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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7) ‘최초’의 근대무용가, 배구자의 삶을 찾아서(4)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배구자는 1938년 광산사업가 김계조(金桂祚)와 재혼한 이후 무대에서 완전히 손을 떼었지만, 1945년 8월 해방과 그 이후의 격동 속에서 그녀의 이름은 다시 한 번 더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그녀의 이름은 더이상 선망의 대상인 신무용가 혹은 가극단 단장으로서가 아니라, ‘친일파 모리배’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상태였다.


해방이 된 직후인 1945년 8월 말, 배구자와 그녀의 남편 김계조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를 비롯한 총독부 고위 관료들 및 부유한 재조일본인들로부터 약 200만원에 달하는 대규모의 돈을 대출받아 경성 한복판의 미츠코시 백화점(三越百貨店.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4층에 국제문화사(國際文化社)라는 다소 거창한 이름의 댄스홀을 차렸다. 일본이 이미 완전히 패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김계조·배구자 부부가 이 정도의 거액을 대출받아 댄스홀을 차릴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국제문화사 댄스홀의 설립은 총독부 고위관료들을 포함한 재조 일본인 유력자들이 조선에서의 재산을 어떤 식으로든 지키기 위한 방편1)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일제 말기부터 유력자들과의 친분을 통해 사업을 증식시킨 김계조 (그리고 배구자) 자신의 생존 전략2)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에 소환된 니시히로와 배구자, 그리고 김계조 등이 일관되게 증언했듯, “조선인과 일본인 민간인 여성들의 정조를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세운 일종의 ‘위안소’(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공간)로서의 역할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3)으로 보인다.


그런데 배구자와 김계조가 국제문화사 댄스홀을 차리고 영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12월, 미군정 측은 국제문화사가 더 큰 음모를 감추기 위한 연막에 불과하다는 일련의 고발과 투서를 접수하게 되었고, 이에 김계조와 배구자는 이른바 “김계조 음모사건”이라는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수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 법정에서 검찰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김계조와 배구자 등 용의자들은 미군정을 전복하고 친일 세력 주도의 신정부를 수립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미군정 고위간부, 반일 민족주의자 등을 살해하기 위한 친일 간첩단을 조직하려고 했다는 것4)이었다. 당시의 수사 기록이나 구체적인 증거가 현존하지 않아 당시 언론에 보도된 이러한 주장의 신빙성을 현재로서는 확인하기는 곤란5)하지만, 어쨌든 이런 과정 속에서 배구자 역시 남편 김계조와 함께 친일파 모리배이자 미군에게 ‘윤락여성’을 제공하려 한 희대의 악녀로 두고두고 낙인찍히게 되었다. 김계조 사건은 결과적으로 횡령죄를 제외한 나머지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되었지만, 아마도 배구자가 한국을 영원히 등지고 외국으로 이주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배구자는 김계조가 횡령죄로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은 1946년 10월 무렵 김계조와 이혼하였다. 그런데 이때 배구자는 일본계 미국인 3세이자 미군 정보장교였던 프랜시스 야마모토(Francis Yamamoto, 1909년생)라는 인물과 세 번째로 결혼한 뒤 이름도 일본식으로 야마모토 노부히로(山本信淵)라고 개명해 완전히 일본인으로 행세하였다. 당시 국내 언론은 이런 배구자의 사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야유를 보냈다.


왕년의 그 명성을 떨치던 춤의 여왕 배구자는 해방 전까지 광산 거부 김계조 씨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고 오다가 해방 후 제일착으로 법망에 걸려든 남편의 꼴을 보고 헌신짝같이 남편을 버리고 오페라를 한다, 극장을 만든다 하더니 싹수가 틀려 조선은 살지 못할 곳이라고 깨달었음인지 최근 한때 소문이 자자하던 미국 재적의 일본인 2세와 함께 커다란 희망(?)을 품고 일로 일본으로 떠났다 한다. 일본 가면 얼마나 화려하게 잘살는지 고사하고 “가련한 자여! 너의 이름은 친일파”라는 낙인은 면치 못할 것이다. 비단 배구자 뿐만 아니라 동포야 죽든 말든 일제에 충성을 다하던 자는 배구자 뒤를 따르는 것이 가장 현명할는지도 모르는 일. (후략)6)

