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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10) 영상과 음향으로 만나는 최승희(3)

다시 말하지만, 최승희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리며 다양한 매체에 의해 주목을 받은 지극히 드문 인물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남성 연예인이나 배우들은 물론이고, 여성으로는 몇몇의 기생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현대적인 의미의 ‘유명인(Celebrity)’이 거의 없던 시절 최승희는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 등지에 이르기까지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감과 이미지를 강하게 각인시켰다. 이는 물론 당시 선구적인 무용가로서 최승희가 가지고 있던 세계적 위상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세련된 외모와 차림새를 담은 수많은 사진들이 배포되고 유통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최승희의 일대기와 역사적 유산을 다룬 수많은 학술서와 논문, 대중서는 물론 인터넷 등지에서도 최승희를 담은 사진은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여느 사진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사진들 중 거의 대부분은 그 명확한 출처나 사진 촬영시기, 사진 촬영자에 대한 고증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마구잡이로 유통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최승희가 선보였던 특정 무용 작품이나 그녀의 의상을 기록하고 있는 사진들의 경우, 잘못된 출전 혹은 연대 고증이 제멋대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그녀의 작품 연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데 있어서도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최승희 관련 사진자료들 가운데 1945년 이전에 촬영된 것이 명백한 자료들 위주로, 이들 중 자료적 가치가 높은 자료들 몇 개를 골라 촬영 시기와 내용을 구체적으로 고증, 소개하고자 한다.


이미 1926년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들어갔을 때부터 최승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언론과 그 밖의 다른 매체를 통해 소소히 유통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최승희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최승희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서 탈퇴한 뒤 조선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온 1932년 무렵부터였다. 이 시기에는 최승희가 일본 무용계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언론에도 자주 모습을 드러내었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 독자적인 무용발표회도 여러 차례 올리며 꾸준히 새로운 작품을 개발하며 이를 홍보/기록하기 위한 여러 사진을 촬영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설 무렵의 최승희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30년 경에 최승희가 경성에서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던 시절 동아일보 사진부장을 지냈던 한국 최초의 전업 사진가 신낙균(申樂均, 1899–1955)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진 <최승희의 초상>[사진1]과, 193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사진작가였던 호리노 마사오(堀野正雄, 1907–1998)가 1932년 3월에 촬영​1)한 <포즈>[사진2]이다. 전자는 스승 이시이로부터 독립하여 처음으로 무용가로서의 출발하던 만 19세 때의 모습, 후자는 이미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조숙한 무용가로서의 만 21세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 동안 일각에서는 후자의 사진이 최승희의 작품 <리릭 포엠(Lyric Poem; 抒情詩)>을 선보일 때의 사진이라는 주장을 편 바 있으나, <리릭 포엠>이 1934년에야 처음 연출되어 1935년부터 최승희의 주요 공연으로 선보였던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실제로 최승희가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사진에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1936년 이후 세계 투어를 준비하며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로 생각되며, 그 이전에 촬영한 사진들은 대부분 특정 무용 작품을 촬영한 것이 아니라 언론 보도 등을 위해 일반적인 무용 포즈를 취한 사진들이거나, 혹은 광고 등에 사용하기 위한 상업사진의 모델로 기용되었을 때의 사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승희의 대외활동이 점차 늘어나면서, 최승희와 그의 오빠 최승일(崔承一), 남편 안막(安漠)은 보도자료 및 기타 출판물에 사용할 최승희의 공식 프로필 및 포트레이트 사진을 일괄로 제작해 꾸준히 제공하였다. 최승희의 사진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프로필 사진들[사진3, 4]이 바로 이 시기에 촬영된 것으로, 1933년 하반기​2)에 일본 도쿄의 칸다(神田)에 있던 초상사진 전문 업체인 나고시 사진관(名越寫眞館)에서 처음 촬영된 뒤 1930년대 내내 최승희의 ‘표준적’인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당시 촬영된 최승희의 사진들 중 일부, 특히 당시로서는 센세이션이었던 반나체(半裸體; Semi-nude) 프로필 사진 중 일부[사진5]는 한때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조각가 및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경성의 유명한 카페 낙랑파라의 주인이기도 했던 이순석(李舜石, 1905-1986)이 자신이 촬영한 것이라고 주장​3)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간혹 유명인의 사진 이용권이나 초상권을 놓고 법적 논쟁이 벌어지는 것과 유사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승희의 작품이나 무용 공연 모습이 본격적으로 촬영되기 시작한 것은 앞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승희가 해외 순회공연을 준비하던 1936년을 전후해서였다. 최승희의 포트폴리오 사진으로 가장 처음 촬영된 것은 1936년 11월에 촬영된 약 10여 매의 사진들4)로, 검은색 무용복 차림에 얇은 베일을 든 최승희가 늦가을 들판을 배경으로 자유롭게 포즈를 취한 모습을 촬영한 것들이다. 이 가운데 최승희가 높이 도약하는 사진[사진6]은 <적구흔무(赤丘欣舞)>라는 이름의 별도의 작품사진으로 자주 소개되기도 했다. 


