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에서 유통된 최초의 비문자 대중매체는 바로 사진엽서(Photographic Postcards)였다. 사진엽서는 1874년 만국우편연합(Universal Postal Union, UPU)이 설립되어 세계 단위의 국제우편 교류가 활성화되고 국제우편에서의 엽서 활용도가 증가하면서 처음 나타났다. 이후 1880년대와 90년대에 석판인쇄(Lithography)와 우드베리타이프(Woodburytype), 옵셋인쇄(Offset printing) 등 사진과 그림을 고화질로 대량 인쇄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하면서 더욱 제작이 보편화되었다가, 1903년 미국의 이스트먼 코닥(Eastman Kodak)사가 고안한 No.3 카메라와 엽서 인화기술1)의 도입과 함께 전세계적으로 막대한 양이 대량으로 제작되기 시작했고, 191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세계의 누구든 이러한 사진엽서를 통해 값싸게 세계 각국의 풍속과 풍물, 그리고 명소들의 모습을 손쉽게 구해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사진엽서의 제작이 본격화된 것은 대한제국 정부가 만국우편연합에 정식으로 가입한 1900년을 전후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들 사진엽서의 저본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것은 1880년대부터 서울과 부산, 원산, 인천 등의 개항장(開港場)에 들어와 정착해 조선의 다양한 풍속과 풍물을 사진으로 촬영해왔던 일본인 및 서양인 사진사들의 원판 사진들이었다. 이들 사진들은 이미 인화본 및 석판인쇄본, 그리고 담배갑 포장지에 들어가는 연초사진(煙草寫眞)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어 판매, 유통되고 있었지만, 사진엽서의 등장과 함께 더더욱 대량으로 유통, 보급되었다.
이렇게 제작된 사진엽서들 가운데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가장 많이 제작되었던 것은 바로 기생(妓生)의 사진엽서들이었다. 국내외에서 수집된 수많은 근대기 한국 사진엽서 컬렉션에서 기생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들이 단일 종류로서는 가장 큰 비중과 분량을 차지하는 것2)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기생이라는 여성 집단이 지니고 있는 ‘피사체로서의 매력’, 즉 이국적이고 섹슈얼한 관심의 대상이라는 속성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했겠지만, 한편으로는 이들 기생이 영어로 ‘Dancing Girl’로 자주 번역되어 소개되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이 인간의 풍속과 관습 가운데 가장 원초적이고 특성이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무용을 선보이는 집단이었다는 사실 역시 이러한 인기와 관심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제작되었던 한국 관련 사진엽서들의 제작 주체나 제작 과정, 그리고 구체적인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연구와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미지의 영역으로 남은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이 시기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시기였던 만큼 하나의 사진이 판형과 제작사를 거듭하며 수십 년 동안에 걸쳐 꾸준히 재발행, 재사용되었던 흔적 역시 드러나기 때문에 이들 엽서에 담긴 기생들의 모습을 역사적인 맥락에서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사진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이 지면을 빌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 아래 엽서들은 전부 필자의 개인 컬렉션에서 선정하였다.
[사진 1] <관기(官妓)의 성장(盛裝)>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사진엽서.
엽서 자체는 1910년대 초중반 무렵 일제강점기 최대의 조선 사진엽서 제작소였던 경성 본정 2정목의 히노데상행(日之出商行)에서 발행한 것이다. 히노데상행을 설립한 시이키 우노스케(椎木宇之助. 1871-1925)는 1904년에 서울로 건너와 엽서와 달력, 그 밖의 각종 사진인쇄물을 제작, 판매하기 시작했으며 훗날에는 경성 내 대표적인 일본인 영화관이었던 경성극장의 운영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 엽서에 담긴 사진은 엽서의 실제 제작 시기보다는 몇 년 전에 촬영된 것으로, 대한제국 시대인 1902년 12월에 처음 설립되었던 협률사(協律社)에 소속되어 있던 관기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궁내부 소속 협률사(宮內府 所屬 協律社)”라는 글씨가 쓰여 있는 종이와 함께 대형 태극기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이 이채롭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사진의 원본은 1905-6년경 협률사의 공연이 다시 진행되던 시기에 촬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 2]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 5주년 기념 물산공진회를 맞아 경성 광교기생조합(廣橋妓生組合)과 경성협찬회(京城協贊會)가 발행하여 공진회 내 연예관에서 연무기념(演舞紀念)으로 판매한 기생 사진엽서.
뒷면 하단에는 이 엽서가 히노데상행의 의뢰로 도쿄 칸다(神田)의 만세이바시(萬世橋)에 있었던 도안인쇄사(圖按印刷社)에서 인쇄하여 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로서는 매우 고급인 칼라 석판인쇄 기술을 활용해 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가운데 그 발행주체와 제작연도가 정확한 흔치 않은 유물이자, 1910년대 초 설립되어 활동하기 시작한 기생조합(훗날의 권번)들이 전근대의 재래 무용과 연희를 근대적 무대 연흥으로 전환시키던 시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사진 3] 1926년 이후 경성 히노데상점이 발행한 ‘명월관어회엽서(明月館御繪葉書)’ 세트 엽서 가운데 한 장인 <경성 명월관 특1호 무대>.
일제강점기의 가장 유명한 요릿집 중 하나였던 경성 종로 돈의동의 명월관에 있던 두 개의 특실 가운데 좀 더 큰 쪽이었던 특1호 객실에 설치되어 있던 무대에서 펼쳐진 조선무용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재래무용들이 조선무용이라는 이름으로 무대화되어 극장의 상설무대나 명월관 등 대형 요릿집의 특설무대 등에서 공연되었으며, 이때 활동한 이들은 대부분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이었다. 명월관 특1호실 무대에는 경주 불국사를 그린 배경막이, 특2호실 무대에는 평양성과 을밀대를 그린 배경막이 걸려 있었는데, 혹자는 이를 명월관에서 공연하던 기생들의 가무 전통이 남도와 경서도로 구분되었던 흔적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사진 4] 1930년대 초 평양 도고사진관(東鄕寫眞館)에서 제작, 판매한 <가극의 새로운 면을 개척하는 모던한 기생(歌劇に新生面を拓くモダンな妓生)> 사진엽서(부분).
평양기생학교 참관 기념으로 판매된 ‘기생의 생활과 기생학교(妓生の生活 及 妓生學校)’ 8매 세트 엽서의 한 장이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기생들은 단순한 재래예술 뿐만 아니라 서구와 일본에서 도입된 다양한 근대예술을 선보였고, 이는 무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1920년대 말–1930년대 초에 서양에서 제작된 다양한 초기 발성영화(토키; Talkie)에 자주 등장한 레뷰(Revue) 식의 공연을 참조한 공연이 많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 나타난 가극의 리더격인 남장 여성은 1930년대 초 조선에 수입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게리 쿠퍼(Gary Cooper) 주연의 영화 <모로코(Morocco)>의 영향을 받은 의상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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