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무용제가 어느덧 41회를 맞이했다. 올해는 경연 형식으로 치러지는 8편의 공연 외에도 국가무형문화재 4인의 전통춤과 (사)한국무용협회에서 지정한 명작무 5인의 전통춤, 여성 중견무용가 4인의 창작무대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열정’, ‘남판’, ‘여판’으로 명명된 세 가지 춤판 시리즈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각각 올려졌다. 코로나19 여파로 프로그램상의 모든 공연은 네이버TV와 유튜브 채널을 통해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었는데, 6명의 집단리뷰 참여자는 11월 6일(금) 공연된 ‘무.념.무.상(舞.念.舞.想) II’를 관람하였다. 기획의도는 여전히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여성 무용수 4인이 무용가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기획의도에 부합하는 것은 김지영과 이경은의 무대였다. 다른 두 작품은 파트너의 비중이 크다 보니 그녀들이 이끄는 춤을 기대한 관객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컸다.
첫 무대는 전체 공연을 열어주는 한 편의 파드되였다. 유회웅이 안무하고 김지영이 감독과 연출을 그리고 이선태가 출연한 〈Pass Away〉로 시작되었는데, 클래식발레 <백조의 호수> 속 호숫가 아다지오 음악을 배경으로 했다. <백조의 호수>가 고전 발레의 대명사이자 발레리나로서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고 또한 토슈즈 위에서 대형 전막발레의 주인공으로 평생을 보낸 김지영의 무용인생을 은유하는 듯했다. ‘pass away’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삶의 명언인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에서도 사용되지만 ‘사라지다’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김지영은 발레리나로서 절정의 순간들을 지나 그리고 적지 않은 나이까지 현역 생활을 하다가 2019년 국립발레단에서 은퇴 무대를 가졌다. 그가 겪어 온 발레 인생과 상실감을 이 작품에서 녹여낸 듯하다.
객석으로부터 무대로 등장하는 이선태는 우아하게 그리고 도도하게 몸을 조율하는 김지영에게 기꺼이 ‘바’(Bar)가 되어준다. 딱딱하게 시작했던 발레 어휘들의 조합은 점차적으로 부드러워지며 이 두 무용스타 사이 관계도 녹아내린다. 도구가 되어줬던 이선태는 그의 존재감을 김지영과의 관계에서 풍부하게 더해나갔다. 이선태가 긴 사지를 사용해 회전하며 선을 통해 이끌어내는 현대무용의 프레이즈는 김지영과의 접촉즉흥식의 움직임으로 국면을 전환했다. 작품의 절정으로 치닫는 이 컨택은 부드럽지만 격정적인 감정을 비유했다. 공연 말미에 이르러 이선태는 자신의 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토슈즈를 벗어던지는 김지영에게 토슈즈를 다시 건네준다. 김지영에게 계속 춤을 추라고 격려하는 것처럼. 어쩌면 토슈즈는 김지영이 무용수로서의 수명이 짧은 발레를 하면서 20년 넘게 주역으로 무대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마사 그레이엄이 “무용수는 두 번 죽는다. 첫 번째 죽음은 무용수가 춤을 그만둘 때다”라고 말했듯 무용수에게 춤은 곧 생명력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처럼 이선태가 품에서 토슈즈를 꺼내 줌으로써, 김지영의 춤인생은 사라지지 않았고 이 순간 또한 지나갈 것이며 춤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Pass Away〉는 짧은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유회웅의 안무와 능청스러운 연기로 우아한 발레에 유머를 더한 이선태, 그리고 밝은 에너지와 틈을 놓치지 않는 정확한 테크닉으로 관객을 편안하게 이끌어주는 발레리나 김지영의 조합이 돋보였다 비록 긴 작품은 아니나 전체적으로 잘 분석되었고, 유회웅의 위트 있는 안무가 개성을 뽐냈으며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무난하게 소화한 작품이었다.
