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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와 민속춤의 전승 매개자 정소산(1904-1978)

 정소산(1904-1978)은 정재와 민속춤의 전승을 통해 근대 대구 전통춤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 중 한명으로 기억할 수 있다. 정소산은 대구에서 춤 입문을 한 뒤 경성 대정권번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춤을 익히는데 그에 대한 흔적은 「조선미인보감」에서 찾을 수 있다. 본명은 정류색(鄭柳色)이고 당시 나이가 18세로 기예로 시조와 경서잡가를 말하는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잘하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라며 그의 특색을 기술하고 있다. 이후 그는 하규일에게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는데 정재와 민속춤을 함께 익히며 다양한 춤을 습득하게 된다.   

 

 

 

[사진 1] 「조선미인보감」

 

 

  그는 대구에 정착하고 광복 이후에는 국악협회 대구지부에 관여하며 지부장을 역임하는 등 전통예술의 전승에 앞장서 1962년 무용부분으로 경북문화상을 받았고, 정소산무용연구소를 만들어 전통춤 보급에도 힘을 쏟기도 하였다. 그의 춤세계가 표면화 된 것은 1967년 포구락, 검무, 무고가 경북도무형문화재로 신청된 이후이다. 포구락은 중국에서 전래된 당악정재의 하나로 고려 시대에 처음 추어진 것으로 채구를 풍류안에 넣어 통과하면 꽃을 받고 그렇지 못하면 벌로 얼굴에 칠을 하는 형태의 정재이다. 검무, 무고도 정재에 기본을 둔 것으로 이 춤들을 문화재로 신청하게 된 배경은 정소산이 하규일에 직접 배우고 전승한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측면에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론 기사를 통해 지정이 확정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이유 없이 등재되지 못하고, 그의 사후 정소산류 수건춤이 대구지역 무형문화재 제 18호로 2015년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이 춤은 ‘흥춤’이라고도 불리는데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로 장중함과 단아함, 절제미가 있으면서도 흥을 돋우는 개성적 형태의 춤으로 말할 수 있다. 이 춤은 그의 기본적 성격을 잘 말해주는 춤으로 백년욱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사진 2] 문화재청 홈페이지

 

 

 

  또한 정소산의 계열의 입춤과 살풀이춤은 박금술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 춤은 입춤 혹은 입춤살풀이로 불리는 것으로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19 입춤, 한량무 검무」(1996)에서는 이 춤에 대해 입춤 혹은 입춤살풀이라 했고, 박금슬은 ‘내가 이 춤을 정소산 선생님께 배울 때에는 조그마한 사각 손수건을 들고 추었는데 그것을 선생님은 수건춤이라고 하셨다. 수건춤은 처음 맨손으로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추다가 소매 속에서 수건을 꺼내 들고 춘 후 자진모리로 넘겨서 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춤은 기본춤이라 할 수 있다’라고 말하여 입춤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춤은 거무(거미)처럼 추어야 한다. 거무 다리처럼 팔다리를 크게 움직이되 조용히 무겁게 움직이듯 말 듯 날리지 않으며, 한바퀴 이상은 돌지 말아라 그리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김죽엽,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 인식론」, 「한국무용학회지」13-2, 70쪽에서 재인용)라는 말로 그의 춤세계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절제의 춤사위이면서도 역동적인 형태를 결합시킨 모습으로 영남의 기질이 춤에서도 그대로 투영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정재와 민속춤의 기본적 형태가 절묘하게 조화된 형태를 추구한 그의 춤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정소산은 하규일을 사사하여 정재와 민속춤을 익히고, 대구에 내려와 지역 정서와 결합된 춤을 전승하여 제자를 배출하는 등 근대 전통춤의 흐름에서 기억할 수 있는 인물 중 한명일 것이다.

 

 

글_ 김호연(문화평론가)

 

 

 

 

사진출처_

 

사진 1_「조선미인보감」, 민속원, 2007.

사진 2_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