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에서 미니멀리즘의 목표는 물성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다. 미국의 비평가이자 미술가인 도널드 저드(Donald Clarence Judd)는 최소한의 물성을 반복적으로 제시하면서 표현에 저항하고 본질에 다가가려 한다. LG아트센터에서 디지털 스테이지 ‘CoM On’ 시리즈로 지난 8월 21일 네이버TV를 통해 상영한 <레인(Rain)>은 벨기에를 대표하는 여성 안무가 안느 테레사 드 케이르스마커의 미니멀리즘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흰색의 발이 쳐진 듯이 보이는 반구형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춤을 추는 11명의 무용수들(남 3, 여 7)은 스토리텔링이나드라마틱한 전개 없이도 움직임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가를 증명한다. 이들의 춤은 벨기에 무용단 특유의 원초적 성격이나 폭력성을 수반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유롭지만 정제된 테크닉에 기반을 두고 있다. 스티브 라이히의 음악적 미니멀리즘과 맞물려 동일한 움직임구의 반복, 의상과 음악의 미세한 변화를 통한 그의 절제는 확연하다. 플로어 패턴에 있어서는 예측된 형식을 발견하기 힘들지만 일상적 걷기와 달리기를 통해 포스트모던댄스와 컨템포러리댄스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레인>은 케이르스마커의 음악에 대한 사랑, 그중에서도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 이미 <페이즈(FASE)>(1982), <드러밍(Drumming)>(1998) 등을 통해 라이히의 미니멀리즘을 무용으로 구현한 바 있는 케이르스마커는 2001년에 <레인>을 안무했는데, 그가 이 작품을 발표한 뒤 2000년대에 재즈음악을 사용한 안무작들이 부쩍 눈에 띈다는 것이 흥미롭다. 즉, 이 작품에서 라이히의 철저하게 미니멀한 작법에 맞춘 안무기법이 절정에 이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번 상영은 작품이 초연되고 15년이 지난 2016년 브뤼셀 서크 로열에서 현대음악 단체 익투스의 라이브 연주와 함께 케이르스마커가 새로운 세대의 무용수라고 부르는 이들과 함께 새롭게 공연한 실황 영상으로 이뤄졌다.
ⓒ Anne van Aerschot
무대는 전체적으로 둥글게 구현돼 있다. 세트디자이너 얀 베르세이벨트는 둥글게 나와 있는 앞무대의 라인에 따라 뒤에 가느다란 줄들이 촘촘히 내려진 커튼을 앞뒤 대칭으로 설치했다. 이는 작품이 전개되는 무대 자체가 둥글게 보이는 효과를 일으킨다. 무용수들은 이 커튼이 만들어내는 동세에 따라 나선형으로 등장하며 작품을 시작한다.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커튼은 세밀한 줄들로 이뤄져 있어 빗줄기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춤을 추는 공간은 고요하게 비어 있어 마치 태풍의 눈 같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이 원의 공간에서 무용수들은 급하지 않게 춤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들은 몸의 기울기를 통해 이동하며 군집하였다가 분산하기를 반복하는데 때로는 그 대현이 인위적인 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에서 시지각을 통해 패턴을 발견하는 때처럼 우연이 필연을 발생시킨다. 이를 통해 대체로 카오스처럼 보이나 철저하게 계산에 의한 군무임을 알 수 있다.
기움과 회복에서 시작된 무대의 에너지는 무용수들 각자의 움직임으로 발전된다. 각각의 무용수들이 공연을 시작할 무렵에는 서로 무관한 개별 빗방울로 존재했다면 움직임이 전개되며 조금씩 관계가 형성되는 동안 듀엣 또는 트리오를 교환해나간다. 때때로는 희미한 미소를 짓거나 갑자기 웅크리는 등 안무가의 특징적 제스처들을 볼 수 있다. 무용수들의 긴 팔로 공간의 어느 방향을 가리키며 다른 신체부분들을 움직이는 카운터 테크닉(Counter Technique)이 적용된 움직임도 발견된다. 이러한 동작들의 유래를 유추하다 보면 어느새 트리샤 브라운의 역동적인 몸짓에까지 생각이 닿는다.