배구자는 이후 일본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거주하면서 프랜시스 야마모토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를 낳았고 (장녀 엘렌 야마모토(Ellen Yamamoto, 1949년생), 장남 프레드 야마모토(Fred Yamamoto, 1951년생)), 이후에 다시 딸 (요코(Yoko))을 입양하였다. 이후 배구자와 야마모토 일가는 196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바바라(Santa Barbara)에 정착했으며, 배구자 자신은 1970년대부터 산타바바라 시티 칼리지(Santa Barbara City College)에서 일본식 서예와 수묵화 등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며 일종의 지역 명사로 이름을 알리다가 2003년 2월 15일 뇌졸중으로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말년의 배구자는 자신이 한국인/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하며 자신이 일본 메이지 천황과 한국의 모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7)에서 펼치고, 실제 나이보다 4살을 부풀려 2001년에 100세 생일을 자축하는 등8), 다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배구자는 ‘조선인 무용가’로 살았던 시간보다 ‘일본인 여성’으로 살았던 시간이 훨씬 길었고, 그의 뒤에 나타난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신무용가들, 가령 최승희, 조택원 등의 업적에 비해 지금까지 기억될 만한 예술적 유산을 남기는 데에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또한 ‘최초’의 한국 근대무용가라는 타이틀과는 대조적으로, 복잡다단했던 사생활과 해방 후의 문제적 행적 등으로 인해 21세기까지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생전은커녕 타계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엄밀한 연구나 가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무용과 작품세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배구자의 막내 동생으로 배구자가극단에서도 활동했던 배용자(배한라)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가 적지 않게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앞글에서도 간략히 언급했듯, 배용자는 1948년 6월 15일 한국계 미국인 2세인 함동운(John Dong Un Huhm)과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대 초 한라 함(Halla Huhm)이라는 이름으로 하와이에 정착하였고, 이후 ‘한라 함 한국무용연구소(Halla Huhm Korean Dance Studio)’를 열고 1994년 타계할 때까지 재미교포 및 미국인 제자를 적지 않게 길러내면서 ‘한국 춤’을 해외에 알리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녀의 활동은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는데, 배용자는 197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의 활동과 작품 세계를 조망하면서 언니인 배구자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러 차례 밝히고 이에 관련된 회고 역시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1994년 한라 함이 타계한 이후 그녀의 유품과 자료, 사진기록 등은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마노아 캠퍼스의 한국학연구소(University of Hawaii-Manoa Center for Korean Studies)에 기증되어 ‘한라 함 댄스 컬렉션(Halla Huhm Dance Col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미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이 자료의 대략적인 내용과 규모는 알려진 바 있지만, 아직까지 배구자의 작품 세계와 한라 함 한국무용연구소를 통해 재미교포 사회에서 다시 디아스포라 문화의 하나로 재구성된 ‘한국 춤’ 사이의 연관성은 완전히 규명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였던 배구자의 인생과 그녀의 활동을 기록한 자료들을 지금이라도 다시 정리, 연구하여 잊혀진 초기 한국 근대무용의 면모를 다시 조망해 보아야 할 때이다.


글․사진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

 

 

[사진1] 1946년 1월 공판을 받고 있는 배구자의 두 번째 남편 김계조(왼쪽 한복 입은 사람).

미군정 자료사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제공.

