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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8) 영상과 음향으로 만나는 최승희(1)

단언하건대, 근대 한국에서 활동한 여러 무용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최승희(崔承喜, 1911–1969)라는 사실에는 아마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최승희는 드라마틱한 인생역정 속에서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식민지 조선의 예술가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세계적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일제 말기의 친일 행적과 해방 후 월북, 그리고 북한 정권에 의한 숙청으로 인해 그녀의 이름은 남북한 모두에서 수십 년 동안 공식 기록에서 지워진 ‘복자(覆字)’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행적이 해금(解禁)되면서 여러 연구자들 및 호사가들, 그리고 후속세대 무용가들에 의해 그녀가 남긴 예술세계의 많은 부분이 복원되어 한국 근현대 무용의 역사 서술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최승희가 남긴 무용과 그 역사적 유산이 상당 부분 재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기록한 매체 자료, 즉 영상자료와 음향자료는 생각보다 현존하는 것이 많지 않다. 이는 물론 최승희의 업적이 한반도의 불행한 현대사 속에서 철저히 은폐와 망각을 강요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그동안 영상자료와 음향자료의 체계적인 보존과 아카이빙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수많은 자료가 산일, 멸실된 것이 더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현재 최승희와 관련된 영상자료와 음향자료는 국내가 아닌 일본 등지에 겨우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이나, 그마저도 자료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근거 없이) 주장하는 일부 호사가들이나 연구자들의 폐쇄성으로 인해 제대로 공개되거나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글에서는 최승희의 활동상을 담은 초기 영상자료들의 자료 현황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최승희의 모습을 담고 있는 영상자료로 가장 오래된 것은 그녀가 15세의 나이로 이시이 바쿠(石井 莫)의 무용연구소에 단원으로 입단한 지 약 7개월 뒤에 촬영한 것이다. 이시이 바쿠와 그의 제자들은 1926년 10월 3일 도쿄 미쓰코시(三越)백화점 옥상에서 무용 시연회를 선보였는데, 이때의 시연회가 도쿄 베이비키네마 구락부(東京ベビーキネマ倶樂部)라는 단체에 의해 영상으로 촬영되었던 것이다.



1920년대 초 일본에서는 일반 영화필름의 4분의 1 크기인 9.5mm 소형 필름을 사용하는 프랑스 파테(Pathé) 사의 파테 베이비(Pathé Baby) 가정용 카메라가 중산층 사이에 널리 보급되면서, 이른바 “소형영화(小形映畫, 베이비 키네마)”를 제작하려는 많은 아마추어 영화제작자들이 나타났는데, 도쿄 베이비키네마구락부 역시 이러한 여러 아마추어 영화 제작자들의 친목 단체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도쿄 베이비키네마구락부의 회장은 아마추어 천문학자이자 문화연구가로 이시이 바쿠의 지인이기도 했던 시미즈 신이치(清水眞一, 1889-1985)라는 인물이었는데,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이시이 바쿠가 굳이 공공장소에 가까운 백화점 옥상에서 무용 시연회를 한 것 역시 처음부터 영화 촬영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시연회에서 제작된 필름은 두 종류였는데, 하나는 이시이 바쿠의 독무인 <마스크>였으며, 다른 하나는 최승희와 이시이 에이코(石井榮子), 이시이 요시코(石井欣子) 3인이 공연한 3인무 <그로테스크>였다. 전체 길이 3분가량의 이 필름에 삽입되어 있는 간자막(間字幕; Intertitle)에 따르면, <그로테스크>는 노르웨이의 작곡가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의 음악에 맞추어 공연한 것이라고 한다. 사운드가 없는 무성 필름인 만큼, 당시 공연에서 그리그의 곡 중 정확히 어떤 곡을 사용했는가는 불확실하지만, 1927년 7월 발행된 이시이 바쿠 팸플릿 제1집에 실린 <그로테스크>에 대한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등장하는 3명의 요괴(마녀)를 형상화한 “의태무용(擬態舞踊)”이라고 해설하고 있어, 그리그의 <페르 귄트(Peer Gynt)> 조곡 제1번의 제4곡인 <산 속 마왕의 궁전에서(I Dovregubbens hall)>나, <맥베스>에서 영감을 얻은 곡인 <서정소곡(Lyric Pieces), Op.12> 중 제3곡 <파수꾼의 노래(Vektersang)>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1)할 수 있다.


