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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무용의 맹아, 박영인 혹은 쿠니 마시미(邦正美, 1908-2007)


 박영인(1908-2007)은 한국근대무용사에서 문제적 인물 중 한 명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는 1908년, 대한제국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일본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한 이래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현대무용을 습득하고, 이후 코즈모폴리탄(cosmopolitan)을 자처하며 유럽, 미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다. 그런데 이 땅에서 태어났음에도 그의 공연이 제대로 수용되어지지 못하였고, 그 스스로가 말년에는 한국과 관계를 부정하는 등의 이유로 한국근대무용사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국 현대무용의 맹아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수 있고, 당대 최승희, 조택원과 같은 선상에서 논의되었던 상징적 존재였다는 점에서 재고되어야 될 인물이다. 그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거리가 있다. 출생과 관련된 문제는 대표적 예로 그는 『舞踊創作と舞踊演出』(論創社, 1986)에서 “쇼난(湘南)해안에서 태어나 유년, 소년시절부터 방랑의 별을 쫓아다녔는데,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를 동경해서 구제(舊制)인 마쓰에(松江)고교, 그 뒤 동경제국대학 문학부에 입학했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왜 도쿄에서 50Km 떨어진 태평양에 접한 ‘쇼난’이고, 영국인이지만 일본에 귀화한 작가를 동경하였을까? 박영인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자료와 동생의 인터뷰(경상일보, 2006.5.24.)를 통해 울산 출신이며 부산중학을 거쳐 일본 마쓰에고교로 유학 갔음이 밝혀진 바 있음에도 이러한 회고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


 박영인은 일본에 가면서 제로 상태에서 일상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는 생존하기 위하여 일본에 밀착되었고, 본명을 에하라 마사미(江原正美), 예명을 쿠니 마사미(邦正美)라 칭하면서 일본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이는 1933년 1월 8일 일본청년관 쿠니 마사미 제1회 무음악무용발표회 이전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다보니 그에게 있어 박영인이 아닌 ‘쿠니 마사미’라는 인물은 일본에서 태어났고, 그 출발은 일본에서 시작한다는 자기중심적 논리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는 이후에도 희미한 기억 속 박영인이란 이름으로 산 나날보다 쿠니 마사미로 산 것이 훨씬 길고, 무용의 출발도 쿠니 마사미이기에 태어난 공간에 대한 부정도 그에게 있어서는 거짓과 자기합리화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1933년 첫 공연에 대해 박영인이라 칭하였고, 그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며 활동을 기사화한다. 또한 1936년 4월 10일 동아일보에 3회에 걸친 글에서 박영인이란 이름으로 썼고, ‘邦正美’는 예명이라 칭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이 즈음까지는 모국과 떨어져 생각하지 않고, 공감대를 형성하였던 시기로 바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박영인은 일제강점기 이 땅의 무용계와 교류를 하다가 모국과 절연을 하게 되는데 박영인의 동생인 박영철의 기억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박영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이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귀국했다. 박영철씨는 ‘아버지 박옹과 함께 마중하러 갔었다면서 이후 해방 때까지 몇 개월간 울산과 서울을 오가면서 문화활동을 했으나 춤추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의 내로라하는 무용인과 무용계 후배들이 우리나라에 현대무용을 보급시키자면서 박영인과 여러 번 회합의 자리를 가졌다.(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장을 갖추어 입고 공연장을 찾아올 정도의 수준이 되지 않는 한 한국무대에서 활동할 수는 없다고 말했었다’고 회고했다. 무용계에서 여러 차례 설득이 있었지만 그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해방 뒤 박영인은 홀연히 한국을 떠났다. 아버지 박옹만이 부산까지 배웅했다.(경상일보, 2016.5.24)

 이 이야기는 걸러서 생각할 부분이 존재하지만 우선 그가 해방 전 국내에 들어와 이 땅에서 활동을 펼치고자 노력하였다는 점 그리고 그가 무대에 설 수 없는 토대였기에 해방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아직까지 설익은 공연문화에 대한 문제인지 또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친일문제인지는 연구의 대상이지만 이 시기 박영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박영인이라는 흔적을 지우고 쿠니 마사미로 살게 된다. 그는 여러 회한을 품고 연예인들이 본명을 잊고 예명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스스로 옛 기억을 지우고 쿠니 마사미로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글_ 김호연(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