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포스트코리아
지난자료보기

로고

무용칼럼

리콜렉션

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4) ‘최초’의 근대무용가, 배구자의 삶을 찾아서 (1)

‘한국 최초의 근대 무용가’는 과연 누구일까? ‘최초’라는 레테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은 차치하더라도, 본격적인 전문 무용연습 및 교습을 진행한1) 전문 무용가를 ‘근대 무용가’라고 본다면, 1929년 6월 신당리 문화촌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용연구소를 차린 배구자(裵龜子, 1905–2003)를 한국 최초의 근대 무용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배구자의 초기 인생은 그동안 수많은 억측과 온갖 풍문 등으로 인해 그 정확한 사실이 제대로 알려진 바 없었고, 이미 두 차례의 체계적인 선행연구2)를 통해 그녀의 일생과 관련된 상당 부분의 사실관계가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그 내용이 자세히 알려진 바 없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선행연구들에서 밝혀진 사실들과, 필자가 별도로 조사한 한말 이후 일제강점기 초기의 신문자료 등을 통해 배구자의 일생, 특히 그의 출생과 가족관계 등에 대한 간략한 정리를 시도해 보고자 한다. 

 

배구자는 1905년 6월 경3)대한제국 시기에 경시청 경무관과 중추원 의관 등을 지냈던 배석태(裵錫泰, 1867–1947)4)의 맏딸로 태어났으며, 초명(본명)은 배구이(裵龜伊)5)였다. 배석태의 여동생, 즉 배구자의 고모는 그 악명 높은 ‘요화’ 배정자(裵貞子, 1868–1952)였고, 배석태의 형, 즉 배구자의 삼촌은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배국태(裵國泰, 1861?-1910)6)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배정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정치적 음모에 말려들어 일찍 참살된 뒤 고아로 지내다가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이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모두 배정자 자신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근거 없는 허구7)에 가까우며, 실제로 이들 일가는 대한제국기에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던 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배구자는 7형제 중 장녀로, 그 아래에는 배학자(裵鶴子), 배송자(裵松子), 배숙자(裵淑子), 배용자(裵龍子)라는 4명의 여동생과 배상룡(裵相龍), 배상근(裵相根)이라는 2명의 남동생8)이 있었다. 이 가운데 1922년에 태어난 배구자의 늦둥이 여동생9)인 배용자(裵龍子)는 일제강점기에는 배한라(裵漢拏)라는 예명으로 언니 배구자와 함께 활동하였고, 훗날 하와이로 건너가 한라 함(Halla Pai Huhm)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재미 한국무용가로 이름을 남겼다.

 

배구자가 최초로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1918년 5월, 당시 그녀가 단원으로 있었던 일본의 마술 버라이어티 쇼 단체였던 덴카츠일좌(天勝一座)의 세 번째 조선 순회공연 때였다. 당시 『매일신보』 (1918.5.14.)는 다음과 같이 배구자의 등장을 보도하였다.

 

긔술로 유명한 텬승「天勝」의 일행은 요사이 부산에서 그곳 황금관「黃金館」에셔 개연즁인대 이번에난 평화의 녀신「平和의 女神」이라난 것을 개연하기 위하야 의엽분 녀자좌원들을 이왕 보다 갑졀이나 만히 다리고 왓더라. 그 즁에난 이왕 경성 왓슬때에 다리고 간 배구자「裵龜子」도 갓치 왓난대 배구자라 함은 괴미인으로 유명한 배뎡자「裵貞子」의 친뎡 족하딸이며 그 부친은 경성 내자동「內資洞」 사난 배석태「裵錫泰」 씨인대 이 아해는 그 고모 뎡자를 달머셔 외양도 입부고 셩질도 민쳡하더라. 재작년에 텬승의 일행이 경셩왓슬때에 당년 열한살된 계집아해가 텬승의 머물너잇난 산본려관을 가셔 뎨자되기를 간쳥하난고로 텬승도 그 용긔를 긔특히 녁여 구자 부친과 의론한 결과 그 일좌에 들게 하얏더라. 그 뒤로 삼년동안 공부랄 식여셔 지금은 재죠도 한두가지 배운고로 됴션에 나와 쳣 무대를 치르게 할터이라난대 배구쟈는 이왕 경성에셔 보통학교를 단여 일본말을 하던데다가 일본가서 닥긴 결과로 지금은 아조 동경셔 생댱한 일본아희나 다를것 업다하며 이번에난 텬승이 아조 수양녀로 삼을터이라더라.

