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일) 플랫폼L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안무가 윤푸름의 신작 <시간의형태의시간>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뉴노멀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 여기’에 적합한 공연은 무엇인가에 질문을 던지는 공연이었다. 미술현장에서 비디오아트나 미디어아트 작업에 퍼포먼스를 결합하여 입체감을 얻었던 사례가 많았다. 최근에는 미술인들의 몸이 아니라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몸의 무용인들과 협력한 작업이 빈번해지면서 전시장에서 춤을 관람하는 것은 이제 진귀한 현상도 아니다. 윤푸름의 이번 작업 역시 전시장에서 핸드폰으로 QR코드를 통해 춤을 감상한다는 매체의 변화가 새로울 뿐, 작업 자체로는 그다지 신선하지 않았다.
플랫폼L 라이브홀에서 관객들을 맞이하는 것은 티켓 매니저가 아닌 태블릿 PC였다. 사람이 아닌 태블릿 PC와 티켓팅을 하는 행위는 관객들로 하여금 퍼포먼스적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태도가 공연이 된다’는 이 출발점은 전체 공연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전시장에는 어떠한 예술적 형태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얗게 텅 빈 공간, 그러니까 화이트큐브에서 형태로 실재(實在)하는 것은 관객들뿐이었다. 전시장의 중앙에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The Artist is Present〉를 연상시키는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이 존재하긴 했다. 두 인물은 관객을 태블릿 PC로 맞이했던 티켓 매니저들이었으며, 그들은 관객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대화나 일에 집중했다. 공연이라는 사건은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 관객들이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춤은 현시(顯示)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전시장의 바닥과 벽, 심지어 분장실과 화장실 곳곳에 부착된 QR코드를 따라서 공간을 탐색하고 다녀야 했다.
안무가가 QR코드 속에 심어둔 춤은 핸드폰을 비추어야 비로소 형태를 드러내었다. 공연장 바닥에 있는 QR코드를 통하면 임정하의 움직임을 감상할 수 있었다. 메인무대가 분장실과 화장실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곳에서의 QR코드들은 다양하였다. QR코드 속에는 비어 있는 분장실에서 다각도로 촬영된 퍼포머들의 사진도 있었다. 어떤 QR코드는 명제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분위기는 무형적인 차원을 발생시킨다”와 같이 다소 철학적인 명제였다. 영상카메라를 든 스태프들이 공간을 배회하는 관객들을 따라다녔다. 관객들이 낯선 환경에 당혹스러워하는 표정, 중얼거리는 소리, 그리고 그들이 QR코드로 보는 대상을 촬영했다. 그들의 행위는 굶주린 동물을 사냥하는 정글의 포식자처럼 폭력적이었다. 이를 거부하고 몸을 작동하지 않거나 이동을 중단한 채 자신을 감추는 관객도 더러 있었다. 또한, QR코드가 붙어 있는 위치에 따라 다른 정보가 들어 있다는 안내가 명확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수동적인 관객이나 새로운 매체에 능숙하지 못한 관객들은 헛헛하게 공간을 바라보기만 했다. 안무가와 스태프들이 자신들의 의도와 작업에 심취하여 정작 현장에서 관객들이 매체를 어떻게, 얼마나 활용하여 작품을 경험하게 되는가에는 무심하지 않았나 싶다.
부재한 퍼포머-현존재의 이미지들과 부유의 시간을 보내고서 관객들은 춤의 가시적인 형태와 마주할 수 있었다. 퍼포머와 스태프들이 전시장에 일사불란하게 의자를 준비하는 것은 공연이라는 사건의 신호였다. 공연을 본다는 기대감에 관객들은 서둘러 의자에 앉았지만 불편함과 어색함의 시간은 지속되었다. 시간이 흘러도 ‘춤’이라고 명명해 왔던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훤한 조명 아래에 놓인 관객들은 또 무엇을 해야지 춤을 감각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안무가는 이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행위를 지각해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후에 비워진 무대로 이종현이 걸어 나왔다. 그는 무대 위에 잠깐 서 있다가 다시 무대를 비웠다. 그리고는 공간의 네 모퉁이에 설비된 초대형 선풍기를 끌어당겨 무대 중앙으로 각도를 조절했다. 전원이 켜진 이 기계들은 공연 기계를 작동시키며 커다란 바람의 저수지를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그 시간에 움직이는 것은 무대 위에 다시 선 퍼포머의 옷과 머리카락, 관객들의 소지품뿐이었다. 그 장소에서 바람이라고 불리는 공기의 흐름은 참여하고 있는 모든 이의 피부들을 스치고 다녔다. 이로 인해 한시적인 공동체의 살결들이 하나의 인공자연 속에서 마주 보게 하였다.
