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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춤의 산증인,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사진1] <춘앵무>를 추는 김천흥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천흥은 ‘조선시대의 마지막 무동(舞童; 조선시대 때 나라의 잔치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를 일컫는 말)’이라는 수식어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김천흥이 1922년 아악부원양성소의 2기생으로 입학하여 궁중무용을 익힌 뒤, 1923년 3월 순종황제의 오순을 축하하는 연희에서 정재를 춘 경험에서 비롯된 수식어이다. 평범한 성장기를 보내던 김천흥은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이왕직아악부에 입학한 후 궁중예술의 대가들로부터 해금, 양금, 아쟁 등을 비롯한 궁중악기와 <가인전목단>, <장생보연지무>, <포구락>, <수연장>, <처용무>, <춘앵전>을 비롯한 궁중정재를 전수받았다. 뿐만 아니라 김천흥은 민속춤의 대가인 한성준에게 <승무>를 전수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김천흥이 궁중예술뿐만 아니라 민속예술에 또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사진2] <처용무>가면을 든 김천흥


 김천흥은 궁중/민속예술을 계승,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 창작과 교육 활동으로까지 예인으로서의 활동범위를 넓혀나갔다.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보, 조선권번의 사무장, 국립국악원의 연주원, 대한국악원의 무용부장 등의 다양한 직책을 거치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 발발한 6.25전쟁도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열정을 가두지 못했다. 피난 중이던 김천흥은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지역에서 무용 강습회를 열어 교육활동을 펼쳐나갔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김천흥은 서울로 돌아와 1954년에 개설한 김천흥 무용연구소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궁중/민속무용을 가르침으로써 본격적으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 시기에 김천흥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것에도 많은 관심과 열정을 쏟아, 1956년에 공연된 한국무용발표회에서는 궁중무용을 재현한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발표된 <처용랑>, <만파식적>은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인 창작 작품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두 작품은 김천흥에게 서울시문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등의 영예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사진3] 김천흥의 해금독주


 이처럼 김천흥은 시대를 대표하는 예인으로서 막중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 춤을 온전히 계승,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와 동시에 창작활동을 통해 전통을 재발견, 재창조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는 점 또한 김천흥의 주요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문화적 혼돈의 시기 속에서 민족의 문화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온 김천흥의 혼신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지금 우리가 ‘우리 춤’이라고 일컫는 것들을 보고, 즐기기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 춤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조건적으로 아낌없이 쏟아내었던 김천흥의 열정과 노력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기능보유자, 제39호 <처용무> 기능보유자 라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명예로 그의 품에 다시 안겨졌다. 우리 춤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천흥의 춤과 삶의 발자취는 ‘심소(心韶)’라는 그의 호가 지닌 의미처럼 우리에게 가슴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글_신찬은(성균관대 예술학협동과정 석사4기)


사진출처: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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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aa.go.kr/member/member06.asp?div=1&divcd=4&memcd=162&num=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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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_
http://www.naa.go.kr/member/member06.asp?div=1&divcd=4&memcd=162&num=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