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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몸과 장엄한 영상으로 표현한 아시아 논의 생태학 -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 〈RICE〉



 파리의 떼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과 뉴욕의 BAM의 시즌 프로그램은 세계의 공연예술가들에게 동시대 예술의 좌표와 다름없는 역할을 한다. 동시대를 주도하는 실험성과 예술성으로 충만한 작품들이 엄선되어 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양대 극장의 까다로운 관문을 통과한 아시아의 안무가는 한두 명에 불과하다.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Cloud Gate Dance Theater)의 린 화이민(林懷民)이 그중 한명이다. 린 화이민은 지리 킬리안(Jiri Kylian),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와 더불어 현존하는 천재 안무가 중의 한명으로 손꼽힌다.


 문학도 출신인 린 화이민이 1973년에 무용단을 설립하면서 지은 한문 이름은 운문무용단(雲門舞踊團)이다. ‘운문’은 중국 고전에 최초로 등장하는 춤 레퍼토리이다. 현대무용을 추구하는 단체이지만 중국의 문화정체성을 잊지 않겠다는 린 화이민의 의지가 엿보이는 작명이다. 그런 까닭에 린 화이민의 안무 중심에는 태극권, 경극, 명상과 같은 아시아적 움직임과 서예, 아시아의 신화나 민담 등 아시아적 감수성이 존재한다. 세계무대에서 환호를 받았던 <Moon Water(水月)>과 <Cursive(行草)> 3부작, 그리고 12년 만에 한국무대를 찾아 올리는 <RICE(稻禾)>가 대표적이다.


 <RICE>는 린 화이민이 2013년에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의 40주년을 맞아 안무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세계적인 무용단으로써의 흔들리지 않는 명성, 대만의 국민무용단으로써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 불혹의 ‘사십’을 맞아 린 화이민은 안무의 초점을 생명의 원천으로 돌렸다. 바로 ‘쌀(Rice)’이다. <RICE>의 안무를 위해 린 화이민은 대만의 최대 곡창지 츠상(池上)으로 제작진을 이끌고 가서 농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논의 풍광과 소리를 채집하며, 자연을 온몸으로 체감하였다. 그래서인지 <RICE>의 무대는 공동체 정신, 생명 중심의 생태, 건강한 몸 등 아시아적 가치로 풍성하다.


 LG아트센터의 협조로 미리 <RICE> 영상을 감상하였다. 무대에 선 무용수들은 농부들처럼 정직하고 우직하게 움직였다. 몸의 중심축을 허리의 한 측면으로 보내고 그 부력으로 곡선을 그리며 잽싸게 걷는 경극의 발동작, 태극권으로부터 유래한 유연한 상체 움직임에 땅 지향의 묵직한 하체 움직임의 조화는 서구의 현대무용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려한 기량이었다.




 무용수의 기량만큼이나 유려하게 펼쳐지는 것은 영상이미지였다. 푸른 벼이삭의 작은 흔들림에서 시작하여 수확기로 접어든 광활한 논, 경작이 끝나고 붉게 활활 타오르는 밭두렁에 이르기까지 논의 생태를 정확하고 장엄하게 묘사한 영상미에 탄복하게 만들었다. 영상의 공간성 또한 압도적이었다. 처음에는 투사하는 면을 전면으로 쓰지 않고 좁은 틈새로 시작하며, 공연이 전개될수록 투사면 전체를 넘어 무용수의 무대로 서서히 침범해 내려오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색다른 영상미를 창조한 에탄 왕(Ethan Wang)은 작년에 “Knights of Illumination Award”를 수상하였다고 한다.


 린 화이민은 <RICE>를 통해 논의 생태와 인간 생명의 순환성을 교차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대나무 막대가 울리는 소리 하나, 영상의 한 장면까지도 치밀하게 계산하고 몸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루도록 연출하였다. 그의 연출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논의 생동과 생명의 숨결이 시시각각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숨을 멈추게 하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생명의 잉태를 묘사한 장면이다. 두 몸이 결합하는 장면을 그처럼 숨 막히게 아름답고 세련되게 묘사한 안무가는 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연의 순환과 생명의 서사를 춤으로 숭배했던 린 화이민은 작년 아메리칸 댄스 페스티벌로부터 평생업적상을 수상하였다.


 <RICE>는 대만, 홍콩, 싱가포르, 독일, 영국 등 5개국 유수의 극장들이 공동 투자한 작품으로 2013년 초연 이후 세계적인 무대를 순회공연하고 있다. 클라우드 게이트 무용단이 뉴욕의 BAM과 파리의 떼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의 공연에 앞서서 한국무대를 찾아 준 것은 우리 무용가들에게 큰 기회이다. 아시아의 컨템포러리 댄스로 세계무대를 석권한 린 화이민으로부터 해외 진출을 꿈꾸는 우리 안무가들이 한 수 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_ 편집주간 최해리(무용인류학자, 한국춤문화자료원 공동대표)

사진_ LG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