이후 이 필름의 원본은 시미즈 신이치가 제작한 다른 아마추어 영화 필름들과 함께 현재 일본 시즈오카(静岡)현 시마다(島田)시 시립도서관 내의 시미즈 문고(淸水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이 필름은 촬영과 편집 과정을 거친 뒤 여러 벌이 복사되어 도쿄 베이비키네마 구락부 회원들에게 나누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한 벌이 지난 2016년 일본 모처의 경매에 출품되어 무려 681,000엔(한화 약 700만 원)에 낙찰된 적도 있으나 이 필름의 이후 행방은 현재 묘연한 상태이다.


다음으로 최승희의 공연 모습을 담고 있는 영상으로는 현재 일본 니이가타(新潟)현 니이가타대학 내 니이가타 지역영상 아카이브(新潟 地域映像アーカイブ) 2)에서 소장하고 있는 ‘제국호텔 홀에서의 최승희의 춤(帝国ホテルホールでの崔承喜の踊り)’이라는 가제가 붙어있는 16밀리 필름을 들 수 있다. 약 2분 40초가량의 이 필름은 최승희의 <승무>를 비롯한 여러 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영상에 담긴 춤들이나 주변 정황을 보면 정식 공연 영상이라기보다는 리허설을 촬영한 듯한 모습이며, 특히 중간에는 최승희가 아닌 다른 여성 무용가의 춤 모습도 한 장면 들어있다.


 

이 필름은 니이가타 현의 유명한 요정(料亭)인 이키나리야(行形亭)의 4대 경영주였던 이키나리 요시오(行形芳郎)가 촬영한 아마추어 홈 무비인데, 필름의 촬영 시기는 현재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영상의 제목 역시 촬영 후 상당 시간이 흐른 뒤에 촬영자인 이키나리의 기억에 의존하여 카탈로깅된 것으로 부정확하다. 현재 알려진 기록에서는 최승희가 제국호텔 홀에서 공연을 했던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니이가타 대학 측에서는 최승희가 1942년 도쿄 제국극장(帝國劇場)에서 무대를 가졌던 것을 근거로 이 영상을 1942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영상에 담겨있는 춤들이 <승무>를 제외하고 거의 다 근대 신무용이라는 점에서 최승희의 초기 공연 레퍼토리에 가까우므로 이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추정이다. 또한 본 아카이브에 소장되어 있는 이키나리의 다른 홈무비 필름들 대부분이 1933년에서 1936년 사이에 제작된 것임을 감안해 보아도, 이는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편 일본예술문화진흥회에서 2003년에 발간한 『日本洋舞史年表 1』3)에는 1926년부터 1938년까지 최승희가 출연한 것으로 기록된 공연의 목록이 총 16회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도쿄에서 열린 공연으로 최승희가 독무 신작발표회가 아닌 다른 무용가들과 공연을 함께 했던 것은 1933년 5월 20일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주최 근대여류무용대회 (일본청년관), 1933년 10월 22일 이시이 바쿠 무용단 정기공연 (히비야공회당), 1934년 10월 7일 재단법인 일본청년관 주최 가을 무용제 (일본청년관)의 세 차례이다. 이 중 이 필름에 담겨있는 공연이 정확히 어느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 필름은 1933년 혹은 1934년 무렵의 최승희의 공연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특히 최승희가 직접 명고수이자 명무였던 한성준(韓成俊)을 사사했던 것으로 알려진 <승무>의 초기 구성을 단편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 큰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최승희의 일제강점기 시기 영상자료는 이 밖에도 단편적인 자료들이 몇 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에는 2019년에 필자가 확인하여 학계에 보고한 1938년 미국 순회공연 당시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무당춤> 공연의 일부4)를 비롯하여, 역시 1930년대 말 해외 순회공연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명비곡>, <무당춤> 등을 담은 칼라 필름의 일부, 이보다는 조금 뒤인 1940년대 (혹은 해방 전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석굴암의 벽조>, <수건춤> 등을 담은 흑백 영상 등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자료들의 대부분은 그 출처나 현재 소장처 등이 거의 확인되지 않은 상태로, 여기저기 방송 프로그램 및 인터넷 동영상 등에 중구난방으로 편집된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어 그 자료적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난제가 있다. 이 역시 하루빨리 구체적인 자료의 정리와 고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최승희는 1930년대에 일본에서 제작한 두 편의 극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하나는 일본 신코키네마주식회사(新興キネマ株式會社)에서 제작하여 1936년 4월 개봉한 <반도의 무희(半島の舞姬)>였고, 다른 하나는 1938년 1월 개봉한 <대금강산의 노래(大金剛山の譜)>였다. 안타깝게도 두 영화 모두 실제 필름이 현존하지 않아 그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으나, 당시의 언론 보도를 보면 두 영화 모두 최승희의 주요 작품들을 대거 수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대금강산의 노래>에는 <무당춤>, <아리랑>, <보살춤>, <검무>, <봉산탈>, <무녀(舞女)>, <승무>, <금강산의 노래> 등 최승희가 직접 안무한 작품 8편이 수록되어 있었는데5), 그 중 <무당춤>, <보살춤>, <검무>, <승무>의 네 작품은 최승희의 무용발표회 공연들이나 1938년에서 1940년에 걸쳐 이루어진 최승희 세계일주 공연의 주요 레퍼토리로도 자주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미루어보면, 최승희는 이들 영화를 통해 자신의 주요 무용 작품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려고 했음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영화의 필름이 현재까지 어딘가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지만, 만약 이들이 발견된다면 최승희의 작품세계를 기록한 소중한 영상자료로 막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다음 글에서는 1930년대 최승희의 음반 녹음과 그녀가 공연에서 사용했던 반주음악과 관련된 몇 가지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글·사진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


