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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과 인간의 공동체적 관계 탐색 - 국립현대무용단 <댄스 온 에어> 中 24/7 스테이지

 

국립현대무용단이 현대무용 영상작품 전용 온라인 상영관 <댄스 온 에어>를 오픈했다. 다양한 현대무용 작품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무용 향유의 기회를 활짝 연 것이다. 현대무용에 대한 관심이 발레에 비해 저조한 상황에서 관람 기회의 확대는 작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또한 공연의 현장감에 비해 확연하게 질적 차이를 보였던 온라인 공연들이 국립단체의 충분한 예산 투입 탓인지 고퀄리티의 영상으로 한층 업그레이드된 점도 짚어야 할 부분이었다.

 

<댄스 온 에어>는 다양한 댄스필름 신작들을 선보이는 ‘댄스필름 2021’, 국립현대무용단의 프로그램들과 참여 안무가들의 기존 안무작들 중 특별히 주목할 작품들을 소개하는 ‘포커스 라이트닝’, 24시간 시청 가능한 상시 상영작들을 모아놓은 ‘24/7 스테이지’의 세 가지 섹션으로 나뉘어 있다. 무대에서 한 차례 이상 공연되었거나 무대화를 전제로 준비 중인 다른 작품들과 달리 ‘24/7 스테이지’의 7편은 처음부터 영상으로 기획된 작품들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언택트 공연에서 한 걸음 앞선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국립현대무용단의 야심찬 실험작들이라 할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그중 <입 닥치고 춤이나 춰>, <풍경>, <재생:능력>, <삼물기> 이 네 편의 작품을 집단리뷰로 다뤄보았다.

 

네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은 로봇(기계)을 어떻게 활용하여 안무적 장치로 흡수할 것인가와 공연을 위한 안무작업이 아닌 댄스필름이라는 매체를 통해 어떻게 안무의 구조와 장치를 활용할 수 있는가이다. 이 작품들은 A.I 로봇을 통해 앞으로 변화될 사회의 방향성을 그려보는 한편 로봇이라는 특수한 사물이 어떻게 무용(안무)과 접점을 찾아낼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입 닥치고 춤이나 춰>

 

권병준 <입 닥치고 춤이나 춰>

 

로봇 제작으로 네 편의 작업에 모두 참여한 권병준은 1990년대 초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작업을 시작으로 소리와 관련한 하드웨어 연구와 함께 새로운 악기, 무대장치 개발 등을 기반으로 뉴미디어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연출하는 작가이다. 

 

영상이 시작되자마자 어느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비춰진다. 이윽고 테크노 음악의 도입과 함께 DJ 부스의 장치들을 카메라 앵글이 훑는다. 부스 앞에는 네온사인으로 ‘Club Golden Flower’가 붉게 빛을 발하고 있다. 한편 이 ‘Club Golden Flower’는 권병준이 2018년 말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었던 개인전 제목과 동명이기도 하다. 즉 자기 참조를 하며 또다시 자신의 로봇들을 클럽 파티로 불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가볍게 생각하면 이전 작품의 재활용으로 여겨질 만도 하지만, 우리 인간도 자기 몸뚱이를 재활해가며 전자음악에 몸을 흔드는 형국을 생각해보면 이처럼 자연스러운 것도 없다.

 

그가 제작한 한쪽 팔만 달린 12대의 로봇 움직임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섬세하게 움직여지는 로봇 팔의 손가락과 머리 부분의 움직임은 사뭇 살아 있는 존재처럼 감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손전등으로 이뤄진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나 또는 팔의 관절들을 가볍게 움직이는 춤은 점차 환희로 바뀌어 나가는데, 6분 40초 무렵 등장하는 로봇의 ‘사이드 문워크’는 오리지널 문워크처럼 물리법칙을 거스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즐길 줄 아는 로봇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쓸모가 정해지는 객체라기보다, 스스로 춤을 통해 또 다른 존재로 거듭나고 있다.

