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되었던 제34회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은 7월 22일부터 26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무관중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개최되었다. 공연 일정과 횟수, 장소가 변경되고 일부 출연진이 건강상의 이유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부득이하게 올해는 춤작가 10인의 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 다섯 명의 집단리뷰 참여자는 마지막 날인 26일의 신창호·윤명화·최두혁·문영철의 무대를 유튜브로 관람하였다.
새로운 안무의 생산에 주목하며 던지는 질문
26일 공연은 신창호의 〈IT 2.0〉으로 시작되었다. 최근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을 안무 작업에 도입하고 있는 신창호는 지난해 서울무용제 초청작인 〈IT〉와 6월 국립현대무용단과 작업한 〈비욘드 블랙〉을 통해 안무의 변화에 대한 고민을 꾸준하게 보여주고 있다.
〈IT 2.0〉은 예술 생산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AI의 현재와 가장 아날로그적인 예술 중 하나라고 인식되어 온 무용의 관계를 렉처 퍼포먼스 형태로 공연한 작품이다. 신창호는 여성 무용수 박지희와 함께 최초의 프로시니엄 무대에 대한 설명으로 운을 떼었다. 이어 다양한 인공지능 기술을 토대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의 인물을 생성하는 GAN(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 적대적 생성 네트워크), 대략적인 스케치 설정만으로 실제와 흡사한 풍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 아트 애플리케이션 고갱(GauGAN) 등을 선보이며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뒤이어 무용수의 움직임 데이터를 학습해 안무하는 인공지능 ‘마디(Madi)’를 소개하며 새로운 안무의 생산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전작 〈비욘드 블랙〉에서는 ‘마디’를 동작을 생성하는 행위자로 설정하고 협업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일종의 감상자로 설정한다. 후반부에 다다르면 두 무용수는 시간, 공간, 에너지의 변화를 주는 움직임 구를 보여준다. 마디는 이들의 움직임을 이미 저장되어 있는 움직임 데이터들과 견주어 등수를 매기고, 피드백까지 아끼지 않는다. 안무의 생산부터 기록과 평가까지 전 과정을 단숨에 뱉어내는 마디의 능력치를 한껏 뽐내며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시켰다.
그러나 신창호의 무대는 기계와 실제 신체의 움직임, 무용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데에서 멈춘다. 그 질문은 무용의 본질인 신체와 움직임에 대한 강조인지 혹은 기계에 의한 안무에 대한 경고인지 명확한 의도가 읽히지 않았다. 렉처 퍼포먼스 형식을 통해 관객들의 깊은 이해를 꾀했다면 제목에 붙은 ‘2.0’만큼의 정교한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 만약 세 번째 IT 시리즈를 꾸미게 된다면, 그때에는 AI 시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윤명화 〈메타포(Metaphor)〉
정선아리랑에 담긴 여성의 삶에 대한 은유
윤명화의 〈메타포(Metaphor)〉는 과거 한국춤에서 애용하던 한(恨)의 정서와 여성의 고난 극복에 대한 의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정선아리랑의 내적 해석을 여성과 달 등의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는 내용 아래, 전반적으로 음적인 춤사위와 양적인 음악을 기대어 이루어진 작품으로 이해된다.
검은 의상에 붉은 고깔을 쓴 채 등장한 그녀는 응집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무대를 채워나갔다. 검은 겉옷과 고깔을 벗으면 보라색 의상이 선명한데, 보라색은 고귀함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1970년대 서구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보라색이 페미니즘 운동을 상징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가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보라색에 담긴 여성의 고난 극복 의지는 페미니즘과 맞닿아 있었다. 또한 후반부로 갈수록 기다란 흰 천을 사용한 연륜이 담긴 몸짓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며 깊이 있는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했다. 흰 천은 그녀의 작은 체구를 강하게 휘감고 때로는 허공을 향해 뿌려지며 켜켜이 쌓인 여성의 삶의 잔상을 보여주었다. 끝으로 초반의 붉은 고깔과 상반되는 어두운 고깔을 쓰며 마무리하는 모습은 여성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굴레를 표현한 듯 보였다. 전체적으로 의상의 변화와 다양한 소품 사용을 통해 폭넓은 감정선의 흐름을 이어갔으며, 감각적인 조명 디자인을 더해 효과적인 무대 활용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50대 한국무용가인 윤명화는 전통춤에 근간을 둔 창작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현대적 ‘산조’라 할 수 있는 솔로 무대로 중년 무용가로서 본인의 색을 나타내는 무난한 출발을 보여주었다.
