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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5) ‘최초’의 근대무용가, 배구자의 삶을 찾아서(2)

1928년 4월 21일 장곡천정(長谷川町, 지금의 소공동)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배구자 고별무도회’는 그 이름과는 달리 배구자를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무도회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그 이전 시대에도 무용발표회(舞踊發表會), 무도회(舞蹈會) 등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무용 공연이 있었고, 최승희나 조택원 등도 스승 이시이 바쿠(石井漠)와 함께 조선에서 무대에 선 바 있었지만, 이 무대는 순전히 조선인의 기획을 통한 무용발표회로서는 명실상부한 ‘최초’의 기획이었다. 배구자의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어 당시의 거의 모든 조선인 신문에서 이를 보도하고 비평하였는데, 이렇게 노래와 춤을 곁들인 형태의 공연은 이후 배구자가 계속해서 선보이게 되는 이른바 레뷰(Revue)식 공연의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배구자는 이 무대에서 <유모레스크>, <집시 댄스>, <사쿠라(櫻), 사쿠라!>, <세일러(Sailor)>, <인형>, <아리랑>, <사(死)의 백조(白鳥)>의 7가지 무용을 선보임과 동시에 독창 <어이하리>1)를 불렀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아리랑>과 <사의 백조>이다. 전자의 경우는 민요 <아리랑>에 배구자가 직접 안무를 붙여 독무로 선보인 것인데, 이는 현재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으로는 가장 이른 시기에 민요와 무용을 결합한 작품으로, 193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이른바 “신민요춤”2)의 기원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사의 백조>는 당시의 기록으로 보아 1910년대에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누렸던 무용가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의 대표작인 <빈사의 백조(The Dying Swan)>이거나 혹은 이를 모방한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당시 배구자와 함께 공연에 올랐던 인물들 가운데 체코인3)​바이올리니스트 후스(Hus)라는 인물이 아마도 반주음악을 함께 연주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별무도회’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과는 달리 배구자는 일본이나 미국으로 건너가는 대신 1929년 6월 무렵 신당리 ‘문화촌’에 있는 양옥(문화주택)에서 ‘배구자무용연구소’를 창립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최독견의 회고소설 『낭만시대』에 따르면 배구자무용연구소의 창립에는 일제강점기 여러 언론사들의 영화 전문기자들이 모여 결성한 찬영회(贊映會)가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4)했다고 한다. 이는 최승희가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한 1929년 11월보다 약 5개월가량 빠른 것으로, 조선에서는 본격적인 첫 근대무용 교습기관을 표방했다는 점에서 당대 언론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당시 배구자는 “조선예술을 세계에 소개”하는 것을 이 연구소의 개설 목적이라고 밝히고, “조선춤에다가 洋式을 조곰 끼어너허서 빗잇든 그 조선예술을 시대적으로 부흥식히고”5)싶다는 포부를 드러내기도 했다. 배구자무용연구소의 명의로 선보인 첫 무대는 1929년 9월 19일 시내의 남촌(일본인 거주지)에 있던 중앙관(中央館)6)에서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는 배구자와 그의 막내동생 배용자(배한라),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유명한 교육자였던 강매(姜邁, 1878-1941)의 딸이었던 강덕자(姜德子. 혹은 강덕월(姜德月)) 등을 포함해 총 12명의 단원이 공연을 선보였다. 배구자무용연구소는 1929년 10월 경성에서 열린 조선박람회에서 공연을 할 예정7)도 있었던 듯하나, 이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신 그해 11월까지 평양, 진남포, 대구 등지의 지방을 순회하면서 공연을 이어갔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1929년 11월 경성에 돌아와 단성사에서 ‘혁신 제1회’ 공연을 올렸던 무렵에는 배구자의 단체 이름이 ‘무용연구소’가 아닌 ‘배구자예술연구소’라는 이름으로 개칭8)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듬해인 1930년 3월 배구자와 일행이 첫 번째 일본공연 길에 올랐던 때에 이르러서는 아예 이름이 ‘배구자무용가극단’으로 표기되기도 했는데, 주지하다시피 이는 배구자의 지향점이 순수 무용교습과 공연보다는 역시 레뷰 형식의 공연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자, 동시에 이후 당대 언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배구자일좌(裵龜子一座)”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당대 사람들이 배구자를 진지한 무용 교육자나 무용가라는 역할보다는 무용단 단장 혹은 대중 흥행사의 일종으로 생각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배구자는 또한 무용이나 가극 이외에도, 당대 최신의 대중매체라고 할 수 있는 영화나 음반 취입 등에도 관심을 보였다. 1931년 초부터는 1920년대 중반 이래 조선 영화의 대표적인 스타였던 나운규(羅雲奎)와 손을 잡고 영화 <십년(十年)>을 제작하려고 시도9)하기도 했고, 1936년 일본 요시모토흥업주식회사(吉本興業株式會社)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공연을 하던 무렵에는 배구자 자신과 단원이었던 강덕자가 일본 폴리돌(Polydor)레코드에서 <천안삼거리>, <도라지타령>, <다이나> 등을 불러 음반으로 발매10)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배구자가 1931년 무렵부터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이른바 ‘가무극부’ 혹은 ‘배구자무용연구소 문예부’ 덕택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문예부의 규모나 인적 구성은 현재 확인할 수 없으나, 최독견의 「낭만시대」를 비롯한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해보면 이후 1935년에 배구자와 홍순언이 함께 세운 동양극장의 ‘전속극작가’로 활동한 이서구, 박진, 이운방, 임선규, 최독견 등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배구자예술연구소/배구자가극단은 1929년 이후 자주 신문 등을 통해 “연구생 모집” 광고를 냈는데, 이들 광고11)에 따르면 단원의 조건은 15세에서 20세까지의 여성으로, 지원서와 이력서 이외에 신원보증인의 보증이 확실히 있어야 했으며, 보통학교 이상 졸업이라는 학력 제한도 있었다. 이렇게 모집한 배구자예술연구소의 단원은 1929년 첫 공연 당시 12명으로 시작해 그 후로 꾸준히 늘어나, 1938년 무렵에 이것이 완전히 해산되기 직전에는 전체 단원수가 70여명12)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렇게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를 지녔던 것에 비해 그 동안 그 구체적인 운영 방식이나 주요 단원들의 면면, 그리고 공연의 구성 등에 대한 자료는 그 동안 거의 밝혀진 바 없었다. 그런데 최근 필자가 재발굴한 1935년 11월 3일 동양극장 개관 기념공연 <배구자악극단> 공연 프로그램과 그 내용을 통해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밝혀졌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배구자 천안삼거리 영상

