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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9) 영상과 음향으로 만나는 최승희(2)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최승희는 일제강점기 조선 출신의 여성으로는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이렇게 1930년대에 이르러 최승희의 인지도가 점차 확고해지면서, 그의 무용을 담은 영화/영상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음악을 담은 음반들 역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승희의 경우는 배구자와 마찬가지로 2장(4곡)의 음반을 스스로 녹음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일본 콜럼비아라는 음반사의 전속가수가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이는 물론 유명인 Celebrity의 육성을 직접 듣고 싶어 했던 대중의 욕망에 호응하는 부분 역시 큰 부분을 차지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미 20세기 초부터 일본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무용가들이 음반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동했던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동이었다.

 

특히 초기 한국 무용과 유성기음반 간의 접점을 고려함에 있어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유성기음반이라는 그 매체 자체의 성격이다. 즉, 녹음된 연주로서의 유성기음반이 지닌 반복성과 정형성은 근대 무대예술로서 정립되어가던 한국무용의 성립 과정에서 반주음악으로 이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이미 1927년 10월 경성 장곡천정(長谷川町) 공회당과 우미관(優美館)에서 이시이 바쿠가 제자 최승희 등과 함께 조선에서 두 번째로 무용 리사이틀을 가졌을 때에도 일본 닛토(日東)레코드 조선영업소(제비표조선레코드)가 사보(社報)인 『일동타임쓰』의 명의로 이시이 일행에게 꽃다발을 비롯한 사은품을 증정했다는 기록1)이 있고, 다시 이듬해 10월에 열린 이시이 일행의 제3회 조선 공연 당시에도 전기축음기로 무용 반주음악을 재생했다는 기록​2)이 있어 최승희 역시 축음기를 활용한 음악 반주, 즉 유성기음반의 사용을 보편적인 일로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최승희가 정식으로 음반사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1936년 3월 그가 정식으로 일본 콜럼비아사의 전속가수로 입사 계약을 맺은 때 부터였다.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로 콜럼비아사에 입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미 1934년 9월 20일에 도쿄에서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 주최로 개최된 최승희 제1회 무용발표회 공연 당시에 콜럼비아사 도쿄 긴자(銀座) 지점이 후원을 했던 사실이 있음을 미루어보면 최승희가 일찍부터 콜럼비아사와 연고를 맺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1936년 4월 개봉한 최승희 주연의 영화 <반도의 무희(半島の舞姬)>를 제작할 당시, 그 제작사였던 일본 신코키네마주식회사(新興キネマ株式會社)가 <반도의 무희>의 영화음악을 1930년대 초부터 콜럼비아의 전속 작곡가 및 편곡자로 일한 니키 다키오(仁木他喜雄, 1901-1958)와 작사가 사이조 야소(西條八十, 1892-1980) 등에게 맡겼던 것을 감안해 볼 때, 최승희의 콜럼비아 전속계약은 영화 <반도의 무희> 제작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사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속계약을 맺은 직후 최승희는 일본 콜럼비아에서 일본보 1매(Columbia 28846)와 조선보 1매(Columbia 40704), 총 2매(4면)의 음반을 정식으로 취입하였다. 일본보 음반은 1936년 3월 19일과 3월 31일에 취입3)되어 그해 5월에 발매되었으며, 조선보 음반은 일본보 음반이 취입된 지 약 3개월 뒤인 1936년 6월 23일과 24일 양일에 걸쳐 녹음​4)되어 그해 9월에 발매되었다. 일본보 음반에는 영화 <반도의 무희>의 삽입곡인 <축제의 밤(祭の夜)>(니키 다키오 작곡, 사이조 야소 작사)과 <향수의 무희(鄕愁の舞姬)>가 수록​5)되어 있다. 이 가운데 <향수의 무희>는 최승희의 자작곡(사이조 야소 작사)으로 명기되어 있다.