 

이 기사를 통해 배구자가 11살 되던 1916년 9월 경성에서 두 번째로 공연을 했던10) 일본의 여자 마술사 쇼쿄쿠사이 덴카츠(松旭齋 天勝, 1886-1944)의 공연을 본 뒤 자신도 그 단원이 되고 싶다고 간청했고, 이에 덴카츠가 배석태와 상의하여 배구자를 제자로 거둬들였다는 것이다. 불과 11살이었던 어린 아이의 소원을, 아직도 여성의 사회적 활동은커녕 대중 무대에서의 공연이라는 것 역시 상상하기 힘들었던 1910년대 조선에서 이렇게 쉽사리 들어주었다는 것이 선뜻 믿기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렇게 해서 배구자는 처음으로 조선 사회에 처음으로 그 존재를 알렸다.

 

배구자가 참여했던 <평화의 여​신>이라는 공연은 당시 황금관에서 열린 덴카츠일좌 공연의 제 3막 순서11)로, 제목과 그 공연 시기, 그리고 대략적으로 기록된 내용을 볼 때 당시까지도 계속되고 있던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시사적 성격을 가진 버라이어티 쇼 공연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배구자는 공연의 첫 부분 오프닝 부분과, 깃발을 들고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천사 배역을 맡았다. 당시 『매일신보』는 “나비인가 꽃인가 선녀인가”라며 배구자의 미모를 칭찬하면서, 조선인들이 배우를 천하게 여기는 것은 구습의 산물인만큼 “신식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으며 기술을 배우고 음악과 무도를 공부하여 고상우미(高尙優美)한 기예로 우리 사람의 정신을 유쾌하게” 하는 배구자와 같은 신식 여배우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거두어줄 것을 주장12)하기도 했다.

 

배구자는 이후로도 덴카츠일좌의 단원으로 1921년에도 다시 조선을 찾았으며, 1924년 1월부터 1925년 4월까지 미국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뉴욕 등에서 열린 덴카츠일좌의 미국 순회공연에도 참가13)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배구자는 덴카츠와 불화를 겪게 되었는데, 당시의 언론 보도에서는 그 이유로 덴카츠 남성단원과의 염문설, 고모 배정자의 꼬드김, 수익금 분배 문제 등등 여러 억측이 나왔으나 현재로서는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배구자는 덴카츠일좌의 다섯 번째 조선 순회공연이 이루어지고 있던 1926년 6월 4일 밤 평양에서 덴카츠일좌 일행이 묵던 숙소를 빠져나와 훗날 그의 첫 번째 남편이 되는 홍순언(洪淳彦)의 도움을 받아 경성으로 향했다. 배구자의 덴카츠일좌 탈퇴 사건은 당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 당시의 거의 모든 신문들이 일제히 이를 보도하였다. 배구자는 한동안 고모 배정자의 성북동 집에서 머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모의 집에서 나와 그해 연말 무렵 아버지 배석태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을 데리고 숭사동(崇四洞) 17번지의 집14)에 정착했다. 

 