곧이어 김승록의 조작을 통해 무대에 깔린 스모그 머신의 안개는 바람을 대체하였다. 비정형으로 관객의 몸 주위를 감싸는 이 안개는 시선을 방해하나 사방의 감각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었다. 안개에 잠긴 의자 다리들을 통해 붕 떠 있는 관객들의 착시는 QR코드의 지시를 통해 다시 한번 붕 떠 있는 임정하의 움직임으로 인도되었다. 관객의 몸은 스마트폰 바깥에 있고 스마트폰 내부에서는 퍼포머의 춤이 흘러 다니고 있었다. 비어 있으나 안개로 꽉 채워진 무대는 액정 내부의 움직이는 신체와 대비되며 총합되길 거부하였다. 어느새 사뭇 잠잠해진 바닥의 안개는 천장의 또 다른 스모그 층위로 제 역할을 넘겨주었다. 천장에서 한 방향에서 반복적으로 뿜어나오던 연기는 무질서의 엔트로피를 극대화시켰다. 명확한 경계를 두지 않고 스며오는 안개와 지나간 시간과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이 중첩되면서 존재하는 시간성을 떠오르게 했다. 이 안개가 잠시 전에 바닥에 깔렸던 안개인지 또는 시간을 달리하니 단연코 다른 안개로 인식될지는 관객의 몫이었다. 착시를 일으켰던 관객의 지각, 또는 반동적 감상 태도는 또 다른 환상을 제공하였다. 마치 안개가 자욱한 저수지 수면 아래로 침잠하길 바라듯이, 또는 그 환상의 공간이 이제 황혼을 맞이했다는 경종을 울리듯이 안개는 붉은 조명에 의해 불타올랐다.
<시간의형태의시간>은 안무가 윤푸름이 지난 8월 국립현대무용단의 안무랩에서 발표한 <나는 사라지기를 자초한다>를 작업하면서 ‘사라짐’에 대해 얻었던 성찰로부터 시작되었고 한다. 안무자는 이 작품을 통해 기존의 질서에서 춤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몸의 행위와 안무적 장치 및 기능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그는 기계적 장치들(바람, 빛, 사운드, 스모그 등)을 나열하며 몸의 사라짐을 실재화하였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허상들과 마주하게 했다. 질문과 탐색은 동시대 예술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화이트큐브에 춤의 형태를 감춘 안무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백색의 텅 빈 공간에서 안무가의 실험에 동참했던 관객들은 ‘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했을 것이다. 이 질문 자체가 의도라면 안무자는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안무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과 실제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에는 모종의 간극이 존재하였기에 공연 자체는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QR코드로 연결된 춤영상은 현재의 시간에서 춤추지 않을 뿐, 움직임으로서의 특별함이나 특별한 의미를 찾기 어려웠다. 또한, 플랫폼L의 백색 전시 공간을 기계와 장치로 채울 수밖에 없었을까에 대한 의문과 새로운 매체의 실험을 안무자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약 40분의 관람을 마치고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또다시 QR코드가 주어졌다. 공연의 전반적 태도가 그러했듯이 이 코드와 연결할지는 관객들의 몫이었다.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나 지하철에서 연결해보았을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망각해버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책임 전가의 안무는 관객들의 죄책감을 희미하게 소환하며 공연장 바깥까지 감염시키고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인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대면 행위 자체가 지닌 가치가 높다. 이러한 가치 절상과 함께 예술가와 관객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공연 형식에 대한 성찰 또한 높아지며, 공연예술계를 순환시키는 새로운 엔진이 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안무가 윤푸름의 <시간의형태의시간>은 이러한 시대 상황과 조우하며 ‘공연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넘어서 공연이 토대로 하는 시간 자체에 대한 초-본질적 질문을 던진 것은 틀림없다.
참여자_ 서현재, 윤단우, 이세승, 최명현, 최해리
대표 교정_ 최해리
사진제공_ 윤푸름프로젝트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