 

한편 조선보 음반에는 <향수의 무희>의 조선어판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한 대중음악 작곡가 랄프 에르윈(Ralph Erwin, 1896-1943)이 작곡한 탱고곡 <이태리의 정원(A Garden in Italy)>의 번안곡이 수록6)되어 있다. 두 곡의 가사는 모두 당시 콜럼비아사의 조선 문예부장으로 재직하던 이하윤(異河潤, 1906-1974)이 작사하였다. 최승희의 콜럼비아 전속가수 입사는 당시의 국내 언론에서도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의 반응은 다음의 신문기사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崔承喜 女士 레코-드 吹入: 최승희(崔承喜) 녀사가 『코럼비아』 회사의 전속가수 (專屬歌手)로 입사, 『레코-드』로 『데뷰-』하게 되엿다한다. 처녀취입(處女吹入)의 『향수(鄕愁)』 - 다년의 희망이 실현된 것으로 『속된 『쟈즈』 곡(曲)을 『ᄲᅩ이콧』 하고 민족적 정취(民族的 情趣)의 노래를 부르겟다』고 대단한 긔염이다.7)

 

(전략) 더욱이 그는 이번에 『콜럼비아』 레코-트 회사에 전속가수(專屬歌手)로 입사하야 유행가(流行歌)와 『짜스』를 떠나서 조선의 정서(情緖)가 넘쳐흐르는 노래를 취입하기로 되었다한다(사진은 최 여사).8)

이처럼 최승희의 자작곡인 <향수의 무희>는 최승희 자신이 생각했던 조선의 정서를 반영하고자 한 곡으로 기획, 창작되었고, 일반적인 유행가와는 차이를 두고 최승희 자신의 자의식을 반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곡이 일본어와 조선어로 같이 발매되었던 것 역시 이러한 당초의 기획 의도가 일정 수준 이상 반영되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축제의 밤>은 이와는 달리 밝고 쾌활한 느낌의 곡으로, 한국의 민요(신민요)를 연상시키는 곡이다. 당시 신문기사에서 “조선의 정서가 넘쳐흐르는 노래”, “민족적 정취의 노래”로 지목된 것은 아마도 이 곡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일본인 작사자와 작곡자가 작곡한 곡을 조선의 정서가 넘쳐흐르는 노래라고 지목한 것은 1930년대 일본 지식인들에 의해 규정된 “조선 정조”, “조선색” 등 식민지에 대한 이국성(Exoticness)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어 다소 씁쓸한 느낌을 준다. 

 

한편 <이태리의 정원>은 당시 유럽과 일본에서 인기가 매우 높던 곡​9)이자 당시로서는 아직 조선에서는 생소하였던 탱고 음악이었다. 이 곡을 최승희의 조선 데뷔곡으로 선정한 것은 문예부장 이하윤의 결정이었음이 거의 확실한데, 탱고라는 음악이 본질적으로 춤의 반주음악으로 출발했고 당대까지도 춤과 강하게 결부된 음악으로 인식되던 것을 생각해볼 때 이는 당시 명실공히 한국 신무용의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던 최승희의 지위를 잘 반영하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하윤은 일본 호세이대학(法政大學) 문학과를 졸업한 뒤 1920년대 말부터 시작(詩作)과 외국문학 번역 활동, 그리고 언론계 활동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콜럼비아사의 문예부장으로 입사하기 직전까지는 경성방송국의 편성계(編成界)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즉 이하윤은 당대 한국의 문화적 현실 및 “한국성”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서구의 근대 문화요소를 수용하며 당대의 문화생산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던 이하윤이 당시 일본을 넘어 서서히 세계적인 무용가로 발돋움하고 있던 최승희에게 걸맞는 노래로 <이태리의 정원>을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Columbia28846-A-郷愁の舞姫(향수의무희)-최승희 

 

Columbia28846-B-祭の夜(축제의밤)-최승희 

 

Columbia40704-A-향수의무희-최승희 

 

Columbia40704-B-이태리의정원-최승희 

 

