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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11) 조택원, 그가 남긴 영상과 음향의 세계(1)

함경남도 함흥에서 명문가의 삼대독자로 태어난 조택원(趙澤元, 1907-1976) [사진1]은 당대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춤의 세계에 매혹되어 1927년 최승희의 뒤를 이어 일본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로 들어갔다. 이후 그는 최승희와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정통 무용가로서 당대 남성 무용가들을 대표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 그는 남한 체제를 선택했지만, 이후 이승만 정권과의 마찰, 한국전쟁, 그리고 사생활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고국에서 활동하지 못하고 미국과 프랑스 등의 타국을 전전하다 타계 직전에야 다시 그 공로를 인정받은 비운을 맛본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조택원은 당대의 대표적인 무용가로 최승희와 쌍벽을 이루었고, 또 당대의 폐쇄적인 젠더 관념 속에서 여성 무용가보다도 더욱 드물었던 남성 무용가라는 점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계속 미디어의 주목을 받아왔다. 오히려 해방 이후 북한 체제를 선택하여 한국에서 기존의 활약상이 의도적으로 말살되고 삭제되었던 최승희와는 달리, 조택원의 경우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공간까지의 활동상을 기록한 극영화 두 편은 말할 것도 없고, 다양한 활동 자료가 국내와 미국 등지에 지금까지도 현존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필자가 확인한 여러 자료들을 소개하고, 이들에 기록된 근대무용가로서의 조택원의 위상을 다시 평가해보고자 한다.


우선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조택원이 출연했던 극영화 두 편으로 현존하는 것이다. 그는 1936년 10월에 개봉한 양주남(梁柱南) 감독의 <미몽(迷夢)>에서 조연을 맡았고, 일제 최말기인 1944년에 제작된 방한준(方漢駿) 감독의 친일 선전영화 <병정님(兵隊さん)>에서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일본군 부대에서의 위문공연을 벌이는 여러 공연예술인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이 두 영화는 해방 이후 오랫동안 실전된 상태였다가, 중국 베이징에 있는 중국의 국가 필름아카이브인 중국전영자료관(中國電影資料館)에서 <미몽>이 2004년에 먼저 발굴되었고, 이후 2006년에는 <병정님>이 차례로 발굴되어 한국영상자료원에 수장되었다.



미몽 (1936) 중 조택원 장면 


먼저 <미몽>에서 조택원은 주인공 애순(문예봉 분)이 선망하는 무용가 박경림으로 등장한다. 애순이 정부(情夫)인 창건(김인규 분)과 함께 무용발표회를 구경하는 장면에서 조택원의 무용 작품 두 편의 면모를 짧게나마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만종(晩鐘)을 보고>의 끝부분1) [사진2]으로, 프랑스 화가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의 그림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조선옷을 의상으로 입고 공연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영상에서는 쇼팽의 야상곡 (夜想曲; Nocturne in E flat major, Op.9-2)의 오케스트라 편곡 음악에 맞추어 공연하고 있다.

이 작품의 바로 다음에는 약 1분여에 걸쳐 당시 조택원의 최신 무용작품이었던 <푸레파레이숀(Preparation)>​2) [사진3]을 담은 영상이 이어진다. 현존하는 일제강점기 시기의 무용 영상들의 대부분이 전통무용이나 이를 재해석한 것, 혹은 일종의 묘사무용인 것에 반해, 이 영상은 비록 길이가 길지는 않지만 보다 추상적인 현대무용에 준하는 형태의 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하다. 또한 현존 필름의 열악한 상태로 인해 음향 상태가 다소 열악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인 무용 작품에 타악기 위주의 무정형적인 음악을 반주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이채롭다.


이후 영화의 후반부에는 다시 연출된 형태로나마 조택원무용연구소의 연습 모습과 무대 뒤의 준비 과정 등이 등장한다. 1930년대의 무용발표회와 그 준비 과정의 면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미몽>의 촬영이 1936년 7월 초 이미 완료​3)되었다는 당대 신문기사의 내용을 고려해보고, 또 당시의 영화 제작 환경에서 별도의 무용 장면을 촬영하기 곤란했을 상황이었음을 감안해보면, 이 영상에 등장하는 조택원의 공연은 1936년 6월 5일 경성 부민관(府民館, 現 서울특별시의회 청사)에서 열렸던 ‘도구(渡歐) 고별 무용발표회’의 일부​4)를 그대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최승희가 세계 순회공연 계획을 발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택원 역시 무용 연구 및 순회공연을 위해 유럽으로 갈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위한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무용발표회와 국내 순회공연 등을 수행했고, 이후 1937년 9월 프랑스를 향해 출발해 그해 11월부터 이듬해인 1938년 9월까지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현지 공연 및 무용 연구를 수행했다.


