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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무용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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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국립현대무용단의 신작 <카베에>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딱 한가지이다. 지금껏 장르간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상상력’을 찾아보려는 “예술의 협업은 이제 끝이 났구나.”라고. 그만큼 이번 작품은 무용장르만의 생명력과 특성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몸과 몸이 뒤엉키며 의미를 빚어내는 무용언어의 매력이 예술의 유효성을 만들어내는 힘이 담겨있음을 보여주었다. 춤 예술의 시원을 향한 오디세이(Odyssey) 라고 불러도 될 만큼의 강력한 실험이었다.

<카베에>는 구멍, 동굴, 객석과 같이 어둡게 패인 공동(Cavity)을 말한다. 국립 해오름극장의 건축적 특성을 살려 바닥에서 천장까지 수십여 미터에 달하는 무대를 만들었기에 관객들은 마치 지하 동굴 속으로 들어 온 임장감을 느낀다. 무대에는 39명의 무용수들이 그룹을 지어 앉아있다. 작품의 시작과 함께 무용수들이 하나씩 일어서며 단전에서 끌어올린 깊은 구음을 내뱉는다. 그들의 모습에서, 적요한 공간에서 피어나는 한 무리의 꽃들을 떠올렸다. 빛의 미립자를 향해 몸을 숙이는 굴광성의 식물들을 보는 것 같다.

집단의 무용수들은 무대에 울려 퍼지는 구음의 파동에 따라 이합집산을 지속한다. 파동은 생명의 떨림이고, 일종의 주파수다. 영어에서 ‘서로 마음이 잘 맞는다’라는 뜻을 ‘We are on the same wavelength’라고 표현하는 건 이런 이유다. 작품에서 이런 코드를 썼다는 것은 이 작품에서 표상되는 집단무용수들이 소통과 존재의 위기에 노출된 채, 실마리를 찾아가는 인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이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고향을 잃은 존재처럼, 땅 속에서 잠재되어 있다가 서로를 부르는 호명을 통해 깨어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고향상실”의 시대라고 불렀다. 디지털 환경으로 재편된 삶의 무대에서, 인간은 점차 서로에게 멀리 떨어진 섬이 되어간다. 다수의 몸이 엉키며 만들어내는, 마치 함께 피어나며 신음을 내뱉는 꽃과 같은 정경들을 통해 안무자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 고향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서로를 향해 몸을 열고, 곁을 내어주며 서로의 틈을 매우며 조율하는 무용수들의 손짓과 몸짓에서 철학의 본래적 과제가 “존재의 진리가 드러나는 곳으로 귀향하는 노력”이라는 하이데거의 메시지를 듣는다.

작품을 보며 필자는 1960년대 폴란드의 실험연극을 이끌던 안무가 예지 그로토프스키를 생각했다. 그는 <가난한 연극(Poor Theatre)>를 통해 연극의 방향성을 모색했다. 그에게 연극은 배우의 신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삭제된 공간’이었다. 이는 연극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폐기처분했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매일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일회성 공연무대에서 생명을 불태우고 신을 초대하라. 제의를 시작하라. 뜨거워서 바라볼 수 없게 하라 관객이 내 인생이 어찌될 찌 결심하게 하라”고 말이다. 새로운 연희를 위한 선언이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카베에>는 ‘오늘날 무용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인간의 몸을 감싸는 직물은 인간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연출한다. 직물과 몸 사이의 공간은 가변적이고,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한 공간이 된다. 안무가 황수현의 <카베에> 속 포개지고, 중첩되는 무용가들의 몸은 직물처럼, 지금 인간들이 맺고 접고, 푸는 관계의 점성과 밀도를 보여준다. 몸을 구성하는 물질은 같지만, 몸과 몸이 연결되며 그 속에서 울려 퍼지는 폴리포니는 한 없이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