 



[사진 1] 1928년 4월 21일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첫 ‘조선민요춤’인 아리랑(아르랑)을 선보이는 배구자의 모습. 『중외일보』 1928년 4월 23일자 보도사진.

 


[사진 2] 배구자무용연구소의 운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무렵인 1929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배구자의 프로필 사진


[사진 3] 1931년 일본 순회공연 당시 의상을 입은 배구자의 모습(개인소장 사진/복사본). 정확히 어떤 작품을 선보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이와 비슷한 의상을 입은 사진이 여럿 전하는 것으로 보아 <춘앵무> 등 그녀의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와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4]『조광』 1935년 12월호 권두화보에 실린 배구자의 모습. 1935년 11월 동양극장 개관기념 공연 직전의 연습 모습이다.

 

[사진 5]「청춘의 피를 뛰게 하는 양 무용가 - 배구자, 조택원」. 『삼천리』 1935년 11월호 권두화보이다. 조택원의 무용작품 3편과 배구자의 무용작품 4편의 사진을 게재하였다. 배구자의 작품은 <아리랑>, <춘앵무>, <방아타령>, <나의 비애>가 소개되었다. 

 


[사진 6] 위의 권두화보에 실린 <아리랑>의 모습. 이 작품은 1928년에 공연했던 작품이 아니라 이를 1934년 무렵에 ‘민속무용극’으로 개작한 것이다.


