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5일, 2년 전 제 32회 서울무용제에서 전통과 창작이 조화를 이루었던 경연작품 <사자의 서>로 한국 창작무용계의 큰 주목을 받았던 안무가 황재섭을 만나 오는 12월 28~29일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 오를 신작 <사자의 서 II_Event Horizon>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번 작품은 단테의 사후 세계 여행기인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 장면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문학과 춤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시도로서, 관객들에게도 종교와 과학의 관점을 넘어 진정한 의미에서 삶과 죽음의 본질을 파헤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Q. 공연 제목 <사자의 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A.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이의 관에 미라와 함께 넣어두는 문서로, 죽음 이후 내세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티벳에도 그들의 내세관을 보여주는, 일종의 “사자의 서”로 바르도라는 문서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사자의 서”로 통칭되는 문서들은 죽은 이의 영혼이 떠돌지 않고 보다 편안하게 죽음의 과정을 겪을 수 있도록 이야기해 주는, 일종의 안내서이다. 특히 “사자의 서”는 내세의 구원 여부를 그간 그 사람이 겪어 온 삶의 궤적을 통해 판단했다. 자신을 더 돌아보자는 의미의 작품을 만들고자 했는데, 그 의도와 “사자의 서”의 이 같은 특징이 잘 맞아 떨어졌다. 더 잘 죽기 위한 메시지를 통해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지 돌아보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 그것이 “사자의 서”가 갖는 의미이다.
Q. <사자의 서>가 보여주는 내용은 결국 사후 세계, 즉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내세인 셈인데 제목, 그리고 죽음이라는 주제에서 그 같은 내세관이 전제된 작품인지가 궁금해진다.
A. 굳이 내세를 전제한 것은 아니고, 종교적 관점으로 한정하여 죽음을 바라보는 시도는 더더욱 아니다. 이 작품은 2011년 서울 무용제 출품작으로, 단테의 사후세계 여행담 『신곡』의 지옥편을 모태로 삼고 그를 『사자의 서』와 연결지어 종교와 과학을 넘어 죽음의 본질, 그 자체를 바라보며 현재의 삶을 돌아보자는 시도이다.
Q. 그렇다면 과학적 개념어인 Event Horizon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A. Event Horizon은 탈출 속도가 빛의 속도가 되는 부분으로서 우주와 블랙홀의 경계가 되는 것이다. 블랙홀이 검은 색인 이유는 블랙홀이 사건의 지평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건의 지평선은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해 그 존재가 예측되었던 것으로, 그 너머에서는 빛이나 소리마저 돌아올 수 없다. 40분이라는 시간 제약이 있었던 서울 무용제 출품 당시와 달리 공연 시간을 20분 더 늘리며 더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 넣으면서 이번 공연에 "사상의 수평선"으로서 도입한 개념이다.
사후 세계든 종교이든, 그것은 단지 인간이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지, 과학적 관점에서 내세는 어떤 의미도 부여받을 수 없는 개념이다. 작품 내에서도 가로로 들어오는 빛을 넘어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표현하여 이 수평선을 보여주고자 했다. 반면 인간은 수평에서뿐만 아니라 수직적 관계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도 한다. 종교와 같은 여러 가지 염원에 의해 만들어낸 하늘, 신,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환생에 대한 염원들이 그것이다.
Q 이번 공연에서 지옥을 표현하기 위해 특별히 택한 방법이 있다면?
A. 단테의 『신곡』의 지옥 편에서 표현된 지옥의 장면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뛰어다니는 불마차와 그에 깔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궤적에 기반해 그렇게 살아온 대가를 치르는 공간이다. 이때 처벌은 단순히 그가 가진 것을 뺏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옥은 영화 <세븐>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오히려 그가 갖고자 했던 것을 과하게 주어서 그가 갖고자 열망했던 바로 그것 때문에 고통 받도록 죄인들을 처벌한다. 지옥의 악몽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 프롤로그를 제외한 1장 지옥 부분에 주로 2인무 형태를 차용하였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지고자 하는 동작을 통해 탐욕스럽고 색욕이 넘치고 교만한 이들, 즉 많이 가지고자 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이를 표현하고 그 욕망을 방해하는 동작을 통해 죄의 대가를 주는 처벌자를 표현했다.
Q. 그렇다면 이번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되었으면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A.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종교와 같은 곳에 의지해 그를 위안으로 삼고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결국 내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바로 여기,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 충실할 때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들을 진정한 의미에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용이라는 장르는 표현 자체가세분화되기 힘든 영역이다. 끝없이 세분화하다 보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너무나 확실해지게 되고, 그처럼 한정된 메시지는 관객들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린다. 나는 무용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감상자 스스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죽음의 커다란 장면들과 현재의 장면들을 통해서 작게나마 스스로가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의미를 느껴보고, 주변과 더욱 소통하게 되었으면 한다.
Q.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번 작품에서 순수 안무 외에 도입한 안무 외적 요소들이 궁금하다.
A. 이번 작품만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우선 "문학과 춤의 만남"이라는 점이 그렇다. 또 5년여 전에 한국에서 열었던 이틀간의 전시회를 보고 무용공연에 도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찰스 샌디슨의 영상을 사용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욕망과 관련된 단어들이 떠다니도록 해 좀 더 쉽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지옥을 경험한 후 현재로 돌아와서도 여전히 인간의 욕망이 끝없이 위를 향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적합한 무대 세트 장치도 설치했다. 뿐만 아니라 욕망의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작곡가에게 의뢰해 한국적인 음울한 분위기의 음악을 작곡했고, 인간의 욕망이 그 절정을 내비치는 전쟁과 관련된 클래식 곡의 부분을 차용해 삽입하기도 했으며, 한국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수제천> 음악과 같은 고(古) 음악을 사용하기도 했다.
Q.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작품 혹은 해 나가고 싶은 작품의 모습을 그려본다면?
A. 나에게는 세 가지 관심사가 있는데 인간, 우주 그리고 신이 그것이다. 인간과 신은 사실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둘은 결국 인간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우주라는 것은 다르다. 내가 마지막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장르는 영화인데, 공연 예술에서는 표현에 제약이 있는 공간과 상황을 만들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태까지는 어쩌면 우주보다도 더 클 수 있는 인간의 욕망과 인간의 마음,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신이라는 이야기를 다루었다면 이제 인간이 점하고 있는 공간,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너무나도 작은 공간을 다루어 보고 싶다. 문학과 춤의 만남 시리즈 중에 그와 연관된 책이 있다면 그를 통해 한 번 다루어 보고 싶기도 하다. 예를 들어, 디킨스의 『만들어진 신』과 무용의 만남은 현재 대본 작업 중에 있고, 아직 제목은 정하지 않았지만 앞서 말했던 영화 <그래비티>도 무용의 언어로 풀어내 보고 싶다. 결국 신의 이야기와 공간, 우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터뷰 _ 안수진 인턴기자(서울대 미학/경영학 3)
사진 _ 황재섭무용단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