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근현대한국무용사를 평생 연구의 한 축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관련 정보가 한 줄이라도 눈에 띄면 관심 있게 읽고 유의미한 자료는 스크랩을 해두는 편이다. 작년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사건 이후로 대통령 박근혜를 둘러싼 갖가지 가십성 정보가 쏟아지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것도 부지기수인데, 그중 김재규의 재판과정에서 박정희의 채홍사 노릇을 했던 박선호의 수첩에 100명이 넘는 여성 연예인 명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런 리스트가 있기 이전에 이미 한 무용가 출신 영화배우가 박정희에게 농락당하고 미국에서 기구한 삶을 마쳤다는 스토리는 한편의 세속영화처럼 느껴진다. 근현대무용사 자료에서나 보았던 김삼화라는 이름이 어쩌다가 독재자 박정희의 추악한 과거와 얽히게 되었을까?
[사진 1] 영화배우 시절의 김삼화
김삼화에 대한 정보는 무용관련 문헌이나 인터넷사이트보다는 영화관련 자료에서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영화정보사이트에서 발견한 김삼화의 프로필에는 서울 출신의 그녀가 6살 때부터 무용을 시작하였고, 민속무용의 대가였던 한성준(韓成俊, 1874-1941)의 조선무용연구소(1934년 개원)에서 수학하였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여러 차례 개인공연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특히 성신여중에 재학하던 당시에 미국 대통령 특사 환영연회(1947년 앨버트 웨드마이어 중장의 환영 다과회로 추정)에서 공연을 하는 등 ‘천재 소녀 무용가’로서 재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라고 나와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받들던 1960년 이전까지만 해도 외교사절단 환영이벤트나 이승만의 생일축하행사에서 단독으로 춤을 추는 어린이에게 흔히 붙는 수식어가 ‘천재 소녀 무용가’였다. 그런데 김삼화는 정말 ‘천재 소녀 무용가’였을까?
김삼화에게 붙은 ‘천재소녀’라는 타이틀은 1946년 <대동신문>의 기사에서 비롯된 것 같다. 1946년 8월 14일자 <대동신문>의 기사에서 “조선무용계의 혹성적 존재인 천재 소녀무용가 김삼화양 소속의 삼화무용연구소”라는 구절이 발견된다. 1946년이라면 1935년생으로 알려진 김삼화가 12세에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삼화무용연구소는 1943년에 개원하였다니 김삼화는 10세 때부터 무용교습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재’라는 타이틀이 과하지 않을 것이나 <대동신문>의 무용기사들이 과장된 광고형이라는 지적도 있으므로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다. 실제로 『한국신무용사』의 저자 안제승은 1946년 5월 8일자 <대동신문>의 기사를 인용하며 김삼화가 1946년에 ‘천재소녀의 혜성 같은 등장’이라는 요란한 표제를 붙이고 부민관(府民館)에서 ‘김삼화무용발표회’를 가졌다며 다소 부정적인 어투로 기술하였다. 김삼화의 어머니는 한성준을 사사했던 무용가 양선방(梁仙芳)이다. 그래서인지 김삼화의 공연에 양선방이 찬조출연을 했다거나 양선방의 공연에 김삼화가 출연했다는 기사가 발견된다. 그러나 양선방의 공연에 대한 언론기사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1946년 이후 김삼화에 대한 무용기사는 발견하기 어려우며 1949년이 되어서야 한 건이 나타난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3.1절 경축대회’에 대한 비평문인데 김삼화의 춤에 대한 부분을 발췌해서 보면 천재 무용가로서 와 닿지는 않지만 비범한 수준은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吳梅駕, 「김윤학, 김삼화 무용을 보고」, <경향신문>, 1949. 3. 9.)
