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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14) 해방 후 필름에 담긴 ‘한국 무용’

주지하다시피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 1950년대까지의 약 10여년은 한국 역사에 있어 해방과 남북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등의 격변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무용을 포함한 한국(남한)에서의 거의 모든 문화생산 활동과 그 대중 보급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제국주의적 식민 통치에서 해방된 신생 국민국가(Nation-state)에서의 국민 정체성 구축을 위한 ‘국민문화’ 혹은 ‘민족문화’의 보급과 창달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좌우 분열과 대립, 그리고 한국전쟁을 통해 표면화된 냉전의 한복판에서 ‘자유진영’의 수장인 미국이 주도하는 문화민주주의 전략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즉 자유진영의 일원인 한국의 문화와 그 가치를 해외에 적극적으로 홍보・선전하여 우방국들로부터의 호응을 이끌어 내고, 이를 통해 그 체제의 우월성을 담보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의 문화생산자들이 문화적・언어적・시공간적 장벽을 뛰어넘어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전파할 수 있는 이상적인 소재로 비문자 대중매체의 생산과 보급에 더욱 주력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 중에서도 인간의 몸을 통해 시각과 청각이라는 원초적인 감각을 기반으로 한 호소성을 가진 무용은 다른 예술분야보다도 더욱 특별한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950년대 이후 한국 무용과 관련된 영상기록은 민간의 극영화보다는 주로 대한민국 정부 국무원 소속 공보국과 주한미국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Korea, 이하 USIS)의 주도로 제작된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의 형태로 제작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그 내용에 있어서는 당시까지도 ‘양춤’으로 홀대되던 서양식 무용보다는 한국 고유의 춤으로 인식된 ‘고전무용, 즉 전통 풍의 ‘한국식’ 현대무용을 담은 영상이 압도적으로 많이 제작되기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 이후 제작된 영상자료들 가운데에는 한국 무용과 관련된 영상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정확한 촬영 맥락이나 연흥자의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울뿐더러 매우 짧은 미편집 상태의 촬영분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대부분이라 이들을 일일이 거론하기나 언급하기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무용과 관련된 해방 후의 영상자료 가운데 그래도 어느 정도의 역사적 맥락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앞서 조택원의 무용영상 자료를 소개하며 언급한 미국문화공보원 제작 기록영화 <한국농촌생활 (Korean Farm Life)>로 보인다. 이 영화는 1947년 9월과 10월에 재미교포 출신의 미국 육군 중위인 이한근(李漢根)의 감독과 연출로 제작, 촬영되어 이듬해인 1948년 2월에 공개된 한국에 대한 홍보영화로서, 영어 내레이션이 삽입된 세미다큐멘터리이다. 이 영화에는 조택원과 김선영의 <춘향조곡> 공연 이외에도, 기생들에 의한 항장무(項莊舞)로 추정되는 공연의 일부와 어느 농촌마을에서 벌어진 농악과 풍물패의 춤 모습이 역시 짧게 담겨있어 자료적 가치가 있다.


