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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발레의 유리 가가린, 자유를 향한 외침 - 루돌프 누레예프(Рудольф Хаметович Нуреев, Rudolf Khametovich Nureyev, 1938-1993

* 유리 가가린(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Yurii Alekseevich Gagarin, 1934-1968): 소련의 우주비행사. 1961년 4월 12일에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우주비행에 성공한 인물이다. 1961년 누레예프가 파리공연 당시에 보여준 예술세계는 유리 가가린의 첫 번째 우주비행과도 같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누레예프는 종종 ‘러시아 발레의 유리 가가린’으로 불린다.
이 글은 2012년 11월 ~ 2013년 3월까지 인문공감의 인문학 칼럼에서 <춤과 권력>을 주제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사진 1] 루돌프 누레에프

 1961년 6월 17일 파리 오를리 공항에선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파리 순회공연을 마치고 다음 공연을 위해 런던으로 출국을 준비하던 소련의 발레단원 중 한명이 정치적 망명을 외치며 파리 경찰에게 뛰어 든 것이다. 그는 바로 훗날에 천재 발레리노, 백만장자, 스캔들메이커 그리고 게이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루돌프 누레예프였다.

[사진 2] 어린 시절 누레예프의 가족사진

 누레예프는 가난한 군인 가족의 아들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태어났다. 그는 7세 때 타타르 민속무용을 접한 뒤로 춤에 대한 관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8세 때 우연히 발레공연을 보게 되었고 마법의 동화나라와 같은 발레에 매료되어 무용수가 될 것을 결심한다. 그후 민속무용단에 입단하여 다양한 공연 활동을 하였는데, 당시 황실발레단 소속의 발레리나 안나 우달쪼바(Анна Ивановна Удальцова)가 우연히 그의 춤을 보게 되었다. 우달쪼바는 누레예프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가 발레리노의 꿈을 키울 수 있게 도와준다.
*안나 우달쪼바(Анна Ивановна Удальцова): 우파에서 어린 시절 누레예프의 첫 번째 발레선생님으로 일찍이 누레예프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바가노바 발레학교로 보낸다. 안나 우달쪼바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제정 러시아 시대에 디아길레프의 발레뤼스에서 안나 파블로바와 타마라 카르사비나와 함께 활동한 발레리나로 알려져 있다.

[사진 3] 14세 때 민속춤 앙상블에서 춤을 추는 누레예프

 그러나 가난한 가정환경과 엄격한 군인 아버지는 누레예프에게 무용수의 꿈을 포기할 것을 종용했으나 그의 의지는 꺾을 수가 없었다. 안나 우달쪼바의 도움으로 1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레닌그라드발레학교(전 황실발레학교)에서 정식으로 발레 수업을 받게 된다. 당시 그와 함께 발레학교에서 공부했던 사람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춤에 매진했던 누레예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증언한다.

[사진 4] 발레학교에서 스승 알렉산드르 푸슈킨과 함께

 누레예프는 발레에 대한 열정과 노력으로 1957년 발레학교 졸업과 합께 키로프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하게 된다. 그는 발레리나가 춤을 잘 추기 위해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발레리노의 존재를 독립적인 것으로 각인시켜주었다. 그만큼 그의 춤은 강렬했다. 이와 함께 누레예프는 몸매가 드러나는 유니타드를 입어 무용수는 단순히 공연의 줄거리를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예술적 행위를 표현하며 사람의 몸을 통해 만들어지는 동작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증명해 보였다. 이러한 누레예프의 공연은 매일 만원사례를 이뤘고, 표를 구입하지 못한 사람들은 극장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 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고공행진을 계속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타고난 재능과 노력파인 누레예프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사진 5] 유니타드를 입는 누레예프