덴카츠일좌를 탈퇴한 이후 배구자는 한동안 “값있고 뜻있는” 가정생활에 전념할 것을 밝히며 마술공연은 물론이고 연예계 생활을 완전히 청산할 뜻을 밝혔지만15), 이미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조선 전역에 연예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탓에 그녀의 이러한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평양에서 덴카츠일좌를 탈퇴해 경성으로 온 지 고작 12일 만이던 1926년 6월 18일에 근화여학교 후원회의 간청을 받고 시내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근화여학교 후원 납량음악회에 출연한 것16)만 보아도 그녀의 당시 인기를 짐작하게 한다. 그 후로도 배구자는 연예계를 떠나고자 하는 의사를 계속 내비쳤으며, 1927년에는 거의 아무런 대외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조용한 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28년 4월, 배구자는 돌연 “미국으로 무대예술을 연구”하러 떠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이 당시 실제로 얼마나 구체적인 계획이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언론의 표현대로 “평소에 그를 딱 한번이라도 무대로 끌어내려고 하던” 수많은 애호가들은 이 기회를 틈타 배구자를 다시 무대에 세우고자 했다. 특히 악보 전문 출판사였던 백장미사(白薔薇社)의 대표였던 이철(李哲)이 한 달 가까이 다시 무대에 서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이에 배구자는 1928년 4월 21일 장곡천정 경성공회당에서 “눈물 흘려가며 배운 재주를 그대로 썩히는 것도 아깝다는 생각”17)에 다시 한 번 무대에 서게 되었다. 이렇게 서게 된 무대는 배구자를 “마술소녀”에서 “무용가”로 새롭게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사진 1] 『매일신보』 1918년 5월 14일자 기사에 실린 배구자의 사진. 배구자의 사진으로는 가장 처음으로 공개된 사진이다.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 배구자가 덴카츠일좌에 들어간 11세(1916년) 무렵의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 2] 『매일신보』 1918년 5월 25일자 기사에 실린 경성 황금관에서의 덴카츠일좌의 <평화의 여신> 공연 모습. 단장인 쇼코츠사이 덴카츠가 타이틀 롤을 맡고 있으며, 배구자는 그 오른편에서 날개를 달고 공중에 떠 있는 천사 배역을 맡았다. 

 

 


 

[사진 3] 『매일신보』 1918년 5월 30일자 기사에 실린 배구자의 마술 공연 모습. 손바닥 안에서 “매일신보” 글씨가 쓰인 깃발들을 꺼내어 펼쳐 흔드는 묘기를 보여준 직후의 모습이다.

 

 


 

[사진 4] 1926년 평양에서 덴카츠일좌를 탈퇴하기 직전의 배구자의 모습. 『매일신보』 1926년 6월 7일자에 수록된 사진이다.

 

 

 




 

[사진 5] 1928년 경성공회당에서 복귀 무대에 서기 직전의 배구자의 모습. 『동아일보』 1928년 4월 17일자에 수록된 사진이다.

 

 


 

[사진 6] 1905년 일본의 사진출판사 하쿠분칸(博文館)에서 출간한 『한국사진첩』에 실린 배구자의 고모 배정자(오른쪽)의 사진. 사진 설명에는 “두 명의 귀부인 중 우측에 서 있는 사람이 한국 제 1등의 여류 교제가로 일컬어지는 현영운 씨의 부인이다”라고 쓰여 있다. 

 

 

1) 물론 엄밀히 따져서 한국 최초의 무용 전문교습기관은 1925년 9월에 김영환, 이병삼 등이 세운 구미무도학관(歐美舞蹈學館)이겠으나,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면 이는 전문 무용인의 참여가 없이 서양식 사교댄스의 기본과 간략한 무대무용 이론을 가르쳤던 곳으로 보여 많은 한계를 보인다고 하겠다.  

2) 이대범, 「배구자 연구 - 배구자악극단의 악극 활동을 중심으로」, 『어문연구』 (36:1),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08; 송하연, 「식민지 조선의 저널리즘과 여성의 타자화 - 무용가 배구자 · 배용자 자매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화사학연구』 63,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 2021.

3) 배구자의 첫 남편 홍순언과 인척 관계로 훗날 이들과 함께 동양극장의 경영에도 참여했던 소설가 및 극작가 최독견(崔獨鵑, 1901-1970)은 1964년 11월부터 1965년 7월까지 배구자와 홍순언,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담은 소설 형식의 회고담 「낭만시대(浪漫時代)」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는데, 이에 따르면 배구자가 덴카츠단을 뛰쳐나온 시점은 자신의 21살 생일 전후였다고 한다. 배구자가 덴카츠단을 탈출한 것이 1926년 6월이었던 사실과, 그 밖의 다른 자료들을 참고해볼 때 배구자의 생년월은 대략 1905년 6월경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4)『민중일보』 (1947.6.3.) 부고기사 참조.