 

중반부터 음악의 층위가 두터워짐에 따라 영상의 레이어 또한 늘어나며 환각에서 봄직한 잔상이나 공간의 역전, 회전, 또는 전경과 배경의 상관관계가 무너진다. 로봇을 찍는 카메라의 앵글 또한 이 난장판에 몸을 맡기듯 일관성을 거부한다. 음악이 빠른 템포의 정점을 찍고 나면 팔이 고장나 덜렁이는 모습이나 소진된 로봇들이 나오는데, 클럽문화에 대한 작가의 노스탤지어를 짐작케 하는 요소들이라 하겠다.

 

언뜻 보기에는 내러티브 구조가 명확하지 않지만 이 영상 작품은 음악적, 또는 하룻밤 레이브 파티의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연출, 음악, 로봇 안무의 세 역할을 소화한 미디어 아티스트 권병준은 영상감독 조용기를 필두로 한 국립현대무용단 제작팀과 함께 협업함으로써 또 한 차례 자신의 지평을 넓혔다. 

 

 

<풍경>

조희경 <풍경>

 

<풍경>은 인간 풍경의 많은 모습들을 보여준다. 가로등 아래서의 외로운 모습, 로봇에 둘러싸여 있는 나약한 인간, 로봇과 마주하여 대화를 하는 인간, 로봇에서 벗어나 춤을 추는 인간, 자연 속의 인간… 이러한 다양한 단상들을 통하여 인간의 풍경이 생생하게 감각된다.


첫 장면에서는 인간의 몸에서 로봇이 이동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유연한 곡선으로 표현된 인간의 신체는 자연을 상징하는 듯하고, 로봇은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이와 상반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흡사 동양화의 풍경에 나타난 인간과 거대한 환경의 관계가 뒤집혀 보이는 인상을 주는 이 장면은 <풍경>이라는 작품의 질감과도 맞닿아 있다. 인상적인 이 첫 장면과 작업의 안무와 연출을 맡은 조희경이 한때 서양화를 공부했던 점을 연결지어 본다면 이후 전개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한 남성이 나타난다. 자기 머리보다 훨씬 위에 매달린 전등의 빛을 발견하고 이에 비춰지는 장소의 조건을 따라 뛰어 노는 모습이 제시된다. 이 빛은 무엇을 상징하기에 이 남성은 빛에 반응하며 자신의 상상을 몸으로 구현하는 놀이를 행하는 것일까? 이윽고 이 남성이 잠들어 있을 때 주위로 로봇들이 몰려든다. 남성을 둘러싸고 로봇들은 알 수 없는 언어를 서로 주고받는다. 다음 장면에서는 남자와 로봇이 서로 마주하고 차를 한 잔씩 나눈다. 로봇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욕구가 인간의 본성임을 남성에게 전달하는데, 나아가 전달하는 수단은 언어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한다. 로봇이 인간을 꿰뚫은 듯이 말하는 이 말들은 진한 공감을 일으키며 생각에 잠기게 하고, 작품에 깊이를 부여한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남성이 어두웠던 공간 밖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존재하던 세계로부터 탈출하여 빛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로봇으로부터 멀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편안함과 자유로움을 느끼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른 인간과 소통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마지막에서 주인공의 손이 다른 손과 마주 닿게 되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안무가 조희경은 로봇이라는 주어진 조건에 종속되지 않고 자신이 지속해왔던 몸과 환경, 그리고 표현에 관한 문제들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여기에 몸의 연기와 명확한 행위를 영상에서 펼친 이정민의 퍼포먼스는, 안무가의 의도를 언어가 아닌 몸의 표현으로써 충실하게 세상 밖으로 내보였다.