金三和씨의 「風流娘」인데 내 기억에 틀림이 없다면 두 번째 보는 작품이다. 연령을 보아서는 가상하고 기교를 가졌다. 반주가의 탓인지는 몰으겠으나 이삼차 눈에 띈 「홀‧와-크」의 혼란은 불문에 붙이기로 한다. 「마스크」도 좋고 두고 봐야 하겠지만 關係的 조건도 양질인데 이러한 연령의 무용가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조숙한 末梢 기교의 수득보다는 예술 전반에 대한 넓은 교양의 체득이다. 좋은 지도자가 있으면 「바레리-나」로서 대성할 조건을 구비한 무용가로서 목전의 갈채를 위하여 작품의 「모치-흐」를 安易하게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舞踊靴 발 끝에 선혈이 배일 각오를 하고 한번 본격 「바레-」에 부드처 볼 용기가 있으면 좋겠다.
[사진 2] 『Pictorial Korea』(1961)에 실린 김삼화의 <승무>
‘천재 소녀 무용가’로 알려졌던 김삼화가 어떤 연유로 영화계에 진출하였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필자는 김삼화의 영화계 진출 요인을 두 가지로 추정한다. 첫 번째는 1950년대와 60년대에 최현을 비롯한 다수의 무용가들이 준수한 외모와 영화감독들과의 친분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하는 등 무용가들이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김삼화의 아버지인 김택윤이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영화제작자, 감독, 배우였다는 점이다. 김삼화의 영화계 데뷔작은 김기영 감독의 <양산도>(1955)이며, 대략 16편의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다. 그중 무용을 특기로 살린 <논개>(1956), 2013년에 한국영상원이 홍콩에서 발굴한 한홍 최초의 합작영화 <이국정원>(1957), 그리고 영화배우 엄앵란과 출연했던 사극 <대도전>(1962)이 대표적이다.
[사진 3] 김삼화 주연의 영화 <양산도> 홍보물
한 영화매체는 김삼화를 회고하는 글에서 그녀를 ‘혜성처럼 나타난 배우’라고 표현하였다. 당대로선 드문 서울대 출신 배우였고, 스타 여배우가 부재하였던 시기였으므로 김삼화는 두 번째 출연작 <논개>에서부터 바로 영화팬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고 한다. 영화정보사이트는 김삼화가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며 무용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은 것처럼 설명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다. 1961년 7월 6일자 일간지에 경영부실, 허가기간 만료 등으로 폐쇄조치를 당한 20개 극장 및 학원리스트가 발표되는데, 그녀의 학원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20개 학원 폐쇄처분」, <동아일보>) 일약 영화계의 스타로 떠올랐으니 무용활동이 그리 수월치 않았을 것이다. 학원을 폐쇄한 이후로 영화활동에 더욱 매진한 것도 아닌 것 같다. 1961년 이후 그녀의 영화출연작은 7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1964년 이후 그녀의 이름은 영화계에서 사라졌는데, 항간에는 그녀가 죽었다는 등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사진 4] 김삼화 주연의 영화 <논개> 포스터
영화 <논개>가 화근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독재자로 군림하고 나서 “당신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논개>에서 당신의 모습에 반했었다”고 하면서 김삼화에게 중앙정보부 소속의 채홍사를 보냈다. 당시 결혼 1년차였던 김삼화가 채홍사에게 갓난아기를 보아서라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소용없었다. 박정희는 김삼화를 성적으로 유린한 것도 모자라서 그녀의 남편을 협박하여 강제로 이혼시켰고, 얼마 후에는 35세 연상의 미국 노인과 혼인시켜 그녀를 미국으로 영구히 이주시켰다. 1980년대에 우연한 기회에 김삼화를 만났던 재미 언론인 김현철은 ‘사후 공개’를 조건으로 그녀로부터 비극적인 과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김삼화가 죽고 2012년에 처음으로 밝혀졌으나 박근혜 정권의 언론 통제와 블로거들에 대한 탄압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했던 것이다. 김삼화는 독재자의 성폭력과 가정파괴로 인해 낯선 이국땅에서 두려움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기구한 삶을 마감한 비운의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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