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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디어 속의 한국무용(17) 영상과 음향자료 속의 봉산탈춤(1)

지난 2022년 11월 30일, 유네스코 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는 모로코 라바트에서 열린 제 17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 회의를 통해 ‘한국의 탈춤(Talchum, Mask Dance Drama in the Republic of Korea)’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는 총 22종목의 인류무형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렇게 지정된 탈춤 종목은 국가무형문화재와 시도무형문화재 종목을 포함해 총 18종에 달한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탈춤으로 사람들의 머리에 가장 잘 떠오르는 것은 물론 이른바 ‘현존 최고(最古)의 탈춤’이라는 안동 하회 별신굿탈놀이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학계에 잘 알려진 것처럼, 하회 별신굿 탈놀이는 1928년에 마지막으로 연행된 뒤 오랫동안 전승이 끊어진 상태였던 것을 후대에 마을 주민들의 증언과 기억, 그리고 인근 지방의 여러 탈놀이들을 토대로 하여 재구성하고 복원하여 1978년 10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정식으로 첫 선을 보인 것이 현재에 이르는 것이기에, 그 공연의 내용과 진정성에 대해서는 그간 수차례 논란과 문제제기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하회 별신굿 탈놀이가 한국을 대표하는 탈춤으로 인식되기 전까지, 한국에서 오랫동안 탈춤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탈춤은 바로 황해도 봉산군에서 전승되어오던 봉산탈춤이었다. 이 글에서는 1930년대 중반에 대대적으로 홍보되면서 1970년대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가면극으로 소개되었던 봉산탈춤을 기록한 여러 영상과 음향자료들을 간략히 살펴보는 첫 순서로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기록영상 자료와 음반 자료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의 풍속과 문화, 특히 민중/민족문화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이 증대된 192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인 및 조선인 민속학자들은 조선 전국 각지에 남아있는 여러 농촌의 ‘오락’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경우는 조선인의 민족성과 민중의 성격을 탐구하겠다는 뜻에서 이를 연구한 것이었고, 조선인들의 경우는 일본이나 중국의 민중예술에 버금가는 조선인 고유의 민중예술의 존재를 검증하고 이를 소개하고자 하는 이른바 “민족적 동기”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의미에서 1930년대에 들어 여러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조선의 전통 민속놀이를 연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때 처음으로 각 지방에 전승되어 내려오던 각종 ‘가면극’, 즉 탈춤과 관련된 자료가 본격적으로 수집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수집된 탈춤과 관련된 자료의 대부분은 몇 건의 사진 촬영이나 간략한 신문보도 혹은 2-3페이지의 소논문 정도로 정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이미 전승을 위한 경제적, 사회적 제반조건이 지극히 악화되어가고 있던 대부분의 탈춤들은 공연조차도 제대로 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에 비해 1910년대 이후 군청이 소재하고 있던 사리원의 경암루(景岩樓) 아래 광장에서 지역 사회의 금전적 지원과 관심을 계속해서 받으며 매년마다 꾸준히 연행되어 오던 봉산탈춤은, 전통 탈춤의 구성과 내용을 연구하고자 했던 당시의 여러 학자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접근성’이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봉산탈춤을 비롯한 당대 탈춤에 대한 관심의 한 구석에는 씁쓸하게도 일제 식민지 당국의 식민정책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즉 1930년대 중반 이후 일제 당국은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총독이 내건 이른바 “심전개발(心田開發)” 운동을 통해 조선 전역의 다양한 “향토의 건전한 오락”을 장려하고, 또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위한 여러 캠페인들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농촌의 건전한 심리”와 “민중의 건강한 재미”를 보여주는 다양한 전통 공연들, 특히 탈춤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내세우고 있던 정책과도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36년 8월 31일(백중)에 경암루 앞 광장에서 열린 봉산탈춤 공연은 그 때까지 지역의 향토문화에 불과했던 봉산탈춤을 처음으로 조선 전역에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봉산과 사리원 주민 2,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펼쳐진 이 공연에는 당시 조선인 민속학 연구의 대가였던 송석하(宋錫夏, 1904-1948)와, 일본인으로 조선의 풍속과 관습을 오랫동안 연구해오며 식민 당국에 조선인의 풍속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그리고 오청(吳晴)과 임석재(任晳宰, 1903-1998) 등 당시 막 조선 민속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한 이들이 모두 모였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다양한 채록본을 제작하였는데, 이들 중 송석하와 오청의 채록본은 이후 1960년대와 70년대에 봉산탈춤의 연흥 내용들이 책으로 정리될 때 그 핵심 텍스트 중 하나로 사용되면서 지금까지도 봉산탈춤의 원형 연구에 가장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봉산탈춤을 전 조선에 알린 가장 중요한 계기는 바로 당대의 다양한 시청각 미디어, 즉 방송과 영상을 통해서였다. 즉 이날의 이 공연은 경성방송국(JODK)에서 급파한 현장중계팀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 및 조선일보가 파견한 영화 촬영반에 의해 기록영화로 제작되어 공개되기도 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당시의 공연을 담은 방송녹음이나 공식 기록영화는 이미 실전된 지 오래이지만, 당시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조류 연구를 위해 체류하고 있던 스웨덴의 박물학자 스탠 베리만(Sten Bergman, 1895-1975)이 당시 조류의 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가져왔던 16밀리 영화카메라로 봉산탈춤의 공연 모습을 촬영한 것이 지금까지 남아있어 그 때의 현장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이때 베리만이 찍어간 필름은 1969년에 임석재가 스웨덴에서 복사해 가져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뒤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그 일부가 여러 차례 공개된 바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영상의 전체 내용은 물론, 구체적인 보존 상태 역시 제대로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본격적으로 조선 전역에 걸쳐 소개된 봉산탈춤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언론과 미디어의 관심을 타고 더욱 본격적으로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는 당시 조선민속학회의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송석하의 역할이 컸는데, 그는 “문화유산을 재음미하고 향토예술을 되살리자”라는 명분하에 1940년대까지 계속해서 봉산탈춤의 서울 공연을 비롯한 여러 공연과 기록 작업에 계속 착수하였다. 특히 송석하는 1938년에 봉산탈춤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설립된 봉산향토예술보존회의 조직과 운영을 사실상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송석하는 당시 이 조직의 구성원들이었던 김경석(金景錫) 등을 비롯한 여러 연행자들에게 “고압적이고 철저한 지시사항”을 내리며 봉산탈춤의 내용을 “정화(淨化)”하고자 했는데, 이는 결국 당시의 민속학 혹은 민속오락의 장려가 전통을 있는 그대로 전승하는 것보다는 선별적이고 제한적으로 “계승 발전”하는 것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봉산탈춤은 1937년 5월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향토무용민요대회를 시작으로 1940년대까지 계속해서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공연을 갖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뉴스영화와 기록영화, 문화영화등으로 여러 차례 그 공연 모습이 촬영되기도 했다. 한편 1940년 2월에는 콜럼비아 사에서 봉산탈춤의 대표적인 과장 두 개, 즉 먹중춤(묵승무(墨僧舞))와 사자춤(獅子舞) 두 개의 대사와 음악이 음반​1)으로 제작되어 발매되기도 했다. 이 음반이 발매될 당시 음반과 함께 제공되었던 가사지를 보면 당시 이 음반 제작이 어떤 의미로 진행되었는지를 짐작할 만 하다.

