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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속에서 어둠을 읽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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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상으로서의 ‘블랙=검정’은 모든 빛을 흡수해버린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 한 블랙은 암흑, 공포, 죽음, 절망 등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색이기도 하다. 바로 이 색채명이 들어간 ‘블랙뮤직’ 또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음악, 즉 흑인음악으로서 바로 그들의 피부색에서 비롯됐던 어두운 삶의 지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안무가 류장현은 바로 그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 ‘블랙뮤직’에 기반하여 작품 <블랙>을 완성하였다. 하지만 블랙을 보는 시각은 조금 다르다. 빛과 어둠의 상호관계 속에서 블랙을 바라보고자 한다. 어둠이 있기에 빛이 밝아올 수 있다. 류장현은 <블랙>을 통해 바로 이 어둠을 이야기하며 삶 속에서 어둠의 시기를 겪는 이들에게 춤으로서 한 줄기 빛이 되어주고자 하였다.

막이 절반쯤 내려온 무대 위는 깊은 산중의 동굴 안처럼 칠흑 같은 어둠으로 존재한다. 그 어둠을 뚫고 어슴푸레 새어 나오는 불빛은 새벽의 안개처럼 희뿌옇게 무대를 휘감는다. 이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가 자신의 존재를 알려오기라도 하듯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절망 속에서 발견한 희미한 한 줄기 빛을 따라 찾는 막연한 희망처럼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막이 완전히 올라가면 드럼과 기타 소리가 날카롭게 무대를 가로지른다. 락 음악에 맞춰 검은색 복장의 여덟 명의 무용수가 일렬로 서서 각자 춤을 춘다. 팔과 다리를 한껏 사방으로 펼치며 춤을 추지만 자유를 느끼기에는 어딘지 모를 경직됨과 어색함을 감추고 있다. 그들은 어느 순간 무대를 가운데 두고 원형으로 둘러서서 일정한 동작을 반복한다,

객석 통로를 이용하여 두 이야기를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음악은 보다 리드미컬한 음악으로 바뀌고 공연은 통로와 무대로 나눠서 진행된다. 통로에서 로봇처럼 관절을 꺾듯 움직이던 여성 무용수는 이완된 몸동작의 남성 무용수에 의해 무대로 옮겨진다. 자기 정체성을 잃고 어둠속에 스스로를 가두려던 이가 세상으로 불러내지는 듯하다. 한편 무대에서는 무용수들이 둘씩 짝을 이뤄 움직인다. 한 방향을 보며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는 커플, 비슷한 듯 다른 동작을 하는 커플, 마주 보고 서서 엇갈리는 동작을 보여주는 커플 등은 현대인들이 삶과도 닮아있다. 바쁜 생활 속에 모두가 비슷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개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른 삶의 모습들을 갖고 있다. 통로의 커플도 어느새 이들 속에 섞여 있다.

현대도시사회는 관음증의 사회이기도 하다. <블랙>은 이런 현대사회의 모습을 두 가지로 보여준다. 색소폰 소리가 울려 퍼지고, 살 색 복장의 무용수들은 재즈선율을 타고 느릿느릿 유연하게 움직인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막 사이로 수평으로 비치는 조명은 막의 움직임에 따라 신체 부위를 위아래로 흩는다, 어두운 배경이 주는 극명한 대비 효과로 몸의 윤곽들은 더욱 부각 된다. 관객은 부지불식간에 관음증적 시선의 참여자가 된다. 다시금 조명이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고, 그때마다 무용수들은 각기 다른 구성으로 춤을 춘다. 마치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마다 찍히는 사진을 보는 듯하다. 혹은 어두운 밤 열 지어 서 있는 아파트 창문을 통해 맞은편 아파트 창문 안을 우연히 볼 때 보이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동과 통신수단 발달로 세계의 거리는 좁혀졌지만, 개인들 간의 소통은 줄어들고 있다. 바야흐로 “혼(밥)”의 시대다. 고립감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이들 또한 점점 늘고 있다. SNS을 비롯한 온라인상에서는 각자 자신들의 이야기를 올리고, 어쩌면 일평생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를 타인의 삶을 관찰한다. 어둠은 익명성의 현대사회와 닮아있다. 어둠의 해소는 단번에 이뤄진다. 긴 까만 천을 치마처럼 입은 무용수가 나와 앞서 등장한 무용수 뒤로 바짝 붙어 천을 뒤집어씌운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천의 형태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의 보아뱀을 연상시킨다. 격렬한 몸의 움직임이 천 밖으로 드러나다 천의 흔들림은 잦아든다. 무용수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천속에 누워있는 무용수를 빙 둘러싸고 소리로서 슬픔을 표현한다.

음악은 다시 흥겨워지고 모두 각자 자유롭게 춤을 추기에 여념이 없다. 저마다 각기 다른 평상복 차림으로 한참 동안 춤의 열기를 보여준다. 공연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공연 시작에서 보여줬던 무용수들의 춤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하지만 공연 초반과 달리 몸의 동작들은 여유가 있고 자연스럽다. 마치 한 줄기 빛이 어둠의 세계를 바꿔놓았음을 알리는 듯한 끝맺음이다. 다층적 구성으로 보여준 어둠의 세계에 비해 단조로운 구성의 빛의 세계는 다소 아쉬움을 남겼다. 또 한 류장현이 <블랙>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어둠의 역할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어둠과 빛의 “관계성”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뤄졌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관된 주제의식 하에 독창적 어법으로 다양한 표현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은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