전개부를 지나며 작품은 여성 트리오와 남성 트리오를 순차적으로 제시한다. 먼저 제시된 여성 트리오가 같은 동작 순서에 방향만을 바꿨다면 남성 트리오는 시간차를 적극 이용했다. 흠잡을 데 없는 솜씨로 이렇게 제안된 안무의 법칙들은 점층적으로 쌓여가며 더욱 화려한 군무로 거듭난다. 시간이 흐르면서 무대는 다양한 동작이 반복되는데, 반복하는 개별 동작 간의 차이와 동일한 동작의 반복에서의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결국 공간은 반복이 차이가 되는 아이러니로 가득 차고, 관객은 모든 표현적 기대치를 제거 당한 채 오로지 움직임 이미지에 몰두하게 된다.
무용수 전체가 무대에 올랐어도 특정 공간을 비우고, 대립한 공간에서 군무 이미지를 만드는 식으로 내러티브를 암시하거나 작위적으로 보이는 공간 상태를 만들지 않는다. 무용수들은 반복과 차이가 쌍을 이룬 움직임과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이동만을 반복한다. 마치 수많은 물줄기가 반복해서 내리는 비(Rain)처럼 말이다. 무대 뒤에 드리운 장치는 빗줄기의 이미지이자 반복과 차이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이다. <레인>은 무용적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와 떨치지 못한 표현성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작품인 듯하다.
ⓒ Anne van Aerschot
무용에서 미니멀리즘 선구자는 미국 안무가 루신다 차일즈이다. 루신다 차일즈의 작품들을 보면 일직선의 동선을 강박적으로 사용한다. 이와 같은 법칙의 수용은 무용수들의 쉼 없는 등퇴장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케이르스마커는 스스로 언급하기도 한 것처럼 나선형으로 그리드의 딱딱한 기하학을 탈피한다. 로사스의 공연이 때로는 굉장히 감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이로부터 유래한 바도 있다. 무대 전체가 비워지는 순간은 없다. 그럼에도 무용수들은 바람에 휘날리듯 퇴장했다가 재등장하는데 이때 보라색 의상으로 갈아입는다. 그러나 상의만 갈아입거나 원피스로 바꾸거나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극적인 변화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작품 요소에 있어 점진성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감탄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작품의 중반에 이르면 움직임의 역동성은 한층 더해간다. 무용수들 전체가 커튼 뒤에 머물다가 뜀박질로 들어오는 순간에 악기 셰이크 소리가 더해지며 빗줄기는 굵어진다. 물장구를 치거나 물의 파편을 튀기기도 하는 동작들이 흥겨움을 숨기지 않는다. 때로는 집단이 여성 무용수를 한껏 들어올리며 싱크로나이즈를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이러한 부분들은 약간의 유머를 자아낸다. 찰나에 적극적으로 파트너십이 이뤄지며 황홀경으로 이끈다. 객석에서 관람했더라면 무대로 나아가 그들과 함께 한껏 물장난 치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보랏빛 조명은 더욱 어두워지며 무대는 폭풍 전야의 기운을 머금는다. 이런 고요하나 불길한 시간에서 한 여성 무용수는 독무를 선보이다 다리를 뒤로 높이 들며 밸런스를 잡는데 이 장면은 조용한 불안을 극대화한다. 한동안의 어두운 분위기를 지나 무대는 다시 밝아진다. 후반에는 유리창에 물줄기가 흘러내리는 듯 깊은 플리에로 밀도를 더한다. 라이히의 음악이 대칭을 이뤄 구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무용수들의 의상도 처음으로 되돌려져 원래의 색감을 회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빛나는 의상을 입은 사람을 배치하거나 몸의 기울임을 사용하였음에도 처음과는 전혀 다른 집단의 구도를 통해 차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윽고 작품의 종결에서 보여준 연출은 과연 70분의 대장정을 합당하게 마쳤다고 보일 만큼 원숙한 표현이었다.