이 사진들은 1930년대 초부터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板朝日新聞)이 발행하던 사진잡지 주간 <아사히그라프(アサヒグラフ)>와 월간 <아사히카메라(アサヒカメラ)>를 중심으로 작품사진을 발표해왔던 일본의 사진작가 야스코치 지이치로(安河内 治一郎. 1883–1968)5)가 촬영한 것이다. 야스코치 지이치로는 최승희와 상당히 오랫동안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이 사진 이외에도 피아노를 배경으로 하여 최승희와 남편 안막, 그리고 딸 안성희가 포즈를 취한 최승희의 가족사진[사진7]과, 최승희의 <학춤> 사진으로 알려진 사진([사진8], <아사히카메라> 1937년 1월 게재) 등을 찍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또한 역시 <아사히카메라>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또 다른 일본인 사진작가인 후쿠다 카츠지(福田勝治, 1899–1991) 역시 1936년 말 혹은 1937년 초 무렵 최승희의 포트폴리오 사진 일부를 촬영했는데, <장구춤>[사진9]과 <신라 궁녀의 춤>[사진10]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진들의 경우 아마 최승희 자신, 혹은 관련 인물들에 의해 그 사진들의 유리원판 원본이 일찌감치 국내로 유입되어 최근까지 보존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6)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개별 작품을 담은 포트폴리오 사진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진들은 그녀가 미국에서 최초의 순회공연을 하던 중이던 1938년에 집중적으로 촬영된 것이다. 이때 최승희의 공식 포트폴리오 사진들은 그녀의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뉴욕의 에이전트 솔 휴록(Sol Hurok)의 기획으로 1938년 초에 주로 제작​7)되었다. 당시 솔 휴록이 최승희의 포트폴리오 사진 촬영을 위해 섭외한 사진사는 일본계 사진사로 주로 루스 세인트데니스(Ruth St. Denis),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등 세계적인 무용가들의 공식 프로필 사진들을 촬영한 쓰나미 소이치(角南壯一, 1885–1971)와,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분위기의 여성 누드와  얼굴 클로즈업 사진을 주로 촬영했던 오스트리아계 사진가 하인리히 알렉산더 폰 베어(Heinrich Alexander von Behr)의 두 사람이었다. 쓰나미가 최승희의 전신을 촬영하는데에 집중했다면, 폰 베어는 최승희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들을 주로 촬영했는데, 이 두 사람이 1938년 2월 6일8) 뉴욕에서 함께 촬영한 최승희의 보살춤 사진[사진11, 12]이 이들 사진사들의 작품 경향을 잘 보여준다.


한편 같은 날 폰 베어가 촬영한 다른 최승희 보살춤 전신사진[사진13]의 경우, 쓰나미가 찍은 사진보다 훨씬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사진 자체가 전반적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로 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휴록 아티스트 파일에 의하면 이 사진은 미국 이외의 지역, 즉 미국에 비해 여성의 신체 노출에 좀 더 개방적인 분위기였던 유럽 등지에서 홍보에 사용하기 위해 별도로 기획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1938년 2월 시점에 최승희와 그 일행이 유럽 및 기타 지역에서의 공연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현재 국내외의 여러 문헌자료 및 기타 자료들을 토대로 분석해보면, 최승희를 담은 각종 기록사진 및 보도사진, 그리고 포트폴리오 사진들의 구체적인 촬영시기와 촬영자, 그리고 작품 정보 등을 복원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방 후 최승희의 월북과 숙청, 존재의 의도적인 말소, 그리고 너무나 늦었던 복권 등으로 인해 최승희와 관련된 자료들이 국내에서는 마구 산일되어 버렸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그가 ‘월북예술인’의 그늘에서 해금된 후 그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폭증한 이후에도, 그의 예술세계를 담은 여러 기록들이 일부 호사가들에 의한 수집품으로 전락해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옛 사진자료의 활용이나 그것이 담고 있는 정보를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무감각하고 무지했던 초기 연구자들의 역량 부족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잘못된 정보와 추측만이 난무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들 사진 중 적지 않은 숫자는 사실 2023년 현재에도 저작권이 남아있는 것인데, 그동안 이런 사실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기에 책과 도록은 물론 인터넷 도처에 이들 사진들이 마구 돌아다닌 것 역시 향후 법적인 문제가 될 소지도 있다.


필자 스스로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다른 연구자들 역시 이에 대해서 상당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도 이러한 자료들의 실체와 내용을 복원하여 20세기 전반 한국무용의 아이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최승희의 예술세계가 보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리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사진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


 

 

[사진1] 신낙균, <최승희의 초상>, 1930년경. 사진컬렉션 지평 소장. 

 

 

[사진2] 호리노 마사오, <포즈 (최승희)>, 1932년, 일본 도쿄 도쿄도사진미술관(東京都寫眞美術館) 소장.

 

 

[사진3] 일본 도쿄 칸다의 나고시 사진관(名越寫眞館)이 촬영한 최승희의 공식 프로필 사진과 이 사진의 초기 인쇄본들, 1933년.

