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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3) 사진으로 기록된 재래 민속무용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20세기 초 한국에서 사진엽서가 제작되어 유통되었을 당시 한국 무용과 관련된 내용은 대부분 기생과 그 기예와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사진엽서에 등장하는 무용들의 장르 역시 상당히 한정되어 있어 많은 아쉬움을 낳는다. 즉 이들 사진에 등장하는 무용 장르는 이미 1910년대 이후 기생들과 그 주변의 전승 집단에 의해 무대화, 실내화 과정을 거친 무용들, 즉 춘앵전 등 옛 정재 계열의 춤들이나 사고무(四鼓舞), 다양한 종류의 검무(劍舞), 그리고 승무(僧舞) 등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사진엽서 자료만을 가지고 일제강점기나 혹은 그 이전 시기에 민간에서 전승되었던 소위 민속무용 혹은 재래무용의 진면모를 알아보기에는 많은 한계가 존재하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사진엽서를 통해 기록으로 남은 재래 한국의 무용에 기생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많은 한계를 내포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에 주로 일본인 사진사들이 기록한 민속 무용 및 연희 가운데에는 특기할 만한 것들이 있다. 우선 가장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20세기 초까지도 서울과 그 주변 지역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던 이른바 사당패들의 공연 모습을 기록한 것들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당패는 조선 중기부터 문헌 기록에 등장하여 본래는 불교 사찰과 관련을 맺고 연희를 베풀던 집단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유랑집단의 성격을 띄고 여러 가지 가무희와 더불어 매음(賣淫)을 업으로 하였던 연흥 집단이다. 『황성신문』이나 『제국신문』 등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 이들은 20세기에 이르러 협률사 공연의 일원으로도 참가하기도 하는 등 꾸준히 민간의 인기를 끌었으나, 이후 풍기문란의 주범으로 지목되며 계속되는 사회적 멸시와 당대 식자들 및 관의 비판을 받아 급속히 쇠퇴하여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거의 대부분이 소멸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사당패가 본격적으로 소멸의 길을 걷기 전인 20세기 초에 제작되었던 사진엽서 및 인쇄사진 자료 가운데에는 이러한 사당패들의 공연 모습을 기록한 사진 몇 장이 전해진다. 현재 이들 사진의 전체적인 규모나, 구체적인 촬영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문헌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현존하는 사당패 관련의 기록으로 문헌 기록은 물론이고 시각 자료 역시 조선 말기의 탱화 등에 그려진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한 상황 속에서 이들 사진자료는 적지 않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별도로 초기의 사진엽서에 기록된 귀중한 재래무용의 또 다른 장르는 바로 무당(무녀)들에 의해 전승되어 내려오던 이른바 무당춤(굿춤)이다. 혹자는 물론 무당춤은 무당이 지내는 종교의식의 일부인 만큼 엄밀한 의미에서의 ‘무용’으로 보기에는 다소 어렵지 않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바가 있지만, 이 역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재래 한국무용의 한 갈래로 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다고 본다. 20세기 초의 사진엽서에 담긴 재래 무당춤들은 무당들이 실제로 굿을 하던 굿당(신당)이나 굿판 현장에서 실제로 촬영된 경우가 많은데, 연구자들에 의한 재래 무속의식의 본격적인 시각매체 기록이 1970년대에나 겨우 제대로 시작된 것을 감안할 때 이들 사진들은 역시 상당한 민속학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앞서 기생 사진엽서들에 대해 살펴보면서 짧게 언급했다시피, 사진엽서에 담긴 사진들은 대부분 외국인 (주로 일본인) 상업 사진사들에 의해 촬영되었을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이국적인 것’에 대한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재맥락화를 거쳐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따라서 이들 사진이 담고 있는 피사체에 대한 시선을 항상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때 이들 사진의 역사적, 민속학적, 자료적 가치가 더욱 증대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 아래 소개하는 엽서들은 필자의 개인 컬렉션에서 선정하였으나, [사진 4]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송석하 사진자료의 하나이다. 

 

 

 

[사진 1] <견승곡보(肩乘曲步)> (혹은 판본에 따라서는 <견승곡무(肩乘曲舞)>)라는 제목을 단 조선풍속엽서 속 사당패 무리의 모습. 사진엽서 자체는 1910년대 후반에서 1920년대 초에 경성 히노데상행에서 제작한 것이나, 이 사진과 동일한 사진 판형이 1911년에 경성 일한서방(日韓書房)에서 발행된 <조선풍속풍경사진첩(朝鮮風俗風景寫眞帖)> (개정판)에 수록되어 있어 적어도 1911년 이전에 촬영된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 <조선의 곡무(朝鮮の曲舞)>라는 제목을 단 (남)사당패의 모습을 담은 사진. 1910년대 중반에서 1920년대 초반에 일본 도쿄의 쇼세이도(松聲堂)에서 발행한 사진엽서이나 사진 자체는 1910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곡무’는 일본에서 무로마치 시대 이후 유행하여 이후 일본 서민 무곡의 하나로 정착한 쿠세마이(久世舞로도 씀)를 의식한 것으로 보이는데, 쿠세마이와 사당패의 공연이 둘 다 북 장단에 맞추어 부채춤을 추는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그 속성이 유사하게 보였던 듯 하다. 나이 든 남사당패 패거리들이 이 말 그대로 ‘무동 태우기’를 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3] <풍년춤(豊年踊り)>이라는 제목의 사당패 사진. 1920년대 초 경성 히노데상행이 제작한 사진엽서이며, [사진 1]과 마찬가지로 이것과 동일한 사진 판형이 1911년에 경성 일한서방(日韓書房)에서 발행된 <조선풍속풍경사진첩(朝鮮風俗風景寫眞帖)>(개정판)에 수록되어 있어 적어도 1911년 이전에 촬영된 사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4]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남 송석하(宋錫夏. 1904-1948) 소장 자료사진 중 하나인 <남사당>. 1935년에 촬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사당과 남사당을 막론하고 사당패의 명맥이 거의 끊어져가던 시점에 촬영된 사진이라는 점에서 기록적 가치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사진의 촬영자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일본인 상업사진사였던 무라카미 텐코(村上天紅, 1887 – 1958)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사진의 하단부에는 무라카미가 사진 원판에 기록한 글씨로 “俗45, 豊年踊り”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1930년대까지도 조선 풍속의 상업적 사진촬영과 그 유통이 활발했음은 물론 학술의 영역에까지 활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 5] <무녀의 기도무(巫女の祈禱舞)>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사진엽서. 1920년대 초반에 경성 히노데상행에서 발행되었다. 

 


 

[사진 6] <무녀(巫女)>라는 제목의 사진엽서. 무녀라는 한자 표기 위에 가타카나로 “무당”을 별도로 표기하였다. 1930년대 중반에 역시 경성 히노데상행에서 발행되었다. 사진에 붙어있는 설명에서는 미신이 뿌리 깊은 조선에서 무녀와 맹인들이 귀신을 위안하기 위해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리며 무용을 한다는 등으로 철저히 타자의 시각에서 미개인의 풍습을 바라보는 듯한 서술을 취하고 있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신당은 조선 후기 이래 무속의 주요한 성지 중 하나였던 경기도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있었던 최영장군사(崔塋將軍祠)의 내부로, 최영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아들들을 묘사한 소상(塑像)과 무신도 등을 볼 수 있다.    

 

 

 

글, 사진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