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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이고르 모이세예프 국립민속무용단의 유일한 한인 무용수 박 비비안나(Пак Вивиана, 1928-2013)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는 전 세계의 민속춤을 그 특징은 살리되 발레테크닉에 기반하여 모이세예프만의 스타일로 각색한 모이세예프 국립민속무용단이 소재하고 있다. 이 무용단은 1937년에 창단하여 80여년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러시아 국립민속무용단이다. 이고르 모이세예프(Моисеев И.А.1906-2007)는 소비에트 시대의 발레 안무가로 무용단 창단 이래 80년간 무용단을 이끌며 모이세예프만의 민속춤작품을 탄생시킨 러시아를 대표하는 민속발레의 선구자적 안무가였다. 이처럼 러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모이세예프 무용단에서 활동했던 유일한 한인 무용수가 있었다. 그녀는 바로 박 비비안나(이하 비바)이다. 한인무용수가 활동했었다는 것이 특별한 일인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비바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운동가이며, 북한의 부수석 및 외상(1948-1953)을 지낸바 있는 박헌영(朴憲永,가명_이춘, 1900-1955)이며, 어머니는 독립운동가이며 사회주의 운동가였던 주세죽(朱世竹, 러시아이름_한베라, 1901-1953)이라고 하면 러시아와 대한민국 그리고 북한사이에 놓인 그녀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는 그녀의 부모님의 정치활동내용은 차치하고 소련에서 홀로 남아 외로이 펼쳐나갔던 그녀의 예술활동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사진1] 1928년 박헌영, 주세죽, 비비안나

 박 비비안나는 그녀의 부모인 박헌영과 주세죽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사회주의 운동을 할 수 있는 소련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1928년 9월 1일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으로 수시로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부모님들로 인해 1931년부터 모스크바 근교의 바시키노에 소재한 보육원에서 자랐다. 1933년에는 이바노브에 위치한 정치적 망명자들을 위한 첫 번째 국제어린이집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만난 보육교사 롤파 그륙카우파는 일찍이 춤에 대한 비바의 재능을 알아보고 1943년 그녀가 국립 이고르 모이세예프 민속무용단 산하 무용학교-스튜디오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돕는다. 1년 후, 보육교사 롤파는 일기장에 그녀의 첫 데뷔무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44년 7월 7일 오늘 아침 이고르 모이세예프 무용단 학생들의 공연이 있었다. 이것이 비바의 첫 공연이었다. 그녀는 <타지키스탄 춤>을 훌륭히 공연했다....”

 롤파가 소장하고 있는 비바의 유년시절의 편지 속에는 무용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는 1947년 모이세예프 무용학교 졸업 후, 바로 모이세예프 무용단의 단원으로 선발되어 20년간 무용수로 활동하며 전세계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비바는 무용단 단장이며 예술감독인 이고르 모이세예프가 가장 신임하는 무용수 중에 하나였다. 생전에 비바는 무용단 활동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모이세예프 무용단에서 무용수로 약 20년간 일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았고, 이고르 모이세예프에게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는 항상 나에게 잘 대해 주었고, 무용단에서 내가 유일하게 슬라브계통의 외모를 가지지 않은 무용수였지만, 내가 작품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항상 신경써주었다. 1943년 모이세예프는 <타지키스탄 춤>을 새로 만들었는데, 이 작품으로 내가 첫 번째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할 수 있었다. 그 이후 그는 나를 위해서 <몽골 인형>, <한국 양치기> 등 동양을 모티브로 한 다른 작품들을 만들었다. ...”


[사진2] 작품 <몽골인형>

 1948년 그녀의 아버지 박헌영이 북한 공식사절단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길에 비바를 만나 평양으로 초청하였다. 아버지의 초청으로 1달간 평양에 머무르는 동안 최승희에게 춤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 박헌영은 그녀가 북한에 남기를 바랬지만, 그녀는 무용단에 남는 것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비바는 무용수로 활동하면서 전 세계로 공연을 다녔다. 특히 1955년 프랑스 공연에서 이브 몽땅(Yves Montand,1921-1991)은 비바의 <몽골인형> 공연을 보고 동양적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매료되었다.


[사진3] 1955년 프랑스 공연 후에 이브몽땅과 함께

 가장 인상적인 해외공연은 일본 가부키좌공연이라고 한다. 그녀는 짧은 기간에 일본의 정적인 춤을 습득하여 공연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 공연에서 외모뿐만 아니라 일본 춤의 정신과 감성까지도 잘 표현하여, 그녀의 성실함, 춤에 대한 열정과 재능을 증명하며 일본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58년 미국공연 이후, 그녀는 무용단에서 가장 훌륭한 수석무용수로 선정되어 국가표창을 받았으며, 이와 함께 러시아 문화교육부로부터 우수 노동메달을 수상했다.


[사진4] 가부키좌 일본공연

 은퇴 이후, 1968년~2011년까지 40년 이상 국립 이고르 모이세예프 민속무용단 산하 무용학교-스튜디오에서 동양춤을 중심으로 가르치며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이 공로가 인정되어 “공훈 문화예술종사자”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평생을 이고르 모이세예프 무용단에서 무용수로서 그리고 교사로서 그녀의 재능과 열정을 펼쳤다. 평생토록 그녀는 부모님을 자주 만날 수도 없었고, 부모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살았다. 1989년 기밀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던 부모님에 대한 자료들을 보고서야 비로소 부모님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그녀에게 진정한 가족은 그녀를 낳아준 부모님이 아니라 그녀가 평생 함께 했던 무용단 식구들 그리고 춤이야말로 부모 없이 타지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야 했던 인생에서 살고 싶은 의지를 심어준 것이 아닐까.



[사진5] 이고르 모이세예프 국립민속무용단 단체사진
(두번째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비바)


*이 글은 러시아 국립고등경제대학 세계 경제 및 정치학부의 송 잔나 그리고리예브나 교수가 2013년 11월 5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유명한 무용수이자 교육자였던 박 비비안나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녀의 일생을 정리하여 2013년 11월 10일자 <고려일보>에 기고한 글의 일부를 발췌하여 번역하였다. (https://koryo-saram.ru/viviana-pak-1928-2013-gg/)


글_ 송잔나 그리고리예브나(Сон Жанна Григорьевна, 국립고등경제대학 세계경제 및 정치학부)
편집.번역_ 양민아(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