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현대무용축제인 국제현대무용제(모다페, MODAFE)가 제39회를 맞아 5월 14일부터 29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2주 동안 화려하게 펼쳐졌다. 올해부터 (사)한국현대무용협회를 이끌게 된 이해준 회장이 취임한 후 처음 치러진 이번 행사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변화된 환경 속에서 해외 무용 단체들의 참여 없이 국내 무용 단체들로만 구성되었다. ‘Little Heroes, Come Together’를 축제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시민들과 예술인들을 작은 영웅으로 상정하고 어려운 시기를 함께 이겨내자는 의미가 돋보였다. 그런 만큼 규모의 화려함보다는 내실에 힘을 기울인 것이 이번 축제의 미덕일 것이다.
MODAFE Choice, 축제가 선택한 안무가들(5월 1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축제의 관문을 이경은, 김설진, 정영두, 안애순이 열었다는 것은 모다페의 방향성이 국내 안무의 부상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첫 무대인
댄싱9의 스타 김설진은 자신이 예술감독으로 있는 무버(Mover)의 이름으로 김기수, 김봉수, 서일영과 함께 <섬>을 올렸다. 이들에게 ‘섬’은 삶이며, 안주하건 탈출하건 치열하게 도전하건 세속의 모습으로 그려진 점이 흥미로웠다. 네 명의 무용가들은 저마다 자신의 ‘섬’에 사는 사람들을 대변하면서 때로는 함께하고 때로는 개별화된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무버의 안무방식은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지만 네 명의 움직임에서 공통으로 스트릿댄스의 분절성이 두드러졌다. 서로 밀착, 분리의 과정을 반복할 때 분절적 움직임은 강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김설진에게 이 작품은 창작의 완성보다는 변화의 과정에 초점을 둔 습작일 것이라는 느낌을 준 것은 음악 때문이다. 15분간 비트 음악 외에도 클래식 음악과 영화음악 등 작품에 사용된 음악의 스펙트럼이 너무 넓고 변화가 많았다.
안무가 정영두가 직접 춤을 춘 <닿지 않는>의 12분은 안무가와 무용수라는 임계점에 선 무용가의 내면이 표출된 시간이었다. 정영두 특유의 의식적 흐름이 박영소와 임지혜의 가야금 연주와 어우러져 차분하고 관조적으로 그려진 작품으로 특별한 변형이나 역동적인 해체의 순간이 없이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에너지가 이어졌다. 조명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속에서 이미지, 감정, 기억이라는 감상들이 다소 모호한 장면으로 연출된 점은 아쉬움을 주었다.
모다페가 국립현대무용단 전 예술감독 안애순에게 헌정하는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안애순프로젝트의 는 안무가 안애순이 걸어온 20년간의 발자취를 정교하게 직조한 작품이었다. 컨템포러리댄스의 선봉에 선 모다페의 지난 20년간의 성장은 안애순이 2000년대 이후 컨템포러리댄스 안무가로 성장한 시기와 맞물리기에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안애순이 과거에서 호명한 작품들과 무용수들이 자신의 몸에 아카이빙된 움직임을 색다른 방식으로 안무자에게 헌정하는 모습은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무용수들이 자신의 몸으로 기억하는 재료들을 수집, 나열, 편집, 재구성하는 모습은 조작적 재현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살아있는 춤 아카이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특히 옆 커튼을 열고 준비공간까지 오픈한 확장 무대에서 위아래로 교차하는 조명기 배턴들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은유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드러냈고, 각자의 개성 있는 춤으로 공간 곳곳을 채운 무용수들의 표현에는 안무자에 대한 오마주가 물씬 풍기었다.
The New Wave #2, 축제의 새 물결(5월 22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춤판야무, 이세승, 고블린파티를 ‘뉴 웨이브’로 아울러 표현한 것은 현대무용계 세대교체기의 이상 징후로 보인다. 안무 경력 측면에서 이세승은 춤판야무의 금배섭과 고블린파티의 임진호, 이주성, 지경민, 이경구에 비해 ‘떠오르는 안무가’이다. 고유한 안무 스타일을 안착한 춤판 야무와 고블린파티를 ‘새 물결’로 호명한 것도 어떤 의미인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날 공연한 작품들의 공통점이라면 안무가들의 탐구력과 개성 강한 스타일에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욕망을 고전 <별주부전>에서 토끼 간을 빼 먹으려는 용왕의 욕심에 비유한 춤판야무의 <간 때문이야!>는 드라마터그 김풍년, 안무가 금배섭, 그리고 작창 안이호의 황금 호흡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공간을 채우는 오브제처럼 멀뚱히 앉아있거나 무용수들과 같이 움직이는 안이호의 소리와 몸짓은 고전의 적극적인 해체를 보여주는 장치였다. 메트로놈의 반복적인 기계음에 기대어 네 명의 무용수(금배섭, 이형우, 이상훈, 김종신)들이 강박적인 움직임으로 욕망을 표현하거나 각자의 고조되는 욕망으로 관계가 파국에 치닫는다는 교훈적 표현은 이 작품의 묘미였다.
