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되기’가 있어서 들뢰즈나 가타리의 ‘~되기(becoming)’ 개념을 기대하고 이 글을 여신 분! 지금 바로 창을 닫고, 다음 글로 이동하시지요. 정초에 나가는 앞글에서 기표와 기의니, 영토화와 재영토화와 같은 머리 복잡한 개념을 논하고 싶지 않네요. 또 그럴만한 사유체계나 이데올로기 따위가 제 머릿속에 내장되어 있지 않군요.
연말에 무용생태계의 현실에 대해 나름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두 가지 문제로 천착되더군요. 첫째, 무용계 외부자들은 무용사회가 한결같고 발전이 없다고 비난한다. (이런 비난을 접할 때마다 무용계 내부자 입장에서 몹시 기분이 나쁘죠.) 둘째, 무용계 내부자들은 한결같이 무용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지만 회복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이런 무기력한 태도를 접할 때마다 울화통이 터지죠.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조언을 듣는데 또 그러네요. 내부자들의 속내를 들어보니 가만히 있는데엔 다 이유가 있더군요. 노력해보자고 말하는 순간에 외계인이 되어 버리고 무용계를 떠나거나 저처럼 사서 고생을 해야 한다네요.)
이런 문제들이 발생한 원인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근대 이후에 발생한 무용계의 흐름, 교육, 조직 등 무용계를 조성한 생태환경과 이 환경의 구조와 요소들이 떠오르더군요. 근원적인 구조와 요인들을 들추어내기엔 지면이 짧아 한 가지 요소만 짚어 보려고 합니다. 바로 무용가라는 존재입니다. 생태라는 것은 인간이 우주, 자연, 사회, 생물 등 삶의 환경과 관계 맺기를 하는 것이고, 관계 맺기를 하는 인간의 감각, 감성, 인지에 의해 생태환경이 작동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용생태의 중심에는 무용가라는 존재가 있고, 이들의 관계 맺기에 의해 생태계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아쉽게도 무용생태계에는 무용가와 무용조직 그리고 그 관계까지만 보입니다. 그 이상의 다른 생물, 다른 사회는 물론이고 자연과 우주는 ‘인터스텔라’ 수준으로 너무 먼 존재 같습니다. 또한, 자기 욕망이라는 감각은 선연하나 공감, 체감, 정의, 가치와 같은 보편적 감각과 감성은 희소하고 인지라는 의식은 희박합니다. 욕망으로 유지되는 사회라면 원시사회가 아닐까요? 맞습니다. 무용생태계의 비상식적인 작동방식을 보면 원시사회나 다름없습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 관계를 맺는 사람들,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의식이 없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활동을 하는 집단이니 발전성이 없다고 하대를 받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돈과 인맥으로 사회적 지위를 사고, 표절과 위조로 자신의 재능을 포장하고, 자신보다 약자들인 학생들과 후배들의 돈과 열정을 착취하니 건강하지 못한 집단으로 지탄을 받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교육체계가 정착되고 박사급 고학력이 넘쳐나는 시대이건만 무용생태계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오염된 무용생태계에서 숨쉬기 어려운 학생들이나 후배들은 포기와 절망을 일찌감치 내면화합니다. 일부는 무용계를 어차피 떠날 곳이라 여기므로 소리를 내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조용히 떠나줍니다. 남아 있는 자들은 스승과 선배들의 욕망을 모방하고 욕망을 실현하는 방법을 답습합니다.
제가 제목에서 사용했던 ‘~되기’는 무용가들의 욕망을 의미합니다. 무용가들의 욕망이 ‘~되기’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용가들이 표상하는 욕망의 모습이 교수되기, 감독되기, 학자되기, 평론가되기, 기획자되기, 유명인되기 등이니까요. 이러한 ‘되기’를 남보다 먼저 실현하기 위해서 실력과 공부보다는 금전과 권력을 내세우고, 앞서 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걸고, 남의 것을 훔치고 착취하는 것입니다. 만약 무용가들이 ‘~다움’을 생각한다면 무용생태계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움’은 욕망보다는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윤리와 실천 등을 포함한 가치를 우선하니까요. 교수다움, 감독다움, 학자다움, 평론가다움, 기획자다움, 유명인다움에는 통상적인 가치 기준이 있을 것이고, 이를 준수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직위와 상관없이 ‘무용가다움’을 지향한다면 우주, 자연, 사회를 자신의 몸의 자장으로 끌어들이고, 몸을 통해 자신 만의 에너지, 사유, 짓으로 표출시켜 우주로, 자연으로, 사회에 자신의 파장을 만들어 가야지요. 그래야 감동이 있고 변화가 따릅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체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의 이름과 그 아래에서 ‘자기다움’을 지키는 것입니다. 올해에는 개별 주체자로서의 무용가 여러분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많이 호명되길 바랍니다.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