한편 1944년에 제작된 <병정님>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도서과에서 촉탁으로 일하며 여러 영화의 각본을 쓴 니시키 모토사다(西龜元貞) 각본으로, 일본군 산하 조선군사령부 보도부가 제작한 이른바 ‘국책영화(國策映畵)’이다. 이 영화는 세미-다큐멘터리(Semi-Documentary) 영화의 형식을 갖추었는데, 두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군대 생활을 통해 일본 제국을 위한 충량한 병사로 거듭난다는 내용의 노골적인 친일 선전물이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주인공들이 일등병으로 진급한 이후 부대 내에서 열리는 군인 위문공연 장면인데, 이 위문공연에는 소프라노 마금희(馬琴喜), 일본인 테너 히라마 분쥬(平間文壽),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桂貞植), 일본계 중국 가수 리샹란(李香蘭, 본명 山口淑子) 등과 함께 조택원이 등장하고 있다. 조택원은 이 영화에서 농악을 근대적으로 재해석한 <소고춤>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는 물론 후술하다시피 1950년대까지 조택원이 자신의 대표작품으로 수차례 공연했던 것이었다. 이 역시 1분 남짓의 짧은 장면(필름 손상부 제외)에 불과하지만, 해방 직전 조택원의 무용 기량과 전반적인 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병정님 (1944) 중 조택원 장면 


한편 <병정님>의 위문공연 장면을 포함한 음악 연출은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라는 일본 이름으로도 활동한 작곡가 김준영(金騎泳, 1907-1961)이 맡았다. 그는 1930년대 초반부터 조택원의 <승무의 인상>과 <가사호접> 등의 반주음악을 작곡하는 등5) 조택원과 깊은 협업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그는 1930년대 중반부터 콜럼비아와 폴리돌 등 음반사에서 전속 작곡가 및 문예부장 등을 역임하며 <처녀 총각> 등 신민요와 <홍도야 울지마라> 등의 대중가요를 다량 창작했으며, 1940년에는 영화를 비롯한 각종 흥행업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인 조선예흥사(朝鮮藝興社)를 설립해 그 사장으로 활동하는 등 당대의 주요한 문화 및 미디어 생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처럼 김준영이 작곡했던 여러 곡들, 특히 <처녀 총각> 등의 신민요는 일제강점기는 물론 1960년대 혹은 그 이후까지 계속 내려오며 이른바 “신민요춤”의 반주 음악으로도 자주 활용되는 등 근현대 한국 무용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조택원의 <소고춤>이 일본 제국주의의 선전을 위한 영화인 <병정님>에, 그것도 일본의 전쟁수행을 찬양하고 위문하기 위한 장면에 들어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무용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내용, 그리고 음악 등은 8년 전의 <미몽>에서 선보였던 장면들에 비해 더욱 “조선적(한국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1930년대까지 한국의 문화엘리트들이 추구해왔던 “(한국)민족문화”가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전체주의와 제국주의 분위기가 팽배해진 일본 제국 내에서, 제국의 하위 지방색(Locality)으로서의 “조선문화”로 변질되어 수용, 대중화되기도 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최근 기존에 알려진 조택원의 무용 영상들 이외에도 1940년대와 50년대 해방 공간에서 조택원이 남긴 영상들 수 편을 새롭게 발굴, 고증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글·자료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 역사학)


 

[사진1] 1930년대 중반 한창 활동하던 무렵의 조택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 개인 소장.

 

 

[사진2] 1936년 6월 4일자 <동아일보>에 수록된 조택원의 작품 <만종을 보고> 사진.

 

  

[사진3] 1936년 6월 3일자 <매일신보>에 수록된 조택원의 작품 <푸레파레이숀(Preparation)> 사진. 

 

1) <만종을 보고>의 사진 자료는 <동아일보> (1936.6.4.)에 수록되어 있다.

2) <푸레파레이숀>의 사진 자료는 <매일신보> (1936.6.3.)에 수록되어 있다. 

3) “交通映畵 迷夢”, <조선일보> (1936.7.3.) 

4) “趙澤元 氏 渡歐 告別舞踊 푸로”, <매일신보> (1936.6.3.) 참조. 

5) 이와 관련해서는 “빗다른 軌道, 流動하는 星群 - 趙澤元舞踊硏究所 訪問記”, <朝光> (1935.11.), 112-113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