컨택 임프로비제이션과 리서치 기반 안무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세승은 <한>(恨)을 통해 한국적 정서를 해체하는 실험을 하였다. 이세승에게 ‘한’은 전통춤 <살풀이>을 떠올리게 하는 상투적 기제이며 추상적인 정서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살풀이>와 연관된 어떠한 움직임도 등장하지 않는다. 하얀 옷을 입은 두 명의 여성 무용수(김단우, 손지민)가 가까운 거리에서 한국춤 동작을 주고받는 모습을 반복할 뿐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단순한 동작이 무한정 반복되니 언뜻 지루함을 주지만 이는 이세승의 의도적인 배치라고 본다. 그가 발견한 ‘한’이라는 정서는 “감정의 전이”에 불과하며 그 골자를 동작의 주고받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은 조명, 의상, 동선, 움직임 패턴의 낯익음이었다. ‘한예종 스타일’ 혹은 ‘안성수 스타일’을 벗어나는 것이 ‘떠오른 안무가’ 이세승의 당면 과제인 듯싶다.
<소극적적극>은 2019년 초연 당시에 덕후(오타쿠) 세계를 진지하게 탐구해 보이겠다는 안무 의도와는 달리 뚜렷하게 포착되는 것이 없어 고블린파티의 덕후들에게 실망을 안겼던 작품이다. 그런데 이번 무대를 통해 고블린파티 특유의 블랙 유머를 장착한 작품으로 변신하였다. <아이고>, <혼구녕>, <불시착>, <구제>에서 그랬듯이 고블린파티의 임진호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소재는 ‘죽음’이다. 임진호가 여러 차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3대째 장례지도사를 하는 집안 특성상 죽음은 그에게 친숙한 일상이다. <소극적적극>에서도 죽음이 등장한다. 이번 작품에서 죽음은 옷을 입은 해골이다. 이 해골은 네 명의 무용수(임진호, 이주성, 지경민, 이경구)와 함께 춤을 추는데, 그 움직임이 너무 자연스러워 제5의 무용수로 여겨질 정도였다. <소극적적극>의 죽은 자가 산자와 춤을 춘다는 설정은 산자의 적극적 죽음과 죽은 자의 소극적 삶을 반추하게 했으며, 웹툰 한 편을 보는 듯 관객의 시선과 감정을 사로잡았던 작품이었다.
Center Stage of Seoul, 축제의 중심 무대(5월 23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의 브랜드인 <바디콘서트(remix)>는 10명의 무용수(김보람, 이혜상, 신재희, 진다운, 최경훈, 김헌호, 남가영, 이희은, 강승현, 유동인)가 춤과 음악의 열정적 하모니로 관객들을 중독시키는 작품이었다. 지난 10년간 앰비규어스댄스컴퍼니는 이 작품으로 국내외 여러 무대를 오가며 꾸준히 성장해 왔다. 보이지 않는 음악을 몸으로 보이도록 했다는 안무가 김보람의 설명처럼 강렬한 비트를 끊임없이 움직임으로 가시화하는 것이 이 작품의 포인트이다. 누구나 아는 음악,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움직임을 부담스럽지 않게 표현하기에 일부 평자는 “거칠다”고 표현하지만, 그만큼 김보람의 안무는 기존의 춤 장르나 개념을 벗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그에게는 관객들을 춤의 장력으로 끌어들이는 치밀한 연출력이 있다. 김보람은 <바디콘서트>에서 관객들과 공유된 광장을 놀이터처럼 삼다가 어느 순간에 내재율이 있는 구조적 장면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치는 내공을 발휘하였다. 강렬한 음악 후의 폭풍 전야와 같은 무음, 스트릿댄스 움직임과 발레 움직임의 공존, 팝송에서 가곡에 이르기까지 모든 리듬에 맞춘 현란한 움직임의 연출은 김보람의 안무 정체성을 대변하였고, 몸으로 이뤄내는 춤 콘서트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했다.
