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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비커밍의 세계

  

현대무용가 차진엽의 <원형하는 몸>을 봤다. 필자는 공연 전에 작품에 대한 이해를 위한 글을 일체 읽지 않는다. 평론가의 글이나 안무가의 노트를 읽다보면, 작품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갖기가 쉽지 않아서다. 원형하는 몸이란 무엇일까? 원형(Archetype)이란 우리 모두가 자각하지 못한 채 반복적으로 행하는 인간집단에 내재된 무의식의 흔적을 뜻한다. 그런데 차진엽은 이 단어에 동사적 의미의 옷을 입힌다. 놀라운 것은 원형 행위를 행하는 주체가 인간의 몸이고 그 결과를 고스란히 담는 것도 인간의 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는 점이다.

서구의 경전은 인간이 태어나는 행위, 즉 어미의 자궁에서 착상되어 자라 시간이 되면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편물 뜨기(Knitting)'에 비유한다. 뜨개질이란 끊임없이 연결되는 원형의 고리를 엮어 한 벌의 옷을 짓는 일이다. 각 고리마다 신의 숨결이 맺히기에, 인간의 정체성은 숨결의 숫자만큼 셀 수 없는 무한하다. 인간을 잉태하는 자궁의 형상은 원이다. 안무가는 “원형하다”라는 말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풀었다. 둥근 어미의 자궁과 무의식의 흔적으로 남은 신의 숨결 같은 원형. 이 두 개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은 물방울이다.

원형의 무대를 만들고 그 위에 14개의 거울을 세웠다. 원형적 삶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림자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디지털 맵핑 기술을 이용해 바다의 포말이 부서지는, 파도의 역동적 움직임을 표현하는 동안 무용수는 각자가 물방울처럼 모였다고 부서지고, 다시 응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대의 천장에는 커다란 망 속에 얼음덩어리를 넣어, 공연이 진행되면서 실제로 녹아서 무대 위의 그릇 위에 담긴다. 무용수는 그 소리를 관객들이 청각을 통해 경험할 수 있도록 소리를 증폭해 들려준다.

collective A의 <원형하는 몸>은 차진엽이 지금까지 천착해온 몸, 여성, 원형에 대한 주제와 이음새 없이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세계관은 다양한 무대기술과 융합하며 진화할 예정이다. 마치 작은 물방울 하나가 모여 대하를 향해 그 몸짓을 키워가며 흘러가듯 말이다. 세상의 모든 원형(Archetype)은 반복적 서사를 만드는 틀, 바로 원형(Pattern)이 된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기화를 통해 증기가 되는 순환과정은 마치 무한한 고리를 엮어 만든 한 벌의 스웨터처럼, 인간이 입는 다른 정체성을 갖는 과정을 설명한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과학철학자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물과 꿈>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불과 물, 공기와 흙이라는 4가지 요소로 풀어낸다. 그에게 상상력은 현실의 세계를 변형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창조성을 지녔다. 그에게 물은 따스하고 모성적인 이미지의 세계로 초대하는 힘이다. 물은 자신을 응시하는 이들을 비추는 거울이다. 물은 자신이 만나는 대상마다 그 내부로 스며들거나 자신의 형상을 스스로 변화시킴으로써 단단한 대상을 포용한다. 물은 싹을 틔우고 샘을 솟아나게 하는 질료로서의 물의 힘은 무용수들의 섬세한 손가락 마임을 통해 표현된다.

<원형하는 몸> 공연의 시종,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변화의 과정을 감내하고, 삶 속에서 정체성의 변모를 추구하는 원형의 질료이다. 인간은 역동성으로 가득한 되어감(Becoming)의 과정에 서 있는 존재이다. 되어감의 과정에선 무조건 소리가 난다. 우리의 삶은 직선이 아닌 원형의 삶과 궤적을 추구해야 한다. 나와 마주친 대상이 내는 소리에 눈과 귀와 손이 향할 때, 그 곳에서 길이 생긴다. 그 길 위를 우리는 오늘도 사람들과 함께 걷는다. 우리는 집단적 타자들의 소리가 빚어낸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