그러나 당시 이처럼 최승희의 음반 제작이 당대 사람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던 것에 비해 실제 음반의 판매는 저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일본어 음반의 경우 약 10개월가량 판매된 뒤 1937년 3월에 판매가 중지되었고, 조선어 음반의 경우 1936년 11월까지 광고가 나온 뒤 그 이후로 추가 광고를 확인할 수 없어, 발매 직후부터 판매가 저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의 음반이 상업적으로 부진했던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이 노래들의 대부분이 소개되었던 영화 <반도의 무희>가 비평과 흥행면 모두에서 참패를 맛본 것이 한 이유일 것이며, 또한 나아가서는 이미 1930년대 중반 세련된 창법으로 인기를 끌던 여성 유행가수들에 비해 최승희의 노래 실력은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축제의 밤>의 경우, 음반 녹음 당시의 기술적인 문제로 녹음의 후반부 음질이 급격히 열화되는 현상10)이 나타나는데, 이를 다시 재녹음하거나 다른 곡으로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발매했다는 점에서 애초에 최승희 자신이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 자체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상업적인 결과가 어찌 되었든, 최승희가 전속계약으로 정식으로 콜럼비아사에 입사한 것은 콜럼비아와 최승희 양쪽 모두에게 이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콜럼비아는 당시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던 최승희를 자사 음반 및 축음기의 광고 모델로 활용할 수 있었고, 최승희 역시 전속계약 가수로서 (실제 음반 제작이나 가수 활동은 둘째 치더라도) 꾸준히 월급과 음반판매 수입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보다 약간 앞선 시기에 이루어졌던 배구자의 음반 녹음이 단발성/일회성 이벤트에 그친 것과는 대조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1936년부터 1938년 사이 콜럼비아는 계속해서 최승희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며 자사의 축음기와 음반 등 제품 홍보에 여러 차례 등장시켰으며, 최승희의 무용발표회 등 활동에도 계속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이는 물론 그가 1930년대 후반 이후 전세계를 무대로 공연 활동을 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자신의 가극단에서 연주했던 실제 곡들을 음반으로 녹음했던 배구자와는 달리, 최승희의 경우 자신의 실제 무용공연에서 사용하였던 음악을 상업적인 음반으로 만들었던 기록은 별도로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번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여러 논자들이 제기한 바 있는 “반주음악 음반”과 관련된 기록이다. 즉 최승희가 1938년 세계 투어에 오르기 직전, 일본 음반사를 통해 자신이 공연에서 활용할 각종 음악을 미리 음반의 형태로 녹음해 가서 이를 투어에서 각 공연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1990년대에 정병호가 처음 그의 저서 『춤추는 최승희』에서 일본과 한국 측의 여러 증언들을 종합하여 처음으로 주장​11)하였고, 그 이후 이왕직아악부 출신으로 해방 후 정악계와 궁중무용계를 이끈 거목인 심소 김천흥(金千興, 1909-2007) 등도 비슷한 요지로 자신들이 참여하여 최승희의 반주음악용 음반을 제작했다는 증언을 남긴 바 있다. 

 

