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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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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증언록이 된 예술, 애도와 고발 이후

긴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봄에 설레지 않기란 어렵다. 겨울에도 사람들의 일상은 변함없이 유지되지만, 꽃이 피기 시작하는 자연의 봄과 겨울 동안 긴 휴지기에 들어갔다 속속 공연 소식을 알리며 공연장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게 하는 무용계의 봄은 매우 닮아 있다. 오랜 시간 무용계에서 봄의 의미는 공연 사이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무용인들 삶의 주기로서 존재했다.

 

지난 4월 서울에서는 김용걸댄스시어터의 <빛, 침묵 그리고…>가, 광주에서는 문병남 안무의 <오월바람>이 광주시립발레단 무용수들에 의해 각각 공연되었다. <빛, 침묵 그리고…>는 세월호 참사를, <오월바람>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그동안 무용계에서 사회적 이슈와 적극적으로 공명하는 작품을 만드는 데에는 인색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이 작품들의 등장은 매우 고무적이며, 두 작품이 발레라는 점은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한 장르 삼분법의 경계 안에서 사회적 고발은 현대무용이, 원념의 해소와 위로는 한국무용이 맡는 식의 장르별 창작 경향이 암묵적으로 존재하며, 발레는 클래식 문법을 충실히 수행하는 외에 이렇다 할 안무 담론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무용계 민주주의는 무용실 문 밖에서 멈춘다”라는 격언 아닌 격언은 무용계의 수직적 위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좁은 범위로는 무용실, 넓은 범위로는 무용계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무용계는 예술적이지 않은 태도로 간주해왔다. 이 같은 태도는 사회적 이슈를 작품 내부로 가져가는 데 있어 드높은 장벽이 되었는데, 예술가가 사회를 외면할수록, 예술밖에 모른다는 태도를 취할수록 진정성 있는 예술가로 인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한 작품들이 구체성을 잃고 삭막한 현대사회 속 인간의 소외라는 피상적 풍경을 빚어내는 이유이기도 한데, 창작자들 대부분이 당사자로서의 나를 지운 채 차가운 관찰자의 정체성으로 작품에 임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빛, 침묵 그리고…>와 <오월바람>은 안무가가 ‘무용실 밖에 엄존하고 있는 사회 속의 나’라는 자아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작품들이다.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작업에서 창작자들은 대개 방금 말한 것처럼 차가운 관찰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초월적 위치에 두기 마련인데, 김용걸은 세월호 사건을 또 하나의 국가폭력으로 규정하며 분노하는 시민으로, 문병남은 당시 조선대에 재학 중이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현대사적 비극의 목격자가 된 광주시민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위치성의 이면에 진득하게 깔려 있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차가운 관찰자가 되어 사건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다. 뜨거운 울분으로 가득 차 있는 두 작품이 ‘예술적’이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두 작품은 그 죄책감을 내려놓고자 함인지 결말에 이르러 섣부른 화해를 시도한다. <빛, 침묵 그리고…>는 90분으로 확장된 올해 공연에서 희생자들이 천국에서 환하게 웃음 짓는 새로운 결말을 선보이고, <오월바람>은 계엄군 대장이 희생자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것으로 극을 마무리한다. 비극의 원인을 고발하고 비극의 상흔을 애도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비극이 다 치유된 미래에 너무 빨리 도달해버린 것이다. 당사자성에서 출발한 진정성 있는 걸음이 정작 진짜 피해자들을 타자화하는 종착지에 도달한, 또 다른 비극이다.

 

지난 1월 세월호 참사 특별수사단은 기무사·국정원의 세월호 유가족 사찰 의혹, 법무부·청와대의 검찰·감사원 외압 의혹 등 참사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관련해 대부분 혐의 없음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해 유가족에게 또 다른 절망을 안겼고, 해경은 7주기 선상 추모식에 참사 당시 희생자 구조를 방관한 3009함을 배정해 유가족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그리고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5·18 당시 무장 헬기를 광주에 투입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이는 정찰용이었을 뿐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은 없다고 끝끝내 부인하고 있다.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조비오 신부를 “신부라는 말이 무색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해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광주지방법원에서는 아직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이 같은 현실과 무대 사이의 괴리는 우리에게 애도와 고발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안겨준다. 시간이 지나면 고발을 이끌어낸 분노는 가라앉고 애도하며 흘린 눈물은 말라버린다. 어쩌면 이러한 작품의 결말은 창작자들 스스로도 분노와 눈물의 유효기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데에서 비롯된 조급증의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떠올려야 할 것은 때로 기억은 어떤 행동보다 힘이 세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한 어떤 비극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행동에 앞서 해야 할 것은 기억하는 것이며, 기억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행동 역시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글_ 윤단우(댄스포스트코리아 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