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정도를 넘어선 듯한 차별적 어휘와 이에 대한 비판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다. 음지에 숨어 있던 소수자들이 인권을 찾기 위해 양지로 나오면서, 이들을 바라보는 주류(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과 소수자를 옹호하는 시각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장애인 문제나 성적소수자, 성평등, 인종차별, 심지어 연령과 세대를 구분 짓는 사이에서도 각을 세우는 논란이 있고, 각종 혐오표현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다양한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다.
무용계에서도 예외는 아닌 바, 가장 가까운 논란은 국립발레단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터졌다. 지난 6월 15일-20일, 제11회 대한민국발레축제의 개막작으로 무대에 오른 이 작품은 독일 안무가 존 크랑코의 1969년 작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은 2막 1장, 남자 주인공인 페트루키오가 결혼한 아내 카테리나를 길들이기 위해 밥을 굶기는 장면이다. 페트루키오의 하인들이 주인의 명령으로 카테리나를 괴롭히는데 이들이 뇌성마비나 뇌병변 환자 등의 장애인 흉내를 내면서 희화화한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 희극에도 없던 장면이 발레 작품에 들어간 것인데 그간 해외에서도 한 차례 비판이 있었을 뿐(2016년 영국 버밍엄 로열발레단의 공연 리뷰) 지금껏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5월, 발달장애 아이를 둔 한 어머니가 공공기관인 국립발레단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고 장애인 단체들과 언론에 제보를 하며 수면 위로 오르게 되었다.
국립발레단은 적극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며 저작권을 가진 존 크랑코 재단에 안무 변경 문의를 하였고 허가를 받아 수정을 하였다. 국립발레단 측은 “창작자가 여성혐오나 장애인 비하를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시대적 흐름을 감안했다. 재단도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논란이 있다면 안무를 수정하며 노력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무용계 안팎에서는 시대에 따라 고전도 재해석되어야 하며 창작 당시에는 용인되었더라도 이제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입장과 예술의 자유와 창작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시각으로 대립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여기서 짚고 가야 할 지점은 이 논란의 이면이다. 이번에 이슈화된 장애인 희화화 장면은 2015년 이 작품이 국립발레단의 레퍼토리가 되었을 때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인권위 진정이 제기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심지어 언론에서도 이 점을 인지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놀랍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말이다. 고전 중에서도 특히나 불편함과 논란을 몰고 다니는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무대에 올리면서 그 누구도 비판적 사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게다가 이 작품 자체의 가장 큰 문제이자 논란거리는 여성 비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 보도는 이번 장애인 이슈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부분을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다. 심지어 2016년 한 언론에서는 <말광량이 길들이기>가 여성을 가학적으로 다루는 내용이 있어 현대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면서도 발레에서는 희곡의 불편한 대사가 없이 움직임으로만 표현하기 때문에 코미디로서의 재미가 극대화되었다고 오히려 긍정적 평가를 하였다. 인기가 있다는 이유로 아무런 문제의식과 재고 없이 무대에 올리고 그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지난 2020년,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떠들썩했던 한 인종차별 이슈가 있었다.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이 졸업을 기념하며 가나의 장례식 댄스(소위 관짝소년단)를 코스프레했던 것을 유명 방송인인 샘 오취리가 공개적으로 비판한 일이었다. 가나 출신인 그는 이 학생들이 얼굴을 검게 분장한 것을 블랙페이스(Blackface)라 지적하며 인종차별에 둔감한 한국사회에 불쾌감을 표했다. 이 사건은 이후, 학생들의 초상권 침해, 샘 오취리 자신의 동양인 희화화, 여성 비하 발언 등으로 곁가지를 치며 무수한 논란과 비판을 양산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보자면 여전히 우리 사회는 다문화와 다양성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대해 포용성과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인종차별이 아니라는 의견 중 상당수는 “코스프레 대상이 흑인이어서 검게 칠했을 뿐, 희화화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었다”라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무척이나 중립적인 가치판단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으로 백인 캐릭터를 코스프레할 때 어느 누구도 얼굴에 흰 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불성설임을 깨달을 수 있다. 오히려 우리 사회가 차별에 대해 둔감하다는 것을 드러낼 뿐이다.