이후 지금까지 간간히 그 실체를 규명하려는 시도​12)가 여러 차례 이루어진 바 있지만, 지금까지 그 정확한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실재 여부 역시 제대로 고증된 바 없었다. 앞서 말했듯 20세기 초부터 레코드음악이 무용 공연에서 무대음악으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며, 최승희 자신 역시 음반을 활용한 공연을 자주 펼쳤다는 사실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최승희의 해외 공연을 보도한 여러 보도에서는 “조선춤의 반주에는 (…) 레코드도 써보았습니다만 아무래도 정말 사람이 나와서 연주하는 것만큼은 못 합니다”는 최승희 자신의 발언13)을 제외하고는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필자는 지난 2019년 10월 15일 뉴욕공립도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옛 솔 휴록 에이전시(Sol Hurok Agency)사의 아티스트 파일에 들어있는 최승희의 매니지먼트 파일과, 이와 함께 붙어있는 미국 신문 및 잡지 등의 당대 공연평 등 자료를 통해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의 여러 공연평과 휴록 에이전시에서 발표한 공연 매니지먼트 문서와 공연 프로그램, 그리고 언론 보도자료 등에 따르면, 1938년부터 최승희가 미국에서 선보였던 총 26개의 춤 레퍼토리 가운데 피아니스트 이광준(李光俊)과 남편 안막이 북 반주를 맡은 곡 6개​14) (천하대장군, 오리엔탈 리듬, 고구려의 무사 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조선아악(Korean court music) 6종과 전통 민간기악(Classical Korean instrumentals) 4종, 그리고 민요(Korean folk songs) 9종을 반주음악으로 사용하였고, 공연에서는 사전에 한국에서 한국인 악사들에 의해 녹음한 음반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조선 아악과 민간 기악(삼현육각 등), 그리고 민요 등을 녹음했다는 것은 기존에 알려져 있었던 증언들의 내용과도 상당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음반들이 과연 언제, 누구에 의해 녹음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음반의 실물이나 음원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확실히 규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몇 가지 단서가 있다. 먼저 최승희가 영화 <대금강산의 노래>를 촬영하고 있던 1937년 2월 19일자 『조선신문』에는 이 영화의 제작을 위해 이왕직아악부원 이종대(李鍾大)와 이기영 (李基永), 홍난파, 그리고 최승일 등이 모여 조선아악에 기초한 영화음악을 작곡15)하고 이를 취입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에서 이종대라고 쓴 인물은 정황상 이왕직아악부의 음악 촉탁으로 근무했던 이종태(李鍾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토대로 보면 1937년 무렵에는 이미 최승희가 이왕직아악부 관계 인사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계기로 하여 추후 공연에 활용할 유성기음반을 특별 제작하는 것에도 이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의 레코드 회사의 경우 대개 전속가수 계약을 만 2년으로 계약하는 것이 대부분16)이었다. 최승희의 경우도 1936년 3월에 정식으로 일본 콜럼비아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최승희 역시 1938년 3월까지 계속해서 전속계약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최승희가 1937년 12월 28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출발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최승희의 공연 반주음악을 담은 음반의 제작 역시 <대금강산의 노래>가 제작 중이던 1937년 2월에서부터 그녀가 일본을 떠난 1937년 12월 사이의 어느 시점에 아마도 최승희가 전속으로 있던 콜럼비아사에 의해 특별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콜럼비아사는 이미 미국 본사에서도 1900년대부터 주문제작 형태의 사제반(私製盤)을 제작하는 서비스를 제공했고 일본에서도 1930년대 초부터 이렇게 제작된 주문제작 음반이 적지 않게 발매되었는데, 이 음반 역시 그러한 형태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음반들은 판매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음반이 아닌 만큼 처음부터 극소수가 제작(프레스)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실물이나 원반 (마스터), 혹은 관련 기록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 음반의 일부 혹은 전량이 어디에선가 발견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일제강점기 신무용의 음악적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될 것임이 명백하다고 하겠다.

 

여담으로, 일각에서는 1933년을 전후하여 일본 타이헤이 (태평) 레코드에서 신민요와 코미디 희극 등 약 6장(12면)의 유성기음반을 녹음한 최승이(崔承伊)가 최승희의 가명이라는 주장17)을 펼치며, 그 근거로 최근에 엉터리 과학자로 판명된 자칭 “소리 전문가” 숭실대 배명진 교수의 “분석”까지 인용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으로, 최승이는 1960년대까지 여러 크고 작은 극단에서 가수와 배우 활동을 겸하며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최승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별개의 인물임이 명백하다.

 

 

글·자료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

 

* 최승희 음반의 음원 4곡은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소장, Columbia 28846 음반의 사진은 고음반수집가 이경호 씨가 제공하였다. 자료 공유에 감사드린다. 

 

 

 

 

 

[사진1]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일본 콜럼비아 레코드 사가 최승희를 기용해 제작한 축음기 광고의 예.

 

 

 

 

[사진2] 최승희 노래 <이태리의 정원> 가사지_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소장

 

 

 

[사진3] 최승희 노래 <이태리의 정원> 가사지_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소장

 

 

 

1) “日東타임쓰 花束 寄贈”, 『매일신보』 (1927.10.28.).

2) 趙容萬, 宋敏鎬, 朴炳采, 『日帝下의 文化運動史』 (서울: 민중서림, 1970), 169쪽. 

3) 일본 콜럼비아사에 보존되어 있는 녹음대장(錄音臺帳)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확인해주신 일본의 음반연구가 모리 마사토(毛利眞人) 씨에게 감사를 전한다. 

