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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6) ‘최초’의 근대무용가, 배구자의 삶을 찾아서(3)

앞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필자는 최근 1930년대 중반 배구자가극단의 구체적인 운영 및 공연 내용, 그리고 단원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1935년 11월 3일 동양극장 개관 기념공연배구자악극단공연 프로그램을 새롭게 발굴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이배구자악극단공연 프로그램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그 내용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현재 유일본으로 짐작되는 이 프로그램은 표지와 화보 등을 포함해 총 16쪽 구성으로 되어있으며, “아리랑 박사 1호”라는 별칭으로 유명했던 국문학자 故박민일 전 강원대학교 교수 (1936–2016)가 수집해 소장하고 있다가 2013년 강원도 양구군 양구근현대사박물관에 기증한 자료 7,300여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자료는 지난 2009년에 경향신문에도 한번 소개된 바 있으나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단의 첫 페이지에는 “신축 낙성 개관에 제하여”라는 글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써 있는데, 동양극장 개관에 대해 “娛樂의 一線을 通하야 文化의 向上을 圖함에 잇서서 劇場으로서 맛흔 바 그 任務”를 충실히 할 것이라고 그 포부를 밝히고 있다. 1930년대 당시 지식인들이나 언론에서 문화를 지극히 숭고하고 고상한 것으로 여기며 여전히 계몽과 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을 감안 해보면, 이렇게 오락을 통해 문화의 향상을 도모한다는 선언은 1930년대 중반의 시점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페이지와 3페이지에는배구자가극단 향토방문 공연순서라는 제목으로 총 2부로 나누어진 공연 프로그램이 수록되어 있다. 제1부는 구월산인 九月山人의 작품으로 소개된 전 5경(景) 구성의 만극(漫劇)멍텅구리 2세로 되어 있다. 여기서 “구월산인”은 동양극장의 전속 극작가였던 최독견(崔獨鵑, 1901–1970)1)의 필명 가운데 하나이다.멍텅구리 2세는 현재 극본이 남아있지 않아 완전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소개글로 보아 춤과 노래를 곁들인 짧은 희극으로 생각되는데, 안무는 배구자, 음악선곡은 서영덕(徐永德), 무대장치 및 조명은 정태성(鄭泰星)이 담당했으며, 배구자, 홍청자(洪淸子), 송광자(宋光子), 이영자(李英子), 박승자(朴勝子), 배숙자(裵淑子), 배용자(裵龍子), 배송자(裵松子) 등이 출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영덕은 1930년대 초반부터 주로 신민요 풍의 유행가를 작곡하며 활동하다가 1934년부터 배구자가극단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고, 배구자가극단이 해체된 후에는 오케레코드에서 운영하던 조선악극단으로 옮겨 이봉룡 등과 함께 조선악극단의 편곡을 담당했으며 또 색소폰 주자로도 활동했다. 정태성 역시 1934년 무렵부터 배구자가극단과 활동한 인물로, 훗날 동양극장 소속 극단 중 하나였던 청춘좌(靑春座)의 최대 히트작이었던 연극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일명 홍도야 우지마라)의 무대연출을 담당하기도 했다.