 

紹介의 말슴

우리가 자랑할만한 鄕土藝術의 하나인 『鳳山탈』을 좀더 널니 紹介하여보자는 意味에서 이 레코-드를 吹込하게된 바이외다. 元來 舞踊曲을 音樂으로만 表現하랴는 그것부터가 벌서困難한일일뿐만안이라 『鳳山탈』은 그 種目이 十餘種에넘처 全部를吹込하랴면 레코-드十餘枚라도 오히려 不足한 感있음니다. 그렇나 十餘種의 『탈』의大部分이 거우才談으로始終되여 重複된台詞와 同一한 音樂이 連續되여잇는 中에도 音樂과 才談이 混然一體가되여 가장 緊張한 場面을 現出하는데가 卽 여긔에 紹介하는 『墨僧舞』와 『獅子舞』의場面입니다. 이 두 才談만 드르면 可히 『鳳山탈』의 全豹를 엿볼수잇을 것이올시다. 이 舞踊曲吹込에는 弊社는全然 商業的 利害를 超越하여 斯界의 權威를 綱羅함에 非常한 苦心을다한바이외다. 台詞에는 斯界의 第一人者 金景錫翁이 擔當하였으며 伴奏에는 멀니 沙理院에잇는 鳳山音樂團 卽 鳳山鄕土藝術保存會員 諸氏를 招聘하야 純全한 朝鮮音律을 演奏케하였음니다. 最後로 謝過할 말슴은 後編 『獅子舞』의 台詞에 있어서 或 漢字의 誤植과 또 漢字로 飜譯못된 句節이 잇사오나 이것은 이 『탈』의 台詞에 아즉도 完備된 文獻이업는 까닭이오니 이點을 諒解하여주시는 同時에 아시는데까지 指導하여 주시면 後日 機會를 보와 다시校正하겟나이다. (文藝部 白)


