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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로 펼쳐진 45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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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해외초청작으로 선보인 폴리시 댄스 시어터의 〈45〉는 1973년 설립된 폴리시 댄스 시어터의 45주년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작품으로, 이미 작품명에서부터 그 의미를 짐작하게 한다. 45년이라는 긴 시간을 50분의 짧은 공연 시간 안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까? 안무가 야체크 프시비워비치는 폴리시 댄스 시어터의 역사를 45년이라는 시간과 무대라는 공간을 두 축으로 하여 집단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무용단과 무용단을 구성하는 개별적 존재인 무용수들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선형성과 비선형의 교차 속에 돌아보고자 하였다. 기하학적 구성이 돋보이는 안무는 단순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타악기의 리듬에 맞춰 자유롭고도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역동적인 몸의 움직임을 통해 펼쳐진다.

시계 소리에 맞춰 무대 중앙으로 모여든 무용수들은 세로로 일렬을 만든 다음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자신만의 동작을 보여준 후 이름을 말하고 열의 끝으로 가서 다시 열의 일부가 된다. 몸이 갖는 공간적 한계 속에서 최대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려는 듯 팔다리를 길게 뻗는 동작들은 무용수들의 또 다른 이름처럼 보인다. 열 안의 무용수들은 하나둘 제자리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임은 점점 커지고 때로는 몸이 열 바깥으로 이탈하지만, 곧 다시 열로 복귀한다. 마치 각기 다른 개성의 무용수들이 공동의 정체성을 갖는 무용단의 이름 아래 모였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느덧 무대 위에는 두 명의 무용수만이 각자 다른 움직임을 보여준다. 무용수들은 다시 이들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열을 만들었다 해체하기를 반복한다.

무대가 갖는 3차원의 공간성은 수직과 수평적 구성의 안무를 통해 강조된다. 무용수들은 인간 탑을 쌓듯 모여들어 구조물의 형태를 만들었다 허물어트린다. 혹은 무대 좌우로 이동하며 다양한 형태로 군집을 이뤘다 해체하기를 반복하며 평면적인 구성을 만들어낸다. 구조물은 대형 조각상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무용수들의 끊임없이 움직임을 통해 무용 예술의 비물질적 성격을 알림과 동시에 구조물이 개인들의 집합임을 보여준다. 또 한 무리 지은 움직임 속에서 홀로 움직이다 외따로 남게 되는 무용수는 새로운 군집으로 다시 합류하고는 한다. 집단과 개인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함께하는 방식은 무용단의 이름으로 매번 새로운 작품을 함께 무대에 올리면서도, 그 안에서 무력화되지 않는 개별 무용수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종종 개인의 존재는 집단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때로는 개인은 전체로서 보다 분명한 자기 색깔을 보여준다. 앞서 보았던 일렬 만들기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모든 무용수가 같은 동작을 차례로 할 뿐이지만, 몸 전체, 혹은 상체를 크게 움직이는 방식을 통해 직선적이기보다 리듬감이 부여된 곡선적 흐름을 갖는다. 동작을 통일시키며 무용수의 개별성은 사라지지만, 열에 따른 동작의 변화는 다양한 형태의 열을 만들어낸다. 손의 움직임 또한 주목할 요소다. 손가락 관절을 이용한 섬세한 동작이 아닌, 마치 세부 묘사가 생략된 조각상의 뭉뚝한 손처럼 모아쥐거나 손바닥을 편 채 손목관절을 꺾는 방식 등이 주를 이룬다. 이때 손은 개별적이기보다, 팔로부터, 더 나아가 몸통으로부터 이어지는 신체의 한 부분으로 인식된다.

양손을 위로 올리며 드럼 리듬에 맞춰 양다리를 교차시켜 앞으로 걸어오는 두 무용수의 모습은 닮아있다. 하지만 객석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다른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는데, 움직임의 차이는 점차 커진다. 두 무용수는 한 무대에서 각기 다른 동작으로 각자의 공간을 만든다. 마주 본 채 상반된 동작을 하거나, 나란히 같은 동작을 한다. 대상은 공통의 특성을 바탕으로 “장미”, “의자” 같은 명사로 범주화된다. 하지만 장미라는 이름의 수많은 꽃은 실제로 모두 같지 않다. 각각의 장미는 비슷하지만, 다르다. “한국인”과 “폴란드인”이 구별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한국인이 동일하지 않다. “폴리시 댄스 시어터” 역시 그들만의 색깔로 다른 무용단들과 구별되지만, 그들의 작품도 단원들도 모두 각기 다르다.

큰 원을 그리며 돌던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더니, 어느덧 하나둘 원 가운데로 모여들며 원은 해체되고, 조형물의 형태로 탈바꿈한다. 조형물은 해체되고 재형성되기를 반복한다. 폴리시 댄스 시어터의 이름과 정체성으로 45년 동안 지속해 왔지만, 여러 차례 구성원의 교체가 있었고, 그에 따라 무용단의 색깔이나 작품도 변화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공연의 마지막에 이르면 한 무용수가 하루 8시간으로 시작하여 한 주, 한 달, 한 해의 단위로 시간을 계산하여 말한다. 이는 바로 45년간 폴리시 댄스 시어터의 이름으로 활동했을 무용수들의 시간임을 알 수 있다. 각기 다른 이름을 가진 각각의 무용수가 모여 폴리시 댄스 시어터가 되었고, 하루하루의 시간이 모여 45년의 역사가 이뤄졌음을 확인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