4)  최승희의 조선보 음반 녹음일자는 현재 일본 콜럼비아사에 보존되어있는 조선음반 녹음대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2015년에 일본에서 직접 이 자료를 확인한 최혜은 선생(Assistant Professor Faculty Fellow of Korean Language and Culture, New York University-Shanghai)의 도움으로 확인하였다. 중요한 자료의 제공에 감사드린다. 

5) Columbia 28846-A (1201438) 流行歌 新興キネマ映畵 「半島の舞姬」 主題歌 鄕愁の舞姬 西條八十作詩 崔承喜作曲並編曲 崔承喜 コロムビアオーケストラ 伴奏 (1936.3.19. 녹음. 1936.5. 발매).Columbia 28846-B (2201479) 流行歌 祭の夜 西條八十作詩 仁木他喜雄作曲並編曲 崔承喜 コロムビアオーケストラ 伴奏 (1936.3.19. 녹음. 1936.5. 발매).

6) Columbia 40704-A (122408) ᄶᅢ즈쏭 伊太利의庭園 異河潤作詩 에르윈作曲 仁木他喜雄編曲 崔承喜 伴奏日本콜럼비아탕고밴드 (1936.6.24. 녹음, 1936.9. 발매).Columbia 40704-B (222407) ᄶᅢ즈쏭 鄕愁의舞姬 異河潤作詩 崔承喜作曲 仁木他喜雄編曲 崔承喜 伴奏日本콜럼비아ᄶᅢ즈밴드 (1936.6.23. 녹음, 1936.9. 발매).

7) “崔承喜 女士 레코-드 吹入”, 『매일신보』 (1936.3.20.).

8)  "半島의 봄을 裝飾할 崔承喜 舞踊公演 - 4월 3,4일 府民館에서", 『조선중앙일보』 (1936.3.31.)

9) 국내와 일본에서는 영국의 재즈악단인 빌리 코튼(Billy Cotton) 악단이 1933년에 녹음한 연주 (https://youtu.be/Jm0mOcAKtm4)가 인기를 끌었고, 일본에서도 번안곡이 나왔다. 또 1950년대에는 가수 명국환의 노래로 다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10) 음반 녹음(커팅)이 되고 있을때 왁스원반이 녹음 과정에서 식어버려 녹음 커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고음역대에 잡음이 발생하는 이른바 콜드 왁스 채터(Cold wax chatter) 현상이다.

11)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세계를 휘어잡은 조선 여자』 (서울: 뿌리깊은나무, 1995), pp.132-133. 참조.

12) 지난 2011년 11월 일본 킹 레코드와 코리아아트센터(KAC)의 공동 기획인 “20세기 조선반도출신 음악가 시리즈”의 일환으로 발매된 DVD+CD 콤보 앨범인 <최승희의 무용세계(崔承喜の舞踊世界)>와 <최승희의 노래와 무용음악(崔承喜の歌と舞踊音楽)> (ISBN: 4-909346-004528)에는 전술한 콜럼비아 음반 중 3면의 음원(한국어판 <향수의 무희> 제외)과 함께 총 12곡의 최승희 무용음악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 CD에 수록된 음원은 최승희가 1930년대 공연에서 사용한 실제 반주음악 음반의 원본이 아니라, 1950년대 말 혹은 1960년대 초에 북한에서 제작한 서지정보 미상의 LP음반에 수록한 후대의 재구성/재녹음한 음원으로 자료적 가치가 크게 떨어질 뿐 아니라 최승희와의 실질적인 연관성 역시 미약한 자료로 보인다.

13) “아메리카의 봄舞臺에 춤추는 朝鮮!”, 『조선일보』 (1940.1.27.).

14) 최승희의 미국 공연과 관련된 당대의 기록에서 안막은 본명인 안필승(安弼承)의 일본식 독음인 ‘안 히츠쇼(Hitsusho An)’ 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공연 전체기간에 걸쳐 타악기 연주자(Percussionist)로 소개되었다. 

15) “金剛山の舞踊化, 朝鮮の雅樂を取入れ靈峰の神祕を表現!”, 『朝鮮新聞』 (1937.2.19.).

16) 당대 이를 자세히 설명한 기사로, “歌手 蔡奎燁 콜럼비아 復歸”, 『조선일보』 (1936.3.27.).

17) 예컨대 다음과 같은 2007년 8월 22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를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