<레인>에서 구현된 무질서 속의 질서, 질서 속의 무질서의 형태는 동래학춤의 군무 속 즉흥춤사위와 학 무리의 호흡을 닮아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또한 무용단의 특징이라고도 밝힌 ‘음악이 보이는 춤’은 호흡을 약속하듯 음악의 리듬 또는 박자를 소통하고 같이 사용하는 모습들은 안무자와 무용수의 소통이 원활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반적인 음악의 중심이었던 피아노 선율은 멜로디보다도 타악기처럼 표현되는 것으로 보였다. 장고가락이 몰아가듯 풀어지고 다시 또 휘몰아가는 타법이 무용수들의 동작에 힘을 붓는 듯이 생각되었다.
20년 가까이 지난 작품인 만큼 <레인>은 현재의 시각으로는 다소 올드한 느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케이르스마커의 안무 성향을 명확히 반영한다. 움직임에 충실하며 쉼 없이 반복을 더해 에너지를 증폭시키고 영상과 의상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분위기를 전환하고 있다. 빨라지는 음악에 맞춰 스피드를 더해 역동성을 배가시키고 남녀 움직임을 바탕으로 힘의 균형과 조화를 도모한다. 감정은 배재되었으나 엔딩 신에서 무음악에 뛰어다니는 무용수들의 발걸음 소리와 무용수가 건드려 흔들리는 백드롭 발이 빗방울의 질서와 무질서를 음악과 춤으로 구현한 그녀의 감성을 담아냈다.
ⓒ Anne van Aerschot
LG아트센터에서 지난 5월 시작한 디지털 스테이지 시즌1 프로그램(음악 3, 무용 6)은 조회수가 30만 뷰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디지털 시어터’, ‘집관’ 등의 신조어와 함께 새로운 공연예술 관람의 형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객들은 만족도 조사에서 90% 이상이 재관람 의사를 밝히며 이 같은 온라인 상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LG아트센터는 7월 4일부터 시즌2 프로그램(연극 2, 무용 4, 서커스 1)을 선보이며 아직 기획공연 시리즈에서 선보인 적 없는 공연단체의 작품을 포함시켰고 스트리밍 시간도 48시간으로 늘려 여유 있는 관람이 될 수 있도록 했다. 다음 시즌부터는 유료화를 논의 중이다.
온라인 공연 관람의 특징 중 하나는 관람자들끼리 실시간 채팅으로 감상을 나누는 것인데, LG아트센터 상영작에서는 관람자가 작품에 대해 질문을 하면 LG 온라인 담당자가 이해를 돕는 간결하고 핵심을 짚어주는 답변을 해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안무가와 음악 등 작품에 대한 질문을 적극적으로 주고받는 실시간 채팅은 관람자들의 만족도가 여실히 느껴졌다. 작품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댓글에는 담당자가 안무가의 다른 작품들을 추천해주는 답글을 달기도 하고 관람자는 앞으로 LG아트센터 기획공연에서 보고 싶은 단체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화답하기도 했다. 국내 온라인 상영작의 채팅창이 절반 이상이 출연자를 응원하는 지인들의 메시지인 것과 비교하면 고무적인 현상이다. LG 디지털 스테이지 관람자들은 기존 기획공연들에 대한 경험을 쌓은 공연애호가들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에 나타난 자연스러운 결과로 보인다. 코로나19의 장기화와 더불어 앞으로 온라인 상영에 유료화 방식이 도입된다면 올해 선보인 디지털 스테이지의 프로그램 구성 및 관람자들의 참여도와 만족도는 향후 고정 관객들을 미리 확보할 수 있는 선견지명의 마케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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