 

[사진1] 미국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 1937년 12월 22일자에 수록된 최승희의 무용 사진. 콜럼비아사 제작의 휴대용 축음기(유성기)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2] 2016년 일본 야후 옥션에서 681,000엔의 가격에 낙찰된 <그로테스크> 파테 9.5mm 필름의 일부 사진. 위의 클로즈업 프레임에서 제일 왼쪽에 있는 것이 최승희이다.



[사진3] 최승희 주연의 영화 <대금강산의 노래>의 한 장면(동아일보, 1938.1.26.). 현재까지 알려진 줄거리에 의하면, 금강산 출신의 조선 처녀 이승희(최승희 분)가 일본에 건너가 무용을 배우기 위해 완고한 아버지 이대원(코노 켄지(河野憲治) 분)을 설득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사진4] 최승희 주연의 영화 <대금강산의 노래>의 한 장면(동아일보, 1938.1.28.). 현재까지 알려진 줄거리에 의하면, 금강산 출신의 조선 처녀 이승희와 그녀의 연인 토모다(카사하라 츠네히코(笠原恒彦) 분)가 금강산을 배경으로 하고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으로 보인다. 토모다 역을 맡은 카사하라 츠네히코는 본래 메이지대학 럭비선수 출신으로 당시 막 영화계에 데뷔한 신인 배우였다.

 

[사진5]“최승희 여사의 무용적 육체미”를 선전하는 최승희 주연의 영화 <대금강산의 노래>의 한 장면(동아일보, 1938.2.1.). 현재까지 알려진 줄거리에 의하면,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진 이승희에게 무용 스승인 키시이(에가와 우레오(江川宇礼雄) 분)가 찾아와 예술의 불멸성을 설명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1) 石井漠舞踊研究所 文藝部 編, 『漠のパンフレット第一輯』 (東京: 石井漠舞踊研究所, 昭和 2(1927)), p.7. 참조.

2) 2021년 7월 22일 필자가 우연한 경로로 확인하였으며, 그 후 니이가타 지역영상 아카이브 측과 메일을 주고받아 2022년 1월 19일 정식으로 디지털 변환 파일을 입수하였다.

3) 日本洋舞史研究会 編, 『日本洋舞史年表 1』 (東京: 日本芸術文化振興会, 2003). 

4) 필자가 2019년에 미국의 모 개인수집가를 통해 입수한 디지털 영상으로, 원본은 16밀리 흑백 무성 필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까지 정확한 내용과 소장처 등의 구체적인 서지사항을 확인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고증은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이 필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졸고, 「근대 비문자 대중매체와 한국무용: 1930-1960년대 유성기음반과 영화를 중심으로」, 『무용역사기록학』 58, 무용역사기록학회, 2020. pp.155-156. 참조.

5) “半島舞姬 崔承喜 主演 大金剛山の譜 (광고),” <동아일보> (1938.1.29.), 2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