최두혁 〈다시 비워지는...〉
다각도로 바라본 무대, 그 속에 남은 삶의 무게
가볍게 몸을 푸는 두 무용수와 무대를 정돈하는 스태프들이 한눈에 보이며 막이 올랐다. 그러나 곧 지젤 의상을 입고 등장한 최두혁은 ‘지젤’ 솔로 바리에이션을 시작하고, 무대 배경에는 가상의 관객들로 꽉 찬 객석의 모습이 투사된다. 그는 실제 극장 내 관객석을 뒤로 한 채 무대 뒤 가상의 관객과 조우하며 움직임을 이어갔다. 비록 그가 그리는 지젤은 가녀린 시골 처녀를 떠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발레리나의 우아함을 쫒는 투박한 곡선은 묘한 웃음과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동시에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호하는 영상 속 관객들의 모습이 무대 배경을 가득 채웠다. 벅찬 감동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관객부터 두 손을 모으며 환한 미소로 행복함을 한껏 드러내는 관객까지, 거리두기가 익숙해진 오늘날 잊고 있었던 꽉 찬 객석의 활기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한 안무가의 참신한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이후 배낭을 매고 등장한 최두혁은 휴지를 꺼내 화장을 지우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으며, 다시 현실의 무용수로 복귀했다. 이는 전 장면과 대비되며 여러 가지 상징이 교차되는데, 그가 경험한 이방인이 되는 감각을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다. 각진 정장을 입고 불어를 읊는 남성 무용수가 등장하여, 무대를 좌우로 나누어 전형적인 춤과 행위의 묘한 대위를 이룬다. 이번에는 무대를 앞뒤로 나누어 움직이는 두 무용수의 모습을 카메라 무빙을 더하여 비추었다. 영상이 최두혁을 위주로 비춰 전체 움직임의 대비와 조화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
두 사람의 춤이 멎어가고 무대 한가운데 배낭만이 남아 있다. 덩그러니 남은 배낭은 각자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나누던 두 여행자의 잔상을 남기며, 여러 상징들이 조합된다. 소박하게 풀어낸 최두혁의 무대는 삶의 무게를 휴식과 비움의 미학으로 되돌아보게 했으나, 흐릿한 엔딩이 다소 아쉬운 작품이다.
문영철 〈소풍〉 ⓒ 이동헌
이순(耳順)을 맞이한 발레리노의 희로애락에 대한 성찰
문영철의 〈소풍〉을 끝으로 모든 공연은 마무리되었다. 천상병 시인의 시구(詩句)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를 인용하며 인생의 희로애락과 삶, 그리고 죽음을 끌어안는 과정을 발레로 선보였다. 삶이란 이 세상에서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는 소풍의 장(場)이며 최종적으로는 죽음을 통해 하늘로 돌아감을 다룬 것이다. 첫 장면 붉은 저지 천 속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은 태동이다. 짧은 머리에 서포트 차림으로 등장한 그는 소풍을 시작하는데, 트레이드마크인 포인트, 곧고 정확한 다리 테크닉, 부드러운 팔 동작을 통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이후 그는 심플한 조명, 의자, 붉은색과 흰색 장미 등의 오브제를 사용하며 주제를 부각시켰다. 또한 과거 그가 전성기 시절 보여주었던 〈불새〉의 장면과 교차되기도 했다. 후반부 등장한 남성 무용수는 초반부 안무자와 동일한 움직임을, 안무자는 하늘로 돌아감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연출하며 끝을 맺었다. 그러나 작품의 진행과정이 쉽게 읽혀 기대감이 떨어졌고, 안무적 차원에서 움직임이나 구조의 다양함이 필요했다.
올해로 12번째 춤작가 무대를 올린 문영철은, 이순(耳順)을 맞이한 발레리노의 잘 훈련된 신체의 미학을 담아냈다. 그의 절제된 삶 속에 깊이 있는 탐구를 더한 작품을 기다려본다.
1987년 국내 무용가들의 실험정신을 높이고 무용계 발전과 활성화를 위한 취지로 시작된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은 국내 최장수 안무가전으로 각 장르별 중견, 중진 안무가들의 독무 위주 신작을 발표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 지속성뿐만 아니라 방향성을 제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국내 무용계의 중축이 되는 안무가들의 신작은 우리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신진 안무가들에게 꿈의 무대가 된다. 그러므로 ‘춤작가’라는 타이틀의 사명을 지킬 수 있는 작품 개발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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