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로 뜻을 풀이하고 있다. 첫 번째는 ‘두려움이나 송구함을 무릅쓰고’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말이나 행동이 주제넘게’라고 되어 있다. 사전상에 첫 번째로 언급되고 있다는 것은 가장 널리 쓰이고 그 쓰임 중에서도 중요도가 높다는 의미지만 ‘감히’의 체감은 그렇지 않다. ‘감히’의 사전상 첫 번째 의미는 문학적 수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낡은 것이 되어버린 듯하고, 우리의 실생활에서 ‘감히’를 맞닥뜨리는 순간은 대개 “네가 감히 내 앞에서 말대꾸를 해?”와 같은 두 번째 의미일 때다.
조선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지 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가부장적 유교 질서가 온존해 있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 두 번째 의미의 ‘감히’는 사회 분위기를 그대로 압축한 단어다. 제자가 스승에게, 후배가 선배에게,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감히’ 거역하거나 제 의견을 내세우거나 허락을 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세상은 예전과 달라졌으며, 지금 우리는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과연 그러한가? 스승이 제자를, 선배가 후배를, 연장자가 연소자를 때려서(언어폭력과 신체에 가해지는 폭력을 모두 포함해) 가르침을 주는 행태가 ‘문화’ 또는 ‘관행’으로 버젓이 남아 있고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대물림구조에서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라는 식으로 앞다투어 ‘구조의 피해자’ 되기를 자처하며 구조가 그러하니 이 세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과 패배주의가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무용계에 과연 민주주의라는 체제가 이식될 수 있는가? 아니, 무용계에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시민’이 과연 존재하는가?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예술계(무용계)라는 특별한 세계는 본디 ‘시민’을 길러내는 데 별 관심이 없는 세계다. 예술(무용)이라는 신을 모시는 영매들인 예술가(무용가)들이 사제의 자격으로 신도들을 거느리며, 신도들의 추앙을 명분 삼아 스스로 신이 되어 신전으로 걸어들어가는 이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신과 사제와 신민들뿐이었기에 애초에 ‘시민’이 들어갈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화와 문학에서 인간이 신이 되려 할 때 그 결말은 처절한 비극으로 치닫는데, 이는 무용계에서도 다르지 않다. 무용이라는 신을 모시는 무용가가 사제의 자리에서 신의 권능을 발휘하며, 더 나아가 스스로 신이 되어 발아래 신도들을 무릎 꿇릴 때, 비극은 발생한다. 신화나 문학에서와 다른 점은 신화와 문학에서의 비극이 신이 되려 한 자의 파멸로 귀결된다면, 무용계에서는 신의 권능을 휘두른 자가 아니라 그 권능에 의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에게 비극이 닥친다. 피해자들은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이 세계에서 추방되는 형벌을 받는다. 신이 되려 했던 자들은 신으로 추앙받으며 무탈하게 살아간다. 무용계의 신은 기독교와 같은 일신교가 아니라 그리스․로마나 이집트, 중국의 원시 다신교 신앙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이 지배하는 무용계라는 신국(神國)에 위협으로 다가온 것은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두 대통령이 수장으로 있는 민주공화국 정부에서 실행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존재다. 특정 예술가들의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지원금상의 불이익을 준 것이 드러난 것이다. 무용가들을 포함한 예술가들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예술에 개입한 공권력에 분노하며 이에 대한 처벌과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시위에 나섰다. 과거 민주화운동에서 예술가들이 예술을 투쟁의 한 도구로 삼아 운동에 참여한 것과는 결이 다른, 예술가들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한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신민으로 살았던 자들이 비로소 시민으로 각성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한 것이다.
블랙리스트에 대한 분노가 정부 차원에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실행한 것이 ‘불의’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블랙리스트를 통해 예술가들에게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예술의 내용에 개입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불의’와 이로 인해 예술가들에게 돌아온 ‘불이익’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탓에 분노의 뇌관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은 또한 매우 어려우며,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실행과는 정반대의 수순으로 ‘불이익’이 드러난 다음에야 ‘불이익’에 앞선 ‘불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이러한 블랙리스트에 대한 분노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무용계에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침묵하며 피해자들이 당하는 ‘불이익’을 방조해온 과거에 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어떻게 공권력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하는 예술가들을 (블랙리스트로)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외치면서, 동일한 질문인 ‘어떻게 예술권력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아야 하는 예술가들을 (언어폭력과 신체적 폭력, 성폭력, 권력을 이용한 위계폭력 등으로) 억압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질문은 유보할 수 있는지, 또 다른 의문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예술계에서는 후자의 질문이 2016년에는 #OO계_내_성폭력 이라는 해시태그 고발의 형태로, 올해는 예술계를 넘어 사회 전 분야로 퍼져간 #MeToo 운동으로 던져진 바 있다. 이 운동은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당하는 성폭력에 대한 고발에만 그치지 않고 인권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윤리의 문제를 바닥에서부터 다시 묻는 운동이다. 스승이 제자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연장자가 연소자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그래도 되는’ 것으로 용인되었던 ‘문화’나 ‘관행’이 실은 ‘문화’도 ‘관행’도 아니며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그래선 안 되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근절해야 하는 ‘폭력’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주는 운동인 것이다.
결국 ‘인간답게 살기’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운동은 아직까지 ‘감히’가 지배하는 무용계라는 신국의 질서에 역행한다. 아직 ‘시민’으로 살아본 경험이 없는 무용계의 신민들은 이 운동을 입으로는 지지하면서 몸으로는 낯설어하고 불편해하며 성폭력 범죄를 고발당한 동료를 감싸주거나 고발한 피해자의 입을 막으려 한다.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고 말한 입으로 성범죄 전력이 있는 예술가의 공연에 대해 ‘값진 노작’이라고 치하하며, 예술가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면서 성범죄 전력이 있는 예술가와 손을 잡고 일할 수 있다. 인권과 인간의 윤리를 묻는 이 운동은 아직 무용계의 시민운동으로 이식되지 않았다.
‘감히’는 권위주의 시대의 언어다. 권위주의 시대의 언어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다. 그러니 혹시 몸만 민주주의 사회에 와 있고 머리와 입은 권위주의 시대의 언어를 고민 없이 받아들이는 문화지체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지금이 21세기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21세기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댄스포스트코리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