<재생:능력>

 

예효승 <재생:능력>

 

예효승은 근래 작업에서 인간의 원초적 감각에 따른 몸의 반응들에 천착해 왔다. 이러한 작업의 지향성은 이번 <재생:능력>에서도 지속된다. 문제는 원초라는 개념이 항상 어떤 원시주의적 과거에 대한 지향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데, 예효승은 이 문제를 현대적 무대 연출로 극복해 왔다. 이번에는 본격적인 영상 작업에 임하며, 예효승은 영상 연출 감독들(오근재, 이원진)과의 협력을 통해 다시 한번 자신이 가진 무용예술의 의제들을 풀어나간다.


예효승의 작품 영상에서 속도 조절은 대표적으로 선택된 연출법이다. 전체적으로 천천히 진행되는 시퀀스는 갑자기 빨라졌다가도 다시 원래의 속도로 돌아오곤 한다.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이는 예효승이 가진 발작적 움직임 형식과 대응할 수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이러한 영상 연출은 영상이 가진 매체적 무의식, 또는 영상이 가진 조작 가능성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다. 


식물에 물을 주는 행위와 함께 등장한 무용수들은 이내 식물이 가지에서 잎을 틔워내듯 한 무용수가 다른 인물의 어깨를 허벅지에 대어 다리를 들게끔 한다. 식물의 줄기와 형태적 유사함을 보이는 이 동작에서 작품의 움직임 동기가 식물이 가진 수동성, 그리고 생명으로서의 능동성에서 출발함을 깨닫게 한다. 예효승 외 무용수 2인이 펼치는 듀엣은 서로 기대거나, 식물이 시들듯 쓰러지다가, 서로 몸의 생기를 빨아가듯 달라붙기도 한다. 듀엣과 영상 편집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장면이 지나며 이 복잡한 감각은 살덩어리를 손으로 꽉 움켜쥐며 신체가 가진 물성의 제시로 옮겨간다. 이 물성은 화분을 부수는 파괴적 행위로 다시 한번 이행하는데, 이러한 빠른 전개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분석보다는 감각적 직관을 통한 감상을 호소하고 있다.


로봇들의 등장은 공연이 중반부에 이르러서다. 지금까지 인간 육체를 자세히 비춰진 것 이상으로 로봇의 몸 부분들이 자세히 비춰진다. 실루엣 조명 효과를 통해 손실된 육체에 로봇의 팔 부분이 합쳐지는 모습은 사이보그를, 또는 새로운 존재의 가능성을 내비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존재들 사이 종합의 가능성은 모호한 의문으로 남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대에 로봇들만 남겨두고 퇴장했다 다시 나타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 이 변화한 인물들은 작품 초반에 제시됐던 식물적 형태의 들어올림을 수행하거나 또는 스스로 상하체를 과도하게 접거나 한다. 바닥에 완전히 눕혀진 인간들의 모습, 그리고 그 주위에 건조하게 서 있는 로봇들의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작품은 실패한 인간 개조를 모티프로 삼는 비극적 시나리오를 떠올리게 한다. 



<삼물기>

 

이민경 <삼물기>

 

영상에서 비춰지는 공간에 흰 플로어로 조성된 무대가 있다. 무대 뒤편에는 두 명의 기계 조작자가 자리해 있고 한 ‘기계’가 나타난다. 기계 조작자는 자신의 팔과 기계의 팔이 동기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한 과학적 기술이 가능할까라는 의심을 들게 할 정도로 미래지향적인 동기화 방식이기에, 오히려 이 작업이 허구의 기술을 선보이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장면으로 볼 수 있겠다. 무대를 바라보고 오른편, 즉 ‘상수’ 바깥에 이 세 존재가 자리하자, 곧 일본 전통 공연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곡된 음악이 흘러나오며 영상 속 공연이 시작된다. 