장현수가 안무를 맡아 국립무용단 최호종과 호흡을 맞춘 <패강가>는 김지영의 무대와 같이 세 명의 조화가 시너지를 만드는 작품이었다. 내용은 조선시대 문신 임제의 시 ‘패강가(浿江歌)’를 춤으로 옮긴 것으로, 시는 대동강으로 봄나들이를 나갔던 젊은 처자가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를 보고 떠나간 임과의 추억을 떠올린다는 이야기이다. 허공에 던져지는 장삼자락을 이어받는 호흡의 내공마저 느껴지며 무대를 장악하는 장현수의 관록과 아우라, 섬세한 손끝처리와 잘 다져진 몸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최호종의 호소력 있고 신선한 움직임, 목소리가 악기가 된 듯 깊이를 넘나드는 정마리의 애조 띤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며 짙은 애수를 전달했다. 특히나 국립무용단에서 다양한 안무가들의 창작 작품을 통해 두각을 보인 최호종의 기량에 신뢰를 더했다. 다만 최호종의 춤은 훌륭했지만 주제의식과는 맞지 않았고, “세월이 꿈 같구나”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를 통해 장현수의 그림은 완성되었다.
이번 작품에서 장현수는 전경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중심인물들에 대해 기꺼이 후경이 되었다. 수 없이 많은 무용 무대의 주역으로 빛을 냈던 그녀이기에 이 선택은 흥미롭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남성 무용수와 여성 가수가 펼치는 이야기의 중심에서 다시 구심력을 발휘했다. 한 팔은 맨손으로, 다른 한 팔로는 길게 뻗친 장삼 자락을 조절하며 바람과 물살의 역동성을 무대에 뿌리는 움직임이 남녀가 거리를 두게 만든다. 가수의 소리가 극에 달할 때 그들 사랑의 이뤄짐이 불가함을 자각하면 작품의 기운은 가라앉고 모든 움직임 또한 침묵에 들어선다. 실연의 쓰라린 깨달음에서 남성의 솔로는 흘러간 가요와 함께 했다. 후반부에 이르러 구슬픈 소리와 함께 장현수는 허탈한 호흡으로 내적인 정서의 춤을 췄다. 넓게 뻗던 장삼자락은 무거워지고 기운의 흐름은 그녀 주위에서 머문다.
장현수의 <패강가>는 장현수의 트레이드마크인 장삼을 활용한 특징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또한 단순한 무대구성에서 소리하는 여인과 남녀가 각자의 특징을 의상과 움직임을 통해 개성 있게 나타내었다. 전통적 춤사위를 모던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온라인 영상으로 관람하면서 남녀 무용수의 연령차가 극대화 되어 보이는 단점은 주제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런 단점에서 불구하고 젊음과 축적된 시간의 깊이를 나란히 보여주며, 청과 녹의 조명과 의상을 통해 오묘한 신비감이 극대화되어 몰입 을 높였다. 청과 녹이 천천히 스며든 무대 위의 녹색의 장삼은 멈추지 않고 일렁이는 깊은 파도를 연상시켰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 녹아든 우리 삶은 푸르고도 짙었다.
이경은의 〈Time〉은 공연이 시작되면 검은 정장차림의 그녀가 무대 배경에 거울을 놓고 조용한 피아노 선율에 맞춰 춤을 시작했다. 바닥은 마치 물이 출렁이듯 잔잔한 수면을 투영하여 물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거울과 물에 투영되는 자신의 모습이 또 하나의 나인 듯하다. 〈Time〉은 특히나 공간을 주된 구성요소로 다뤘다. 무대 뒤쪽 설치된 거울의 벽구조물을 뒤로 하고 아주 천천히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정면을 향했던 몸의 방향은 좌우로 전환되며 공연의 시간은 나아가지만 작품의 시간은 진전을 거스르는 듯 했다. 거울로 시선을 향하며 자신을 발견하고 거울에서 거리를 두며 몽상의 영역은 무대 전체로 넓어진다. 이경은은 자신이 지나온 춤으로 추억을 소환했는데, 그래서인지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단순화하기도 했고 유치하게 구현하기도 했다. 원으로 옮겨지는 발자국은 비록 제자리걸음이나 운신의 폭은 컸고 자유의 희망 또한 아른거렸다.