 소비에트 정권은 정치적 이념에 따라 발레의 형식과 특징들을 모두 바꾸어 놓는다. 현실생활과는 어떠한 연관성이 없고 소비에트 연방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발레만을 공연에 올리도록 강요하였다. 소비에트 시절의 발레는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 아니라 화려한 쇼윈도였던 것이다. 당시 소비에트 발레는 세계적으로 공격적이고 야만스러운 소비에트 연방의 이미지를 아름다운 귀족문화를 지닌 나라로 180도 바꾸어 놓는데 1등 공신 역할을 하였다. 특히 러시아 클래식 발레의 화려한 무대장치와 의상들은 모더니즘이 팽배하던 서구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소비에트 발레의 새 시대는 해외순회공연에 의해 열렸으며, 발레를 통해 소비에트 연방은 전세계에 그들의 자존심을 지키고, 문화예술의 나라라는 특권의식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발레는 해외공연에 치중했으며, 모든 해외공연 스케줄이 1년 전에 확정될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다. 발레로 인해 소비에트 연방은 엄청난 수입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해외공연에 대한 국가의 간섭은 더 심해질 수 밖에 없었다. 발레 작품, 해외공연 일정표, 무용단 스케줄은 물론이고, 무용수들의 월급까지도 정부와 문화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무용수들은 마치 군인들처럼 정부에서 결정한 스케줄에 따라 파견을 나갈 뿐이었다. 이러한 체제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국가에 반항하고 체제를 와해시키는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한 공로도 인정되어 발레무용수들은 부와 명예를 거머쥔, 소비에트 연방의 새로운 엘리트 계급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무용수들은 패션의 유행을 이끌며,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일약 스타였다. 특히 그들은 아름답고, 재능이 뛰어난, 성공한 그리고 신뢰감 주는 배우자로서 소비에트 사회에 자리매김한다.

[사진 6] “무대 위에 있을 때 나는 살아 있음을 느낀다”라고 말했던 누레예프

 누레예프는 이러한 정부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낀다. 비록 국적은 소비에트 연방이지만 정신세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사회주의체제에 수긍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61년의 여름에 파리공연을 가게 된 누레예프는 파리공연예술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언론과 대중들은 그의 춤을 보고 그를 ‘러시아 발레의 유리  가가린’이라 부르게 된다. 그는 성공적인 파리공연을 프랑스의 예술가들과 밤새 축하하며 서유럽의 자유를 만끽한다. 이러한 파리공연의 성공을 뒷전으로 하고 런던 공연을 위해 출국 준비하던 발레단에게 KGB는 누레예프에게만 모스크바로 향할 것을 지시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에서 중요한 공연에 출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그가 밤새도록 프랑스의 예술가들과 시간을 보내어 해외파견 무용수가 지켜야할 규칙을 어겼고, 이와 함께 사상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었고 모스크바 행 이후 그의 삶은 어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누레예프는 급기야 출국 직전에 KGB의 눈을 피해 “망명”을 외치며 파리 경찰에게 몸을 던졌다. 소련 정부가 의심하고 있는 것처럼 파리의 예술인들과 누렸던 달콤한 자유가 간절했을지도 모른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도 또 서방세계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은 무용수였기에 그의 망명은 큰 이슈였고, 특히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사회주의 사회의 파행이 세계에 알려질까 두려워 그를 귀국시키기 위해 KGB를 통한 갖은 협박과 회유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는 교통사고로 위장해 그를 살해하려는 시도까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자유를 향한 간절한 그의 외침은 소련 정부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사진 7] 1987년 11월 자신의 생가를 방문한 누레예프

 누레예프는 20세기의 무용계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무용수의 한명으로 손꼽힌다. 영국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마고트 폰테인(Margot Fonteyn, 1919-1991)의 오랜 파트너로서, 그리고 덴마크 출신 발레리노 에릭브룬(Erik Belton Evers Bruhn, 1928-1986)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밝히면서 게이 예술가로도 유명했지만, 무용수로써 또 예술가로써 현대의 발레계에 기여한 그의 공헌은 일일이 열거해도 모자를 것이다. 그가 만약 망명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현재의 발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글_ 양민아(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