[사진2] 국제문화사 댄스홀이 자리잡았던 본정 입구의 미쓰코시 백화점(三越百貨店, 현 신세계백화점 명동본점)의 일제 말기 모습. “일억일심 一億一心”, “제 30회 기념식수” (1940년 4월 3일), “국민정신총동원 애마의 날 愛馬の日” (1940년 4월 7일) 등의 현수막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1940년 4월 초에 촬영된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3] 1946년 1월 1일 <신조선보>에 실린 국제문화사(국제댄스홀) 신년광고. 배구자의 명의로 되어있다. 김계조 사건의 첫 공판이 1946년 1월 17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의도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4] 배구자의 세 번째 남편인 프랜시스 야마모토(Francis Ryuzo Yamamoto, 1909–1991,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의 제 2차 세계대전 중 부대 복무 사진. 1944년 11월 1일 필리핀 레이테 섬. 미국 육군 통신대 아카이브(U.S. Army Signal Corp Archive) 제공. 야마모토는 하와이 일본계 미국인 3세로, 1942년에 자원입대하여 미국 육군 제24군단 소속 306 정보사령부대(306th Headquarters Intelligence Detachment, XXIV Corps, U.S. Army)에서 하사(Sergeant)로 복무하였고, 1945년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한국으로 파견되어 김계조 사건 당시에는 김계조의 심문과 기소를 담당한 미 육군 24군단 224 방첩부대(224th Counter Intelligence Corps Detachment) 소속이었다. 이를 토대로 미루어 보아 배구자와 야마모토는 김계조 사건 신문 과정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5] 1961년 해외에 한국무용을 소개한 공로로 문교부 장관 표창을 받았을 때의 한라 함 (배용자/배한라)의 모습. <하와이 타임즈(Hawaii Times)> 1961년 3월 25일 보도 사진 원본.



1)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재조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때는 재산의 극히 일부만을 휴대/소지하고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재조일본인들이 재산을 은닉하거나 믿을만한 조선인 동업자/친구 등에게 맡기고 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 김계조는 사업을 일으킨 초기부터 일본의 정계와 재계 인사들과의 친분 및 인맥을 과시했으며, 해방 직후 미군정에게도 바로 접근해 자신의 전문분야인 석탄 공급과 관련된 협력관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병준, 「패전 후 조선총독부의 전후 공작과 김계조 사건」, 『이화사학연구』 36, 이화사학연구소, 2008. pp.37-42. 참조.

3) “Memo 11. (1945. 9. 28.)” (RG 319, G-2), RR Case Files, Personal Name Files, Kim Ke Cho, 1945-47, Intelligence, Records of the Investigative Records Repository, Security Classified Intelligence and Investigative Dossiers, 1939-76, pp.31-40. 배구자는 1945년 9월 28일 미 육군 제24군단 224 방첩파견대에 연행되어 용의자 및 참고인 자격으로 심문을 받았다. 배구자는 남편의 댄스홀 사업에 자신의 돈 10만원을 직접 투자했으며, 미군이 한국인 여성의 정조를 함부로 유린하지 않도록 12명의 한국인 및 일본인 무용수를 고용하여 미군 접대 및 자발적인 ‘성적 향응(Sexual Diversion)’을 제공하도록 하려 했으나, 조선의 독립이나 미군정의 정책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진술하였다. 배구자는 이듬해 1월 17일 김계조 사건 제1차 공판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다시 진술하였다.

4)「賣國의 大陰謀! 金桂祚의 事件」, 『大同新聞』 (1945.12.19.).

5) 김계조 사건에 대해 연구한 정병준은 김계조와 일제 고위관료들이 실제로 미군정 하에서 정보수집과 전복활동을 획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익실현이 불가능한 수준의 지나치게 거액의 투자”를 받은 김계조에 대해 앙심을 품은 다른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사건이 실제 이상으로 크게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6)「華麗한 꿈은 親日派 烙印」, 『경향신문』 (1947.6.22.).

7) "Nobu Yamamoto's Fantastic Tale", The Santa Barbara Independent, March 1-8, 2001.

8) 1972년에 배구자가 자필로 작성, 산타바바라 시티 칼리지에 제출한 자기소개서에는 1910년생으로 되어 있어, 오히려 실제 나이보다 5살을 깎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