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디어오늘>을 통해 유명 현대무용가 류 모씨의 성폭력(타인에게 육체적 손상이나 정신적, 심리적 압박을 주는 강제력을 띤 성적 행위) 사건이 보도되어 무용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피해자는 류 씨에게 개인 교습을 받아온 무용 전공 대학생으로, 류 씨는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성폭력은 류 씨의 개인 연습실에서 피해자와 단둘이 있는 시간에 일어났다. 사건에 대해 류 씨가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합의된 관계였고 피해자와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피해자는 성추행이 반복됨에 따라 다음번에는 강간을 당하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시달렸지만, 무용을 계속해야 했기에 차마 고발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는 정반대 입장을 내놓았다.
류 씨가 피해자에게 저지른 성폭력은 전형적인 그루밍 범죄의 성격을 띠고 있다. 피해자는 언론에서 류 씨와 그의 아내인 모 대학 무용예술학과 학과장인 이 모 교수를 “부모님처럼 따랐다”고 말하며 류 씨에게 무용을 지도받으면서 ‘선생님처럼 되려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해’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았다. 첫 번째 성추행이 일어난 시점은 피해자가 콩쿠르에서 입상한 직후로, 류 씨는 자신 덕분에 상을 탔으니 밥을 사라며 피해자를 불러냈고 식사 후 둘만 있는 개인 연습실에서 성추행을 저질렀다.
류 씨는 ‘합의 관계’였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이렇듯 가해자가 피해자의 심리를 조종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장 안에서 일어난 그루밍 범죄의 특성상 가해자의 입에서 나온 ‘합의’를 전적으로 신뢰하기란 어렵다. 또한, 류 씨는 <충북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는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면서도 “왜곡된 내용들이 있어 법적 대응 할 예정”이라고 밝혔는데, 이 역시 잘못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불특정다수를 향해 사과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피해자에게는 명시적으로 사과하지 않는, 성폭력 사건의 다른 가해자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피해자에게 직접 사과하는 것이 가해자에게는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 류 씨를 소개한 류 씨의 아내 이 교수는 피해자가 찾아와 성폭력 사실을 털어놓자 “네가 착각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가 “지난 일이니 잊으라”고 말했는데, 이 교수의 태도 역시 피해자의 기억을 의심하고 피해자의 심리적 불안정을 이용하는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양태다. 피해자에게서 피해 사실을 들은 류 씨의 무용단 단원이 “선생님이 너를 예뻐하시나 보다”라고 말한 것 역시 성범죄 피해자의 주변인들이 성폭력 사실을 부정하며 보이는 2차 가해의 전형적인 반응이다.
틀에서 찍어낸 듯이 전형적인 성범죄 사건의 요소들을 빠짐없이 갖춘 이 사건에 대해 무용계는 기사를 공유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거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우리의 동료였다는 것이 참담하다는 감정적인 반응을 내놓고 있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무용계의 구성원들은 결코 혼란스러운 제3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류 씨가 성폭력 가해자로 드러났다는 사실 하나만 새로운 것일 뿐, 이 사건은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듯 돌발적이거나 우연히 일어난 이례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루밍 범죄가 싹트기에 너무나 비옥한 토양을 갖고 있던 무용계가 은폐하거나 방조해왔던 무수한 사건들 중 하나가 법정 사건화되면서 세상에 드러났을 뿐이다. 특히 이 사건은 99년 중앙대 K교수의 남자 제자 성추행 사건의 판박이나 다름없는데, 당시 피해자가 남성이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가해자의 무용계 위치나 영향력도, 피해자가 학생이었다는 것도 소름이 끼칠 만큼 닮았다. K교수는 3년간 대법원까지 가는 긴 법정 투쟁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후에도 국공립단체에서 제작하는 신작의 의뢰를 받으며 창작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고 그가 이끄는 개인무용단은 각종 지원금사업에 선정되어 국고보조금 지원을 받으며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2017년에는 한 협회를 통해 전통춤 이수자인 자신의 춤을 명작무로 지정받기도 했다. 무용계에서 피해자는 소리 없이 사라지지만 가해자는 영향력을 잃지 않은 채 동료로, 스승으로, 권위자로 여전히 남아 있다. 충격을 받고 참담함을 느껴야 하는 것은 가해자가 우리의 동료였다는 사실이 아니라 가해자를 우리의 동료로 받아들이고 가해자의 재기를 적극적으로 도와온 무용계의 풍토 그 자체다.
우리가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은 무용계뿐만 아니라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의 공통점은 가해자가 ‘갑’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성폭력이 일어난 집단이나 세계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보호하며 피해자를 입단속해 ‘집안 망신’을 피하려 한다. 망신의 시점을 가해가 저질러진 순간이 아니라 피해가 외부에 알려진 순간으로 잡는다. 그렇기에 문제가 된 개인을 솎아내어 그 집단의 윤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개인을 안고 감으로써 집단을 보호하려 한다. 집단의 보호가 우선이기에 그 선택이 집단의 윤리와 명예를 훼손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다. 이 ‘집안 망신’이라는 수치심의 감각이 작동하는 세계에 죄책감은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무용계에서 가해자를 축출하기는커녕 도리어 피해자를 외면하고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것은 가해자가 그가 저지른 범죄에도 불구하고 ‘갑’의 지위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해자가 ‘갑’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가해자를 동료 시민의 신체의 안전과 존엄을 훼손한 범죄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무용계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공로자로 인식해 가해자의 범죄를 업적에 딸려올 수 있는 필요악 정도로 여기는 통념 때문인데, 이는 무용계의 ‘몸의 식민화’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나에게 춤을 가르쳐주는 스승의 존재가 내 몸보다 우선시되는 동안 몸의 존엄이 훼손되는 데에는 무감각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엄이 훼손되고 식민화된 몸 위에서 독립적인 세계가 지어질 리는 만무하며, 식민화된 몸이 만들어내는 것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는 더더욱 없다. 스승의 존재감 아래 짓밟힌 몸의 존엄에 대해 숙고하고 몸의 주권을 회복할 방안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가해자는 언제든 다시 돌아와 식민화된 몸의 주인으로 군림할 것이며, 피해자는 또다시 이 세계 안에 식민지로 남느냐 이 세계를 떠나느냐를 두고 고민하다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가해자 곁에 서느냐 피해자 곁에 서느냐의 선택은 단순히 가해자나 피해자 간에 맺은 인간관계의 거리를 재는 눈치싸움이 아니라 몸의 주권 회복을 위한 영토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중 누가 법정에서 승리할 것인가는 매우 지엽적인 문제다. 싸움은 관건은 무용계가 한 번도 승리해본 적 없는 싸움의 역사를 어떻게 쓰기 시작할 것인가다.
글_ 윤단우(무용칼럼니스트, 댄스포스트코리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