5)『朝鮮總督府 官報』 제3220호 (1937.10.7.) 「商業及法人登記」 항목과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1939년판, 1941년판, 1942년판)에 이 이름으로 합명회사 동양극장의 ‘社員’으로 등재되어 있다. 

6)『皇城新聞』 (1910.8.11.) 부고기사 참조.

7) 가령 배정자의 양부 역할을 했던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아니라, 1876년 개항 직후 부산에 건너와 오랫동안 아사히구미(朝日組)라는 무역상을 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한 재조일본인 사업가 마츠오 겐노스케(松尾元之助)라는 인물이었다. 이는 「婚禮特奇」, 『大韓每日申報』 (1907.12.19.) 참조. 먼 훗날 배구자가 말년에 자신이 일본 메이지 천황과 조선의 모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숨겨진 딸이라는 말을 거침없이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일가에서는 대를 이어 계속해서 자신의 집안이나 인생사를 과장해온 것 같아 다소 씁쓸한 데가 있다.

8) 송하연, 앞의 논문, 2021, p.262. 및 『민중일보』 (1947.6.3.) 부고기사 참조. 

9) 배한라와 배구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배한라 자신이 계속해서 엇갈리는 진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의 나이 차이 때문에 구구한 억측이 있어왔으나, 송하연이 발굴한 1948년 6월 15일 배한라와 한국계 미국인인 주한미군 사병 존 함(함동운; John Dong Un Huhm)의 혼인보고서(Report of Marriage) 및 가족관계 보고를 통해 배구자의 동생임이 입증되었다. 송하연, 앞의 논문, 2021, pp.275-278. 참조. 

10) 덴카츠의 첫 조선 공연은 1915년 10월 경복궁에서 열렸던 시정5주년조선물산공진회 연예관 특설무대에서였으며, 당시의 공연은 오스카 와일드 원작의 연극 「살로메」를 마술 묘기를 곁들여 각색한 것이었다. 「天勝孃의 出演: 10日부터 演藝館」, 『매일신보』 (1915.10.10.); 「「싸로메」는 何오: 天勝의 出演하는 「싸로메」 演劇大綱」, 『매일신보』 (1915.10.13.)

11)「奇術의 알 裵龜子」, 『매일신보』 (1918.5.25.) 

12) 위의 기사 참조.

13) 일본 나고야에서 발행되던 일간지인 『미야코신문(都新聞)』 1924년 1월 21일자 기사 (「松旭齋天勝 二十一日渡米」)에는 덴카츠일좌의 미국 순회공연 참가 단원 23명 (여자 15명, 남자 8명)의 명단이 실려있는데, 이 가운데 여성단원으로 구자(龜子)의 일본 독음인 가메코(かめこ)가 들어있다. 정황상 이는 배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4)「그리든 兩親을 차자 사랑의 픔에 든 裵龜子」, 『매일신보』 (1926.12.7.) 참조. 숭사동은 지금의 명륜동4가 일대 (혜화역 부근)으로, 배구자와 그의 가족이 거주했던 집터는 현재 혜화역 4번 출구 앞 뚜레주르 카페대학로점 건물의 후면 일대이다. 

15) 「갑잇고 뜻잇는 裴龜子의 家庭生活」, 『매일신보』 (1926.12.8.) 참조. 

16) 「右巢에 歸하는 小鳥 裵龜子 孃의 獨唱」, 『매일신보』 (1926.6.20.); 「納凉演劇大會」, 『조선일보』 (1926.6.20.); 「녀자교육협회주최의 랍양음악연극대회광경」, 『동아일보』 (1926.6.20.) 참조.

17) 「隱退하얏든 裴龜子孃 劇壇에 再現」, 『동아일보』 (1928.4.17.); 「白薔薇社 主催로 裵龜子 獨演大會」, 『매일신보』 (1928.4.18.) 

 

 

글, 사진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