[사진 7] 최근 필자가 재발굴한 1935년 11월 3일 동양극장 개관 기념공연 <배구자악극단> 공연 프로그램의 표지.

 


글·사진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

 

 

 

1) 그간 일부 연구에서는 배구자가 ‘첼로 독주’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초기 연구에서 당시 신문 기사에 나온 “앨토(Alto)”를 잘못 읽은 뒤 그 오류가 바로잡히지 않고 계속 반복된 결과이다. <어이하리>는 이 공연의 기획자라고 할 수 있는 이철(李哲)이 백장미사에서 출간한 악보집인 『白薔薇 The White Rose 第1輯』(1927)에 수록되어 있는 외국 번안가곡이다.

2) 이와 관련해서는 졸고, 「근대 비문자 대중매체와 한국무용: 1930-1960년대 유성기음반과 영화를 중심으로」, 『무용역사기록학』 58 (무용역사기록학회, 2020) 및 유미희, 「신민요춤 연구」, 『무용역사기록학』 63 (무용역사기록학회, 2021) 등을 참조할 것. 이 논고는 무용역사기록학회가 2020년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사업으로 기획한 ‘근대의 춤유산: 신민요춤의 재발견’ 학술대회 및 재현공연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3) 당시 신문에서는 미국인이나 독일인으로 표기한 경우가 많으나, 후스의 제자로 배구자와도 여러 차례 협연한 바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안병소(安炳昭, 1908-1974)는 그를 분명히 체코 사람으로 기록하였고, 1920-30년대 조선을 방문했던 체코 여행객들 역시 그를 체코인으로 기록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주한 체코 대사를 지낸 야로슬라브 올샤(Jaroslav Olša)가 2011년에 발표한 온라인 논문, "한국을 여행한 7명의 체코인 이야기-제2차 세계대전 이전 한국을 찾은 그들의 여행담과 한국에 대한 생각"을 참조할 것. 

4) 최독견, 「낭만시대 (9)」, 『조선일보』 (1964. 11. 26.).

5)「裵龜子의 舞踊殿堂, 新堂理文化村의 舞踊硏究所 訪問記」, 『삼천리』 (1929. 9.), p.44.

6)「裴龜子舞踊硏究會 初回公演」, 『조선일보』 (1929. 9. 18.).

7)「裴龜子が朝博へ出演, 富永さんにお願ひ」, 『京城日報』 (1929. 8. 20.); 「裵龜子가 出演한다 朝博演藝舘에」, 『매일신보』 (1929. 8. 20.).

8)「裴龜子 公演을 보고」, 『동아일보』 (1929. 11. 25.).

9)「裴龜子,羅雲奎 『十年』을 撮影」, 『동아일보』 (1931. 5. 6.). 그러나 이 영화는 실제로 완성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각본과, 이후 발성영화 Talkie로 제작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일본 콜럼비아 레코드 사에서 유성기음반 연극으로 발매된 <말 못할 사정>과의 관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0) Polydor 19306-A ᄶᅣ-스쏭 ᄯᅡ이나 裵龜子樂劇團 姜德子 伴奏 日本포리도-루管絃樂團. 

Polydor 19306-B ᄶᅣ-스쏭 귀여운그눈 裵龜子樂劇團 姜德子 伴奏 日本포리도-루管絃樂團. 

Polydor 19310-A(1095BF) 民謠 도라지타령 裵龜子樂劇團 裵龜子 裴龜子樂劇團文藝部作詞 伴奏포리도-루管絃樂團. 

Polydor 19310-B(1096BF) 民謠 天安三巨里 裵龜子樂劇團 裵龜子 裴龜子樂劇團文藝部作詞 伴奏포리도-루管絃樂團.

11) 예를 들어, 「裴龜子舞踴所 擴張所員增募」, 『조선일보』 (1929. 10. 27.)

12) 草兵丁, 「百八念珠 만지는 裵龜子 女史」, 『삼천리』 (1940. 5.), p.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