한편 해방공간에서 민간에서 제작된 영화(극영화 및 비극영화)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매우 드문데다,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 기록의 미비로 당시의 정확한 제작 혹은 상영환경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최근 확인된 영상자료들 가운데에는 무용과 관련된 상당히 흥미로운 자료들이 몇 건 있어 주목된다. 먼저 2015년 3월 한국영상자료원에 기증되어 최초로 그 내용이 확인된 극영화 <푸른 언덕>(1949)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각종 영화의 지방순회 (가설극장) 상영을 전담하던 업체인 연합영화공사를 운영한 한우섭·한규호 부자의 필름 컬렉션에서 발견된 것으로, 해방 후 제작된 “한국 최초의 음악영화”로 가치가 높다. 안타깝게도 전체 분량의 약 30퍼센트에 불과한 필름 3권 분량 가량(총 36분)만이 열악한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영화의 주연을 맡은 가수 현인의 노래 장면을 포함해 해방 공간에서의 문화계 활동 모습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의 현존하는 부분에서는 1940년대 후반 활동했던 무용가 김애성(金愛聲, 1925년 출생)의 무용 공연 영상을 담은 부분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이 영화에 담긴 무용은 김애성이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1949년 4월 13일과 14일에 공연한 김애성 제1회 무용발표회를 그대로 촬영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신문에 보도된 공연 프로그램을 볼때 영화에 실린 작품은 <숫색씨> 혹은 <여심전심(女心傳心)> 중 하나로 추정된다. 김애성은 일제강점기에는 배구자악극단과 조선악극단 등에서 단원으로 활동하였고, 해방 공간에서는 신예 무용가로 꽤 촉망을 받았던 듯하지만, 1950년 1월에 벌어진 혼전임신 사건과 이에 잇따른 음독자살소동에 따른 스캔들로 인해 무용계에서는 사실상 활동하지 못하게 됐다. 그 이후의 행적은 1950년 5월 4일 대구극장에서 열린 황문평의 청조악극단 공연에서 특별 무용공연으로 출연하려 했다가 관객의 야유로 중단되었다는 기록 이후 확인되지 않는다. 비록 전체 분량이 약 2분 30초 남짓에 불과한 매우 짧은 영상이기는 하지만, 해방 공간에서의 ‘한국무용’ 공연의 실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역사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만한 영상으로는 1947년 8월부터 이듬해인 1948년 7월까지 한국 예술사절단의 일원으로 하와이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안철영(安哲永) 감독이 하와이의 한인 동포들의 삶을 기록하여 제작한 문화영화 <무궁화동산>을 들 수 있다. 당시로서는 최초라고 할 수 있는 칼라 필름으로 제작된 이 영화는 1902년부터 하와이에 정착했던 한인 이주민 사회의 다양한 생활상과 성공 사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의 후반부에는 하와이 한인 3세 소녀들이 추는 훌라춤과 ‘조선춤’을 담은 영상을 소개하고 있다. 우선 훌라춤에 대해서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대단히 아름답고 미묘한 춤으로 각국 소년소녀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소개하였다. 또한 ‘조선춤’에 대해서는 내레이션을 통해 “조선 3세 소년소녀들은 조선의 고전적 춤도 열심히 연구하고 배우고 있다”며, “어머니·아버지들이 고향 조선을 떠날 때에 어렴풋이 머리에 남아있는 기억을 기초로 삼아 옷도 짓고 족두리도 만들어, 유성기판에서 흘러나오는 조선의 음악의 멜로디에 맞추어 창작적인 춤들을 추는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디아스포라(Diaspora) 커뮤니티로서 해외 한인 사회가 ‘재구성’하여 새롭게 전승한 ‘한국 춤’의 초기 실상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시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국전쟁기를 전후한 때부터 1950년대 말까지 한국의 뉴스영화와 문화영화 일반에서 가장 자주 영상에 담겼던 무용가는 최근 세상을 떠난 故 김백봉(1927–2023)이었다.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동서로 일찍부터 무용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해방 이후 최승희를 따라 평양으로 갔으나,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11월 국군의 북진 상황 속에서 남편이자 무용이론가였던 안제승(安濟承, 1922–1996)과 함께 남한으로 귀순하였다. 최승희가 북한으로 가고, 조택원이 미국과 일본 등지를 전전하며 오랫동안 한국에서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면서, 김백봉은 사실상 한국 무용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무용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김백봉의 오랜 무용 공연활동 및 후학 양성의 면면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 다 거론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1950년대의 김백봉은 남한 최고의 무용가였을 뿐 아니라 1950년대 한국 문화 그 자체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는 사실이다. 김백봉은 1953년 서울 종로 낙원동에서 김백봉무용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인 독자적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의 남한 귀순 과정과 활동 초기부터 뚜렷했던 ‘한국무용’에 대한 지향점은 점차 그가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자유를 찾아온 당대 최고의 민족예술인이라는 인식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당대의 언론이 표현한 것처럼 김백봉은 북한을 선택한 “태반의 무용인”들과 “많은 환율로 교환된 반공무용인”으로 주목받게 되었고, 그의 예술활동은 그 자체로서 한국 정부와 USIS에 의한 문화공보 및 홍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현존하는 1950년대 김백봉의 무용을 기록한 영상들의 면면과 관련 자료들을 좀더 꼼꼼히 살펴보고, 이들 자료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와 위상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해보고자 한다.



글·사진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역사학)


  

 

[사진1] 1948년 미국 공보원이 제작한 기록영화 <한국농촌생활>에 등장하는 항장무(項莊舞) 공연 모습.

 

 

[사진2] 1949년 영화 <푸른 언덕> 에 등장하는 무용가 김애성의 공연모습.

 

 

[사진3] 1948년 기록영화 <무궁화 동산>에 등장하는 하와이 한인 3세 소녀들의 훌라춤 공연.

 

 

[사진4] 1948년 기록영화 <무궁화 동산>에 등장하는 하와이 한인 3세 소녀들의 ‘조선춤’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