제2부는 배구자가극단 단원들이 벌이는 다양한 공연무대, 즉 버라이어티 쇼 혹은 레뷰(Revue)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안무 배구자, 음악 지휘 및 편곡 서영덕, 무대장치 정태성 지휘로 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 첫 순서인 ‘무대연주 3곡’ 순서인데,양산도,죠니(폭스트로트)2),방아타령의 세 곡을 메들리로 연주한 것이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이 공연은 피아노, 바이올린, 제1,2트럼펫, 기타, 트럼본, 밴조, 제1,2알토색소폰, 소프라노색소폰, 클라리넷, 플룻, 드럼의 제법 규모 있는 편성을 가진 재즈밴드 연주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들 악기의 연주자들이 홍청자, 강덕자, 배송자 등 앞서 살펴보았던 배구자가극단의(무용) 단원들로, 배구자 자신도 플롯 연주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서도 배구자가극단의 연주자들이 단순히 무용뿐만 아니라 악기 연주와 노래 등까지 전부 소화할 수 있는 상당히 수준 높은 공연 집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부의 나머지 순서들은 주로 무용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독창고흔 눈(강덕자), 재즈댄스(배숙자 외 9명), 탭댄스메잌업3)(강덕자), 급날(배용자, 홍청자, 박순자), 무용극물긷는 처녀(배구자, 배송자 외 10명, 가수 김선초(金仙草), 김선영(金鮮英)), 댄스액크로빠틱4)(배숙자), 신무용아리랑(배구자), 합창빛나는 조선(강덕자, 김선영, 김선초), 탭댄스호텔 보이(송광자 외 9명), 댄스랑데뷰(배용자, 홍청자),피날레(배구자 외 일동 전체, 가수 김선초, 김선영)의 총 13개 순서로 되어 있다. 탭댄스 등 1930년대 서구의 최신 유행춤과아리랑,물긷는 처녀등 조선적 정서를 반영한 ‘신민요춤’을 함께 소개하고 있는 것 역시 배구자가극단이 가지고 있던 조선적-서구적인 것, 예술성-대중성 등에서의 혼종성(混種性; Hybridity)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전단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배구자가극단의 주요 단원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와 이들의 사진을 싣고 있다. 먼저 ‘좌장(座長)’인 배구자에 대해서는 “레뷰(Revue)界의 先驅요 또 母胎라고 할만한 裵龜子 女史의 싸흔 功을 누가 적다 할 것이냐. 우리의 至寶的 民謠 “아리랑”을 처음으로 舞踊化하야 그 妙技의 빗낫슴을 記憶한다.”고 하여 버라이어티 쇼 스타일의 공연을 처음으로 보편화하고아리랑을 무용화했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배구자 이외에도 강덕자, 배숙자, 배용자, 홍청자, 송광자, 이영자, 배송자를 소개하고 있다. 이 가운데 강덕자는 1936년에 배구자와 함께 일본 폴리돌 레코드에서 음반을 녹음했던 인물로, 당시 배구자가극단에서 제2인자 정도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단에 따르면 “最古學府의 女子敎育을 바든 才媛으로 座長 裵龜子 女史를 補佐하야 團圓 弟妹들의 두터운 信任을 밧는 “姜언니”, 舞踊, 聲樂, 樂器 多角的의 熟練한 演技를 가진 重寶”라고 소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배용자는 앞서 글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배구자의 막냇동생으로 훗날 배한라, 혹은 한라 함이라는 이름으로 하와이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쳤던 인물인데, 이 전단에서는 1935년 당시 배구자가극단에서 남역(男役), 즉 남자 역할을 주로 맡아하며 “貴公子 裵龍子君”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 밖에 한때 이시이 바쿠(石井漠) 밑에서 무용을 배워 배구자가극단의 해체 이후에는 일본 다카라츠카 소녀가극단(寶塚少女歌劇團)의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대에는 조선악극단에서 이른바 “한국 최초의 걸그룹”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저고리시스터즈의 멤버로 활동했던 홍청자(洪淸子) 역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전단의 끝부분에는 배구자가극단의 동양극장 개관기념 공연 이후석별 특별흥행주간(1935. 11.8.-12.) 예정 프로그램이 실려 있다. 전체 16개 작품으로 된 이 프로그램 역시 동양극장 개관기념 공연의 프로그램과 비슷한 형태로, 무대연주, 뮤지컬플레이, 촌극, 댄스, 왈츠, 합창, 악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작품 가운데 앞의 프로그램과 겹치는 작품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배구자가극단에서 공연하던 작품의 레퍼토리와 기획 규모가 실로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배구자가극단의 프로그램 소개 이외에도 이 전단에는 “금주의 영화”라고 하여 당시 동양극장에서 상영되었던 독일영화진홍의 연(戀)(원제: Spione am Werk, 1933)을 소개하는 내용이 실려 있으며, 이외에도 상영예정작으로 일본과 미국의 영화 3편을 추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그동안 학계에서 동양극장을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극장”5) 이라고 하여 다른 극장들과 달리 철두철미하게 무대공연만을 올린 전용관이었다고 본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록이다. 이처럼 동양극장이라는 공간의 정확한 정체성과 역사성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배구자악극단은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무용을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대중예술 공연을 펼치며 승승장구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 등장한 다양한 대중예술단체, 가깝게는 1940년대에 대호황을 누렸던 조선악극단을 위시한 다양한 악극단들과 해방 후 등장한 각종 공연단체들의 원류가 되었다. 또한 단원 전원이 여성으로 되어있었다는 점, 남성 배역 역시 여성이 맡아서 했다는 점 등등에서는 1950년대의 여성국극단 등의 여성예술단체들을 선취한 면모도 찾을 수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렇게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던 배구자가극단은 1937년 1월 30일 배구자의 남편이자 동양극장의 극장주였던 홍순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그 운영이 휘청이게 되었고, 이후 배구자의 급작스런 재혼과 동양극장의 경영권 문제와 그에 따른 다양한 갈등 관계 속에서 1938년 4월 부민관에서의 공연을 끝으로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배구자는 광산사업가 김계조(金桂祚)와 재혼한 직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에서 배구자무용연구소와 배구자악극단을 새롭게 조직하고자 했던 것6)으로 보이나, 이는 어떤 이유7)에서인가 제대로 성사되지 못하였고, 1940년 무렵에는 완전히 무대 활동을 접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는 배구자의 이후 행적과 말년까지의 행보, 그리고 “한국 최초의 근대무용가”로서 배구자의 역사적 위상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정리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글·사진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