이민경은 이 <삼물기>에서의 삼물이 이물, 인간, 기계라고 설명한다. 무대 위의 기계와 인간의 듀엣으로 시작된 공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물’, 또 다른 존재가 이 무리에 합류한다. 세 존재는 이동과 퇴장과 등장을 반복하는데, 삼물들의 위치에 따라 때로 겹쳐지기도 하고 또는 각자 다른 상태에 있기도 하다. 이 상태의 변화와 중첩을 잘 보여주기 위해서, 영상 속 무대를 비추는 카메라의 앵글은 한동안 정면을 향해 있다. 또한 흥미로운 점은 반복되는 등장과 퇴장의 방향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즉 상수에서 하수로 향하는 흐름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 작업이 음악과 함께 동아시아 공연의 전통적 방식을 지시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점차적으로 이 세 존재의 이동은 모험과 탐험에서 헤쳐나간다는 몸짓과 더욱 유사해진다. 어느 순간 멈춘 상태에서 무대 밖으로 벗어나버리는 기계는 이 작품에 다른 국면을 안겨준다. 행로를 벗어난 기계를 따라 인간과 이물은 따라갈 수밖에 없고, 이들은 안개가 바닥에 뿜어나오는 공간, 그리고 붉은 조명이 비춰지는 뜨거운 사막의 공간까지 지나게 된다. 이러한 장면들이 지나갈 때에도 연출은 재현에 대한 얽매임이 없다. 연극적 약속이 그러하듯 최소한의 장치로서 우리에게 허구라는 약속의 새끼손가락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세 존재의 여행은 계속된다. 기계가 고장난 듯 멈춰버리자 여행 동료로서 다른 이들이 기계를 등에 지고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이 여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여행이 끝날 무렵 적막을 깨고 기다란 몸을 높이 뻗은 신비로운 존재가 나타난다. 신비롭다고 하기엔 아이러니하게도 몸체 위에 덮은 천의 꿰맴새까지 다 보여서 전혀 신비롭지 않은 존재다. 이 존재가 비추는 빛에 반응하며 기계는 물론 잠들어 있던 일행들도 눈을 뜨고 일어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이 신비로우면서도 신비롭지 않은 이중적 존재를 바라본다.


공연은 갑작스러운 조명의 전환과 함께 이 조우가 꿈이었다는 듯 다시 처음 흰 바닥의 무대로 돌아오며 마무리된다. 환상과 현실을 오가는 공연적 이동, 수행적 이행은 여기까지인 것일까? 기계가 먼저 바퀴를 굴려 무대 상수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인간 그리고 이물까지 그 옆에 다시 한번 위치했을 때 또 다른 여행의 출발을 암시하며 영상은 끝을 맺는다.

 

 

 

네 편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이다. 각 안무에서 인간은 기계를 조정해 춤추도록 만들어 공연과정에 참여시키는 전지적 존재인 동시에 기계와 함께 춤추는 동반자이다. 지금까지 로봇의 춤이라 하면 단지 로봇이 움직이며 만드는 동선이나 분절적 몸짓에 천착했다. 하지만 이번 상영에서 주목할 점은 어떻게 로봇에 숨결을 불어넣는가에 있다. 분리된 혹은 박제된 존재가 아니라 한 시공간에서 함께 춤추는 그들은 생명력을 부여받은 존재였다. 따라서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갑을관계를 떠나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할 공동체로서의 관계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로봇공연의 의미가 있었다. 


로봇안무의 특징은 안무의 조직적 구성이나 역동성의 증가보다는 그들과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치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공동체의 관계를 부여하긴 했으나 아직까지 오브제로서의 역할이 크다는 점과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실을 수 없다는 한계점이 있다. 작품마다 각각의 차이는 있었다. 조희경의 <풍경>은 인간과 로봇이 조화를 이뤄 사는 세상의 풍경을 그려냈고, 이민경의 <삼물기>는 인간, 이물, 기계를 각자 하나의 개체로 인식해 이를 통한 이동과 상태를 다뤘다. 예효승의 <재생:능력>에서는 신체의 움직임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측면이 부각되었다. 권병준은 로봇과 관련된 작업을 수차례 해본 미디어 아티스트답게 가장 인간의 움직임, 감정과 유사한 로봇의 춤을 만들어냈다.


참여자_ 박원정, 윤단우, 이세승, 장지원, 최명현

대표 교정_ 윤단우

사진제공_ 국립현대무용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