컴퍼니제이(Company J)의 <놀음-Hang Out>은 조선시대 풍속화의 현전 혹은 고전과 현재의 동시성을 보게 한 작품이다. <동래학춤>을 모티브로 했지만 춤의 원형적 탐구보다는 바로크 음악의 정형성에 귀족적 느낌을 반영하고, <동래학춤>에 담긴 양반들의 정서를 녹여내고자 했다. 여성 무용수들이 농염하면서도 유머가 깃든 움직임 구절을 반복하는 모습은 신윤복의 풍속화 속 기생들이 현재에 타임슬립(time-slip)한 듯 세련된 구상이었다. 남성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과거 한량들의 놀음(hang-out)을 보는 듯하였고, 한 편의 연애사건이 일어날 듯 말 듯 하며 관객의 흥미를 유발했다. 무용수들(김정수, 노보, 박주환, 손정현, 신상미, 염정연, 이진우, 임유정, 정혜지)은 클래식음악과 컨템포러리음악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상반된 두 요소를 조합하기 위해 교묘하게도 반복적 움직임을 이용했지만, 이것은 안무가 정재혁이 속해 있던 트리샤 브라운 무용단의 안무방식이기도 했다. 안무자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단조롭지만 위트있는 움직임으로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는 노력은 포착되었으나 마지막까지 밀도를 유지하는 끈기가 필요했다. 안무가의 두 스승인 트리샤 브라운과 안성수의 그림자를 넘어 동서양, 시대적 간극, 음악과 춤의 관계를 자신의 관점에서 어떻게 교호시킬 것인가는 여전히 탐구형으로 남았지만, 전환기에 선 정재혁 안무가의 현재 관심사를 읽을 수 있었던 수작이었다.
로댄스프로젝트(Roh Dance Project)의 <파편(破片)>은 중견으로 접어든 김은지, 김희원, 이동하, 이대호가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인식이다. 삶의 완숙기에 들어선 네 명의 무용가들은 자신의 인식을 탄탄한 기량에 담아 완성도 있게 표현해냈다. 자신의 상황, 목적, 그것에 의해 재해석되고 왜곡되는 파편화된 기억들이 개성 있는 춤어휘와 문법으로 세련된 문장을 만들어냈으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무용수들의 듀엣과 집중도를 높인 솔로는 춤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시각화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원형으로 돌아가는 무대는 한 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을,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기억을 대표하면서 시종일관 정제되고 감각적인 장면이 연속되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25분간 네 명의 무용수들이 펼치는 유려한 움직임에 압도된 숨죽인 객석의 긴장감은 무용공연의 현장성이란 무엇인지를 즉각 알아차리게 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현장과 온라인의 만남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공연장에서 관객과 직접 만나 호흡을 주고받으며 현장감을 공유하는 기존의 무용공연 방식이 온라인 중계공연으로 이동하고 있다. 현재 온라인에서 공연을 중계하는 방식은 대부분 실시간 스트리밍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녹화된 공연 실황을 편집된 영상물 형태인 2차 저작물로 온오프라인 매장에서 유통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일찌감치 앨범(음원 및 음반)과 공연(콘서트 및 행사)으로 시장을 이원화한 케이팝(이전에는 대중가요)에서도 방송을 통해 공연을 송출하고 이것을 다시 앨범과 공연의 수익으로 견인하고 있는 것처럼 무용에도 공연 중계가 코로나19를 맞아 관객확보와 공연수익 확장의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모다페는 개막과 폐막 공연을 제외하고 축제기간 내내 현장 공연을 네이버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이원화 방식을 취했다. 공연이 중계되는 채널에서는 시청자 관객이 공연을 보며 실시간으로 댓글을 올릴 수 있도록 하였는데, 현대무용을 처음 보는 사람들로부터 ‘재밌다’라는 반응이 적지 않게 올라와서 눈길을 끌었다. 주최 측에서는 실시간으로 관객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파악할 수 있고, 여러 방면에서 정보 수집의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한 무용공연이 보편화된다면 잠재적인 무용관객의 접근성이 높아질 것이며, 일반 대중은 다양한 작품을 경험하며 특정 스타일에 취향을 갖게 되고 나아가 애호가로 변해가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또한, 온라인 공연 중계는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집중된 공연예술 시장을 확장하고 국내의 다양한 안무가를 소개하는 창구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모다페 중계 방송을 계기로 무용계가 네이버TV나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완성도와 대중성을 갖춘 무용공연을 지속해서 개발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참여_서현재, 윤단우, 이지현, 장지원, 최해리
대표 교정_윤단우, 최해리
사진제공_모다페 사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