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드 블랙> 콘셉트 사진 ⓒBAKi
남정호 신임 예술감독이 부임하며 새로운 시즌을 시작할 예정이었던 국립현대무용단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코로나 시국에서 개점휴업 상태로 상반기를 보내고 있다. 4월에 시즌 개막 공연으로 준비했던 <오프닝>에서는 신창호 안무의 <비욘드 블랙>과 안성수 안무의 <봄의 제전>을 함께 공연할 예정이었지만 잠정 연기하고 <봄의 제전> 지난 공연 실황을 온라인에서 상영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5월에도 김보람 안무의 <철저하게 처절하게>, 안성수 안무의 <혼합>, 정철인 안무의 <0g>, 스웨덴 안무가 페르난도 멜로 안무의 <두 점 사이의 가장 긴 거리>를 온라인에서 상영했고, 6월에는 4월 예정작 <비욘드 블랙>을 온라인 상영으로 초연했다.
인공지능 안무가가 만들어낸 움직임
춤추는 인공지능과 무용수 ⓒAiden Hwang
제일 먼저 떠오른 질문은 ‘블랙은 무엇일까?’였다. 작품에서 직접적으로 답을 주지는 않지만 제일 근접하다고 생각되는 단어가 초반 내레이션 중 나온다. 그것은 ‘두려움’이다. 작품 중반부터는 이 두려움의 영역에서 무용수들이 빠른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이 개별 움직임들은 인공지능 협력안무가 ‘마디’가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학습하여 만들어낸 알고리즘을 통해 안무한 움직임일 것이다. 이 알고리즘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움직임을 목표로 한다.
ⓒAiden Hwang
작품 안에서 무용수들은 군복과도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다. 흉부 왼쪽의 이름표에는 4열 3행의 12점 구성의 점자가 4개 찍혀 있다. 시각장애인이 쓰는 점자를 찾아보니 1994, 1996 등의 숫자가 나온다. 무용수들의 출생연도가 아닐까 짐작된다. <비욘드 블랙>의 인물은 주민등록번호보다 더 짧은 숫자가 이름이 되어 자신을 나타내는 세계에 있다.
ⓒAiden Hwang
내가 본 것은 춤이 맞을까
<비욘드 블랙>은 인간의 경험이 데이터로 저장되어 어떻게 새로운 춤을 만들어내는지, 매우 흥미로운 화두를 던진다. 그러나 궁금증이 일어나는 동시에 의구심 또한 막을 수 없다. 이렇게 움직임을 점과 선으로 코딩하여 알고리즘을 만들고, 새로운 움직임을 재생산하는 것을 안무의 3요소인 시간, 공간, 에너지에 대입했을 때, 에너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얼마든지 조작, 계산, 예측이 가능한 요소들이다. 모든 행위자가 에너지를 동일하게 재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혹시 이러한 에너지와 감정 등 인간의 것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고 예측이 불가능한 몇몇 요소들로써 기술의 한계를 말하고 인간을 우위에 두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마디라는 인공지능 안무가에게 움직임을 맡기는 기술적 시도에 치우친 나머지 채 30분이 되지 않는 짧은 공연 시간 동안 보여준 군무는 마디가 만들어낸 동작들의 반복과 배치가 주를 이뤘다. 영상에서 호흡이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강조된다거나, 음악과 동작이 딱 들어맞지 않고 살짝 어긋난다거나 하는 등 안무가의 의도인지 기술적 허점인지 선뜻 판단하기 어려운 장면들도 간간히 있었다. 안무에 대한 마디의 주권이 무용수가 수행할 동작의 생성 정도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물인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의 움직임 학습, 재창조 사례 ⓒAiden Hwang
이 작업은 실제 공연이 아닌 편집이 가미된 댄스비디오 형식으로 선보였지만 막상 현장 공연으로 무대에 올려졌을 때는 영상만큼의 시각적 효과가 관객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한편으로는 실제 공연장이 아닌 전문가의 편집을 거친 영상이었기에, 작품 안에서 시공간을 넘나들고 철저하게 계산된 타이밍으로 안무가의 의도를 더욱 효과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만약 영상이 안무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 더 적합한 매체로 떠오른다면 현장 예술인 무용은 앞으로 잘 만들어진 영상과 경쟁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는 셈이다.
