡으려면 학교 전체적인 시스템에 맞추어 박사 학위가 필요하니 수많은 고학력자들이 배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학자들의 끊임없는 연구가 지속되면 좋겠지만 ‘무용학’이란 이름으로 제대로 된 내용과 실제 속에서 존재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는 회의적이다.

 다들 박사학위 논문 쓰느라 지쳐서 그렇겠지만 그 이후 연구는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박사 학위 이후 한 편이라도 논문을 쓴 사람에 대해 통계를 내본다면 얼마나 될지 적이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박사학위는 학문의 출발임에도 마지막 자격증으로 치부되니 이러한 구조가 필요한지 의문이 제기된다.

 지금은 진정한 무용학 연구자, 이론가들의 출현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다. 실제 공연 현장의 무용은 언제나처럼 끊임이 없다. 그런데 끊임이 없음에 비해서는 변화와 발전의 속도는 항상 그대로이다. 무용에서 문(文, 소프트웨어)은 달리려 하고 있지만 질(質, 하드웨어)이 정체되어 있으니 그 걸음은 항상 제자리다. 초현실주의가 시대를 풍미한건 살바도르 달리로 집중되지만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의 출간이 마중물이 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도 수많은 이론의 홍수 속에서 다양성이 확보되었듯 무용학도 다양한 학문적 연구가 요구된다.
그럼에도 무용학 연구는 특히 학위논문은 어떤 방법론에만 귀착되어 그 틀에 무용을 맞추다보니 창의적이지 못하고, 재생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유연하게 박사 논문 이후는 학위 논문을 중심으로 파생하여 여러 실험적 연구를 이룬다면 무용학은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질 것이다. 실제를 알기에 나와 같은 책상물림들이 못하는 공연 발전을 위한 토대 마련과 공감대 형성을 더욱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학회 편집 일을 맡으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많다. 다른 모든 학문 분야 학회처럼 논문을 모으는 것도 힘든 일이고 심사위원 배정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얼마 안 되는 심사비로 부탁을 드리는 것은 면구스럽고 죄송하지만 그래도 후학을 위하고 무용학 발전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임해주시리라 생각하여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드린다. 그런데 가끔 심사서를 총괄하여 검토하다보면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성심성의껏 부족한 부분을 지적 해주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기술하였다 방법론 운운하며 서너 문장으로 게재불가를 판정하는 경우 투고자가 어떻게 수용할지 고민이 되는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

 기존의 학자들도 학문에 대해 결벽증을 가지고 연구를 하겠지만 유연하게 다른 시각으로도 바라볼 눈이 필요하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최고이지만 새로운 분야에 대한 수용과 변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견 학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가끔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자조적인 농을 한다. ‘그래도 우리는 죽으면 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學生)에서 박사부군신위(博士府君神位)로 급이 높아진 것 아닌가?’

 학문에서는 언제나 학생이지만 그래도 박사 학위에 헛됨 없는 모습을 위해서는 학자라는 이름에 걸맞은 실천이 필요하다. 이 길이 꽃길도 아니고 지향점도 약하지만 기존의 틀을 허물고 진보적인 가치를 만든다면 그래도 지금보다 가속도가 붙어 무용학, 무용 공연이 발전하지 않을까 막연하면서도 긍정적인 희망이 가지며 이러저러한 쓸데없는 소리를 한 번 해 본다.


글_ 편집자문 김호연(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