 

  

[사진4] 일본 도쿄 칸다의 나고시 사진관(名越寫眞館)이 촬영한 최승희의 공식 프로필 사진 (2), 1933년경.

 

 

[사진5] 일본 도쿄 칸다의 나고시 사진관(名越寫眞館)이 촬영한 최승희의 세미 누드 프로필 사진. 1933년경. 이 사진은 1934년에 조각가 이순석이 자신이 촬영한 사진으로 국내에 소개했으나, 이는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6] 야스코지 지이치로, <적구흔무(赤丘欣舞)>, 1936년. 

 

  

[사진7] 야스코지 지이치로, <최승희 가족사진>, 1935년 2월 24일 일본 도쿄 스기나미구(杉並區) 에이후쿠죠(永福町) 264번지에 있던 최승희의 자택에서 촬영되어 <도쿄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 1935년 2월 26일자 인터뷰 기사에 게재되었다.

 

 

[사진8] 야스코지 지이치로, <최승희의 학춤>, <아사히카메라(アサヒカメラ)> 1937년 1월호 수록. 

 

  

[사진9] 후쿠다 카츠지, <최승희 장구춤>, 1936-1937년경. 필자 소장.

 

 

[사진10] 후쿠다 카츠지, <최승희 신라 궁녀의 춤>, 1936-1937년경, 필자 소장. 

 

 

[사진11] 쓰나미 소이치, <최승희 보살춤>, 1938년 2월 6일 뉴욕 촬영. 

 

 

[사진12] 하인리히 알렉산더 폰 베어, <최승희 보살춤>, 1938년 2월 6일 뉴욕 촬영.

 

  

[사진13] 하인리히 알렉산더 폰 베어, <최승희 보살춤>, 1938년 2월 6일 뉴욕 촬영. 유럽 홍보용으로 별도로 촬영된 사진으로, 최근 미국에서 경매를 통해 거래된 것이다. 
 

1) 일본 도쿄도사진미술관(東京都寫眞美術館)에 소장되어 있는 호리노 마사오의 작업일지 및 일기에 따르면 호리노는 1931년 7월 22일과 1932년 3월 29일 두 차례에 걸쳐 최승희를 모델로 사진을 촬영했다. 현재 호리노가 찍었던 최승희의 사진들로 현존하는 사진들 간에 정확한 편년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1931년 7월 사진이 해변에서의 야외촬영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감안해보면 이 사진은 1932년 3월에 촬영한 것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2) 나고시 사진관의 압인이 찍힌 이들 사진 원본들 가운데 1933년 11월 8일이라는 날짜와 최승희의 자필서명이 들어간 것이 확인된 바 있어, 늦어도 1933년 11월에는 이 사진들이 유통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잡지 <삼천리> 1934년 11월호의 권두화보에 “崔承喜의 ‘빛’”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이 이순석의 명의로 게재되어 있고, 또 이 사진이 실제로 낙랑파라의 입구 벽면에 대형 프린트로 걸려있었다는 증언도 남아있다.

4) 현재 이때 촬영된 사진의 유리원판 5매가 일본 마이니치신문사 사진아카이브에 보존되어 있고, 1930년대의 사진화보 잡지 등의 인쇄본이나 별도의 인화본으로 보존된 사진이 약 7-8매 정도 추가로 확인된다.

5) 이 사진의 촬영자에 대해서는 지난 2010년에 故 박민일 전 강원대학교 국문과 교수가 1970년대의 인쇄본 사진을 토대로 고증한 바 있으나, 사진 촬영자의 이름을 ‘안하내치’로 잘못 소개하여 혼선이 빚어졌다.

6) 필자가 모처에서 받은 전언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까지 인사동의 한 유명한 고미술상에 후쿠다가 촬영한 최승희의 포트폴리오 사진의 유리원판 7장 (대판 1장, 소판 6장)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 유리원판들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현상해 프린트를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도 양호했으나, 2006년경 모 수집가가 거금을 주고 구입한 뒤로는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라고 한다. 필자 역시 1980년대 초반에 이 유리원판에서 인화한 프린트 7장을 직접 소장하고 있다.  

7) 이상의 내용은 필자가 지난 2019년 10월 조사한, 미국 뉴욕공립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 산하 제롬 로빈스 무용자료관(Jerome Robbins Dance Division)에서 소장하고 있는 솔 휴록 에이전시의 최승희 아티스트 파일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이 아티스트 파일에는 최승희의 활동을 기록한 각종 서류 및 신문기사 스크랩, 공연 팸플릿, 각종 계산서 및 청구서, 계약서는 물론, 개별 아티스트의 홍보용으로 사용한 포트폴리오 사진들의 원판 및 아티스트 자필 서명 프린트본이 대부분 남아있어 최승희의 해외 활동 내역을 확인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8) 뉴욕공립도서관 소장 사진 원본에 실린 최승희 자필 서명 및 날짜 기록에 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