공연을 다 보고 나서 모니터 앞의 관객들은 ‘내가 본 것은 춤이 맞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춤이라기보다는 춤과 어떤 형태, 혹은 예술과 과학의 접목 정도로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이 영상은 작품의 오라로 어떤 잔상을 남기기보다는 미래에 춤이 어떻게 전달되고 표현될 수 있을까 생각해볼 수 있도록 질문을 남기는 데 더 의의가 있는 듯하다.
안무의 확장을 넘어 재생산으로
온라인 상영 첫날, 네이버TV 채널에서 작품이 상영된 후 안무가 신창호와 참여 무용수들의 인터뷰가 이어 상영됐다. 인터뷰는 마디와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관객들에게 어떤 작품인지 보다 자세히 알리기 위해 넣은 요소였지만 전반적으로 설명이 충분하지는 못해 인터뷰를 통해 작품을 더 잘 이해하게 되지는 않았다.
또한 공연이 2회 상영되고 나서 다음날 1회 추가 상영이 있었는데, 유튜브에서 공연이 추가 상영되는 동안 채팅창에서는 신창호가 본인 계정으로 접속해 상영 중간중간 올라오는 반응과 질문들에 실시간으로 답해주었다. 분명히 이러한 무용의 수용 방식은 기존의 댄스필름, 비디오댄스 식의 온전한 감상의 대상으로서 ‘작품’을 지양하고 소통을 지향하고자 한다. 이미 우리에게 깊게 침투한 미디어 환경에서 무용이 바라보아야 할 길이 어디인지, 깜깜한 어둠에 있는 그 길을 같이 한번 발을 내디뎌보자는 권유로 느껴지기도 했다.
안무가 신창호와 출연 무용수 인터뷰 영상 중
신창호는 몇 년 전부터 미래의 시간에서 추어질 춤을 바탕으로 안무작을 발표하고 있다. 국립무용단의 <맨메이드>가 무용수들에게 기계언어(미래언어)를 씌워 가두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면, 이번 <비욘드 블랙>은 안무가의 방향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 듯했다.
최근 들어 국내 무용계에서는 안무의 개념과 안무가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시도를 쏟아내고 있다. 이제는 확장을 넘어서 안무법의 아웃소싱을 통한 재생산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예술의 창작자가 인간을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인공지능마저 제2의 자아를 지닌 이 시점에서 ‘창작’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예술’의 정의를 ‘인간의 창작과 표현 활동’쯤으로 가르쳐왔고 인간을 동물에게서 구분해낼 수 있는 것은 예술활동이 가능하다는 점인데, 시대가 흘러 단어의 의미가 변화하듯 재정의를 내려야 할 시기가 온 듯하다.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신창호가 <비욘드 블랙>을 통해 던지는 화두는 매우 흥미롭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를 개인 작업으로 진행하거나 인연이 깊은 단체인 LDP무용단과 하는 것이 아닌 국립단체와 협업할 때, 그의 화두는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닌 무용계 전체에 던지는 화두가 된다. 달리 말하면 국내에서 국립단체 정도는 되어야 그가 실험하고자 하는 기술을 실현할 수 있는 예산과 제작 환경을 제공할 수 있기에 이러한 시도는 필연적으로 국립단체의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 국립현대무용단의 기획으로 이렇듯 기술과 예술의 접목을 통해 완성도 있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더 많이 만나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참여_ 서현재, 오정은, 윤단우, 이세승, 이지현
대표 교정_ 윤단우
사진제공_ 국립현대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