대중가요에 맞춰 무대를 뛰어다니고 머리를 흔들어대던 이경은의 그 모습은 어딘가 친근하면서도 위로가 되었다. 코로나19로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요즘, 꿈같은 환상보다는 다소 평범할지언정 현실감 있는 일상이 그리운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중반을 지나 분위기를 전환시켰는데, 한층 더 무대 앞으로 나오며 작품의 결말로 나아갈 때에 나오기 시작하는 음악, 나훈아의 <테스형>은 파격적인 선택이다. 그래서 이번 공연 전체에서 가장 뇌리에 박힌 장면은 이경은이 <테스형>에 맞춰 춤을 추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온 나라가 우울에 빠져있을 때 많은 국민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었던 노래에 이경은은 춤을 더했다. 특히 몸을 활처럼 뒤로 휘며 등으로 착지하는 쓰러짐의 동작을 반복했는데, 모다페에서 공연한 〈OFF destiny〉에서도 선보였던 이 동작은 그녀의 시그니처로 인식될 정도이다. 중력을 거르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외치기보다는 바람을 맞아 휘어지는 몸으로, 바닥을 향해 부딪치는 등쪽의 온전한 충격을 통해 형이상학을 비웃었다. 노래에서 ‘아! 테스형’이라는 탄식이 반복되면서 작품이 시작되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춤으로 사변적 여행을 떠났던 이경은은 다시 현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현재에서 다시금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는 트로트 열풍이 현대무용수의 춤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번지는 웃음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하지만 이경은의 공연은 항상 임팩트가 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 임팩트가 <테스형>으로 옮겨간 느낌도 없지 않았다. 춤보다는 음악을 흥얼거릴 수밖에 없는 다소 주객전도된 듯한 무대와 서울무용제에서 대중음악을 사용한 부분은 어떤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가 모호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춤은 심플하나 부족하지 않았고, 늘 그렇듯 간결하게 말하지만 그 전달은 무리가 없었다. 여전히 살아 있는 무용수로서 이경은의 시간은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중년에 접어든 그녀의 연륜과 여유가 빛을 발한 무대였다.
마지막을 장식한 차수정은 〈Unit 12 Duet〉 (‘심청, Row Your Boat’ 중)을 선보였다. 심봉사의 죽음을 레퀴엠이 대변하며 붉게 물든 바닥 위에서 움직임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차수정과 이영일의 남다른 호흡은 중견 무용가들이 선보이는 듀엣으로의 완성도를 갖춰가고 있었다. 초반부 여성의 묵직하고 엄숙한 노래에 죽음을 상징하는 검의 의상의 차수정은 머리 위에 타원형의 쇠줄을 얹고 느리게 움직이며 분위기를 끌어갔다. 붉은 바닥에 놓인 흰 꽃이 시각적 자극을 주었고, 쇠줄을 내려놓고 붉은 공간에서 강렬하면서도 인상적인 춤을 추는 그녀는 어느덧 자신의 감정을 깊게 그려내는 표현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영일의 춤 역시 자신의 기존 스타일을 유지하며 편안하게 이뤄졌고, 부부 무용가로서 서로의 춤사위에 대한 이해도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무.념.무.상(舞.念.舞.想) II’는 약 70분의 공연시간 동안 네 개의 작품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무대에 올랐다. 한 작품의 길이가 15분 안팎이 되었던 셈이다. 그 시간으로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 되려면 풀타임 작품에 비해 더 큰 응축력이 필요하다. 함축적이고 밀도 있는 구성으로 관객들을 집중시킬 때 작품의 매력이 더해질 터인데 이번 공연은 전체적으로 집중도가 다소 흐트러졌다. 그 이유 중에는 비대면 온라인 감상이었다는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네 개의 작품을 묶는 ‘무.념.무.상(舞.念.舞.想)’이라는 주제와 ‘fantastic dancing stars’라는 이름에 걸맞은 무용가 라인업에 대해 가졌던 기대에 비해 큰 흥분을 느낄 수 없는 공연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각 개인의 개성과 기량을 충분히 확인하는 시간이었지만 서울무용제 초청공연이라는 타이틀에 적합한 완성도를 갖췄는가에 대한 부분은 고려해봐야 했다. 기존에 있던 공연들을 모아서 형식적으로 올려놓은 느낌을 받는다는 것은 콘셉트와 무대가 별개로 분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향후 이들의 잠재력이 제대로 발휘되는 작품을 기대해 본다.
참여_ 서현재, 오정은, 윤단우, 이세승, 이희나, 장지원
대표 교정_ 장지원
사진제공_ 서울무용제 조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