※아래 사진들은 양구근현대사박물관 소장배구자악극단 공연팸플릿에서 발췌한 것이다.



[사진1] 1935년 11월 3일 배구자가극단 향토방문 공연 프로그램. 만극 <멍텅구리 2세>, <무대연주 3곡> 및 다수의 무대 공연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사진2] “座長 裵龜子 女士: 레뷰界의 先驅요 또 母胎라고도 할 만한 裵龜子 女士의 싸흔 功을 누가 적다 할 것이냐. 至寶的 民謠 <아리랑>을 처음으로 舞臺化하야 그 妙妓의 빗낫슴을 기억한다.”



[사진3] 배구자가극단 주요 단원들. 오른쪽 위 배용자(裵龍子; 배한라), 오른쪽 아래 홍청자(洪淸子), 왼쪽 위 이영자(李英子)와 송광자(宋光子), 왼쪽 아래 배송자(裵松子) 등이다.



[사진4] 배구자 주연의 무용극 <춘앵무(春鶯舞)>의 한 장면. 옛 궁중무용인 춘앵전(春鶯囀)을 각색하여 군무 형태로 개작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활옷 차림의 배구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바로 이 <춘앵무>를 공연하기 위한 의상을 입은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5] 촌극 <멍텅구리 2세>의 무용 장면.



1) 최독견은 구월산이 있는 황해도 신천군 출신이었다. 한편 그는 본명인 최상덕(崔象德)도 종종 사용하였다. 

2) 독일 출신의 미국 여배우 겸 가수였던 마를레네 디트리히(Marlene Dietrich, 1901–1989)가 1931년에 발표해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인 것으로 보인다.

3) Make-up

4) Acrobatic 

5) 가령 유민영은 동양극장이 “발성영화(토키)의 확산으로 인해 공연 관람 기회를 잃은 이들에게 공연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고 서술한 바 있으며, 이는 그간 계속해서 검증되지 않고 수많은 연구와 저술에서 반복되어왔다. 이와 관련해서는, 유민영, 『한국인물연극사』(1) (서울: 태학사, 2006), p.400.

6)「裴龜子樂劇團 吉本興行提携」, 『동아일보』 (1938. 5. 12.); 「裴龜子樂劇硏究所」, 『동아일보』 (1938. 8. 27.) 등 참조.

7) 동양극장은 재정난으로 1939년 8월 문을 닫게 되었고, 배구자 역시 동양극장의 경영에서 발생한 채무 관계로 거액의 소송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아마 이로 인한 문제로 인해 배구자가극단의 재창설 역시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는 「東洋劇塲 讓渡期日에 債權者들이 劇場占有」, 『동아일보』 (1939. 8. 2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