<호두까기 인형> 1막 무어인의 춤과 2막 중국 인형의 춤, 그리고 <라 바야데르>의 무어인 어린이들의 춤이 어떻게 연출되는지를 생각해 보자. 서구 유럽 백인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발레에서 무어인은 무조건 얼굴에 검은 칠을 했고 우락부락한 몸짓으로 나타났으며, 중국으로 대표되는 아시아인은 노란 칠에 우스꽝스러운 긴 수염, 찢어진 눈, 젓가락을 나타내는 검지 등으로 표현되었다. 폴란드, 헝가리, 스페인,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의 캐릭터 댄스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한 묘사와 달리 무어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등은 대충 뭉뚱그려 희화화되어 왔다. 사실 100년이 넘도록 우리는 이에 대해 별다른 반감이 없었다. 발레를 대하는 우리의 시각이 주류의 서구 중심 사고 체계에 매몰되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근래 들어 많은 발레단과 무용수들이 차별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서 위의 장면들을 수정하고 있으며, 파리오페라발레단은 2021년 ‘다양성’을 중심 가치로 내걸고 개혁의 시동을 걸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보수적 비평가나 예술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례로 러시아의 볼쇼이발레단은 흑인 분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흑인 수석무용수 미스티 코플랜드는 SNS에 볼쇼이의 <라 바야데르> 무어인 분장 사진을 게시하며 버젓이 차별이 행해지는 현장을 고발하였으나 볼쇼이의 프린시펄 스베틀라나 자하로바는 “이는 그저 예술일 뿐, 흑인 분장은 이상하지 않다”라며 맞받아쳤다.
자하로바의 저 대사는 낯설지 않다. “흑인을 흑인으로 표현하는 것이 뭐가 나빠?” 는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보여준 것이 뭐가 나빠?” “고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뭐가 문제야?”와 같은 맥락이다. 중립적인 예술 표현을 주장하는 듯하지만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차별적 사고가 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해서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못한다.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이 이슈들에 좀 더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 고전을 창작했던 당시에는 문제의식이 덜하였고 민감하지 않았던 부분일지라도 현대적 시각으로 불편하다면 그에 대한 비판을 할 수 있다. 예술이란 당대의 수용자들에게 동시대의 가치로써 해석되고 수용되기에 작품의 의미가 더 풍부하고 깊어지는 것이다. 고전이 고전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고, 지금의 이런 논의가 그 가치마저 폄하시키지는 않는다. 더욱이 공연예술은 문학처럼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원전의 재현이란 불가능하며 오히려 시대와 공간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유연함이 특징이다. 그러하기에 ‘원작 고수’ ‘고전 보존’ ‘역사적 의미’ 등을 이유로 비판에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은 어떤 면으로는 게으른 자의 면피성 구실로 보인다.
모든 종류의 차별과 배제, 혐오 표현을 지양하자는 의미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은 그것이 도덕적, 윤리적 가치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순수하게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예술표현과 충돌하는 지점이 있다. ‘정치적 올바름’이 예술계에 과도하게 관여할 경우 예술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즉 예술이 ‘정치적 올바름’을 의식하여 무리한 자기 검열에 빠지면 온전한 예술표현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우려이다. 그럼에도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미적 정신의 표출임과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시대의 가치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작품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필자 역시 ‘정치적 올바름’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예술표현의 자유가 침해되는 경우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자유에 약자를 조롱하고 차별하며 배제시킬 권리는 없다. 언제나 그렇듯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바, 예술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만큼 그것에 대한 비판 역시 수용하고 감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창작자의 예술 정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확고하다면 그것을 당당하게 표출하면 된다. 그리고 어느 시각으로든 수용자의 해석과 비평에 충실히 응답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가 해야 할 논의는 예술에서 무엇이 맞고 틀리다는 싸움이 아니다. 여기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다만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대두되는 문제들과 그로 인한 변화에 민감해질 필요는 있는 것이다. 비판을 수용할 자세와 포용성을 가지고 여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소통하는 건강한 논의의 장이 필요하다.
글_ 이희나(댄스포스트코리아 편집주간)
[참고자료]
경향신문 2021년 2월 11일자, 「‘파리오페라발레단’에 흑인 무용수를…유럽 무용계에 불어오는 인종평등 바람」
국민일보 2016년 6월 22일자,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여성 관객에겐 불편하다?」
국민일보 2021년 5월 20일자, 「발레 ‘말괄량이 길들이기’ 장애인 희화화 논란… 안무 바뀔까」
데일리안 2021년 6월 18일자, 「“차별·희화화 멈춰 달라”…문화계에 요구되는 인권 감수성」
모바일한경 2016년 4월 4일자, 「‘인종차별적 분장’에 대한 국립발레단의 석연찮은 해명」
오마이뉴스 2021년 5월 20일자, 「“장애인을 웃음거리로…” 국립발레단 안무 6년 만에 바꿔」
연합뉴스 2020년 10월 18일자, 「“제발 얼굴에 까만 분장만은…” 발레계에 무슨 일이」
연합뉴스 2021년 5월 30일자,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전 공연 수정 놓고 갑론을박」
중앙일보 2019년 12월 14일자, 「인종차별 맞선 발레리나 용기···‘호두까기 인형’ 안무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