舞踊의 沿革

高麗末葉에 어느寺刹에 道僧이라고 稱呼하는 二十年間이나 修行한 老禪師가있엇다. 世人은 이 老僧을 生佛이라하야 極히 尊敬하엿다. 그 當時에 이 老僧의 知友로 亦是僧侶의몸으로서 酒色에 侵犯하야 世人으로부터 醉僧이라고 指彈을 밧엇다. 醉僧은 老僧의 名聲이 날로 높허짐을 嫉妬하야 모-든手段으로 老僧의 破戒를 陰謀하였으나 生佛과같은 老僧의 堅固한 佛心을 動搖식일 道理가업섯다. 그때마츰 그寺刹 附近을 徘徊하며 山水間에 邀遊하는 怪物의 美妓가있엇다. 厥女는 本來個儻의몸으로 絶世美人이요 歌舞를 잘하엿다. 醉僧은 이美妓를 利用하야 老僧의 破戒를 計劃하엿다. 厥女는 모-든 手段을 다하야 老僧을 誘惑한 結果 老僧도 結局 姜女의 奸計의 捕虜가 되여 平生修行이 水泡로 도라가고 맛츰내 破戒의 몸이 되고 말엇다. 老僧의破戒한 所聞이 世間에 傳播되자 世人의 憤慨는 가장 높핫다. 그리하야 當時 一般有志는 佛道의前途를 憂慮하여 將來 僧侶等의 破戒와 一般民風의 頹敗等을 未前에 防禦하기 爲하야 劇的舞踊을 創作한 것이 卽 『鳳山탈』의 起源이라 한다.

이 음반의 제작에 있어서는 아마도 송석하가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실제로 이 음반의 제작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여기에 수록된 봉산탈춤 연행 사진과 그 대본 등은 모두 1936년 백중날 공연에서 송석하에 의해 채록된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그의 채록본 및 사진이 공식적으로 처음 간행된 것이 본 음반이 발매된 지 5개월 뒤인 1940년 7월 『문장(文章)』지를 통해서였던 것을 감안해 볼 때, 이 음반의 제작과 감수에 그가 영향력을 행사했었을 것으로 익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두 음반 모두 전반부의 내용 상당 부분은 채록본과 거의 똑같이 진행하지만, 본래의 채록본에서 육담이나 음담패설이 나오는 부분은 모두 “정화”되어 원래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는 『구운몽』 이야기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읇는 내용으로 교체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현재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의 봉산탈춤 대본자료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공연대본” 자료와의 연관성을 주목할만하다.


이렇게 일제 말기까지도 ‘조선 향토오락’의 대표주자로 계속해서 연행되어오던 봉산탈춤은 그러나 전시체제기의 어려움이 깊어지면서 1943년 이후 연행이 중지되고, 그 후 해방과 분단, 한국전쟁 등을 거치며 전승과 연행 모두에서 남북 분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다음 글에서는 1950년대 이후 주로 남한에서 전승되었던 봉산탈춤 및 이와 관련된 무용들, 이를 기록한 다양한 영상 및 음향자료들을 간단히 정리하고자 한다.



글·자료제공_ 석지훈(한국음반아카이브·역사학)

 

 

[사진1] 1929년 10월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장에서 춤을 추는 양주 별산대 놀이 탈춤 연희자들의 모습을 담은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이때의 공연은 일본인 민속학자 아키바 다카시(秋葉 隆)가 주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2] 1936년 백중날 사리원 공연장에서 송석하가 촬영한 봉산탈춤 공연 모습 사진 두 장.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사진3] 1940년 2월 발매된 음반 <봉산탈>의 가사지 1면.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소장.



 

[영상1] 1936년 사리원 공연 당시의 모습을 촬영한 스웨덴 박물학자 스텐 베리만의 기록필름 일부. 2016년 학술대회에서 공개된 일부분이다. 



[영상2] 1939년 10월 녹음되어 1940년 2월 콜럼비아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봉산탈> 유성기음반 (묵승무, 사자무). 봉산탈춤의 주요 연희자 중 한 명이었던 김경석이 대사를 맡고, 봉산탈춤의 연희 당시 음악을 연주해왔던 악사 5명 (방영환, 김영찬, 김학원, 김성진, 민칠성)이 “봉산고악단”이라는 이름으로 반주를 맡았다. 음반 사진 이경호 제공. 음원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소장. 


1) Columbia C2023-A,B 舞踊曲 鳳山탈 (墨僧舞, 獅子舞) 台詞 金景錫 伴奏 鳳山古樂團 奚琴 方永煥 大笒 金永燦 피리 金學元 피리 金成振 大鼓 閔七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