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24회째를 맞이하는 월간 댄스포럼 주최 크리틱스초이스 댄스페스티벌이 지난 6월 30일부터 7월 1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올려졌다. 올해 크리틱스초이스에 선정된 안무가는 최명현, 박성율, 임정하, 배진호, 전수현, 윤나라, 김지성, 정철인의 8인으로, 이번 호에서는 이들 가운데 첫날 공연을 올린 최명현과 박성율의 작품을 집단리뷰로 다뤄보았다.
최명현 <맥락없이 조화롭게>
무대를 연출하는 미적 감각이 뛰어난 안무가로 알려져 있는 최명현의 신작 <맥락없이 조화롭게>는 관객들을 도발한다. 이 자극적 도발은 제목과는 상이하게 오히려 맥락을 적극적으로 비틀어내면서 발생한다. 또한 조화롭지 않다고 받아들여지도록 의도되는 공연의 요소들, 예를 들어 음악과 의상 또는 행위들의 배치를 통해 감성의 통일을 방해한다. 이는 일종의 소외 효과, 또는 관객과의 거리두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안무가의 안무 의도를 살펴보면 ‘조화’라는 양상에 가치를 두고 있기에 이러한 형식에 대해 좀 더 거리를 두고 생각해볼 만하다.
ⓒSang_Hoon_Ok
다채로운 색감과 5명의 무용수 각자가 보여주는 개성 있는 춤어휘가 눈길을 끄는 작품으로, 제목과 꼭 들어맞게 스토리텔링이나 서사 없이 이어지는 구성은 특별한 맥락없이 뜬금없게 느껴지지만 나름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특징이다. 초반부 힙합으로 시작된 움직임은 푸른색으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권투선수의 발놀림, 플로어를 까는 스태프, 요가 볼을 굴리는 여인, 자유자재로 신체를 분절시키는 여인, 바람 든 비닐봉지를 밀어내는 행동, 폭죽을 불고 줄넘기를 하고, 의자에 여성을 묶는 행위, 인디언 복장을 한 여성의 날갯짓, 가면을 쓰고 펜싱 칼을 휘두르며 풍선을 터트리는 남성, 그리고 마지막 칼질을 하듯 아니면 지휘하듯 움직이는 최명현의 솔로로 마무리된다. 이처럼 다양한 움직임의 활용은 파편화된 이미지들을 조합하여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와 의미를 형성하는 콜라주의 개념과 기법을 차용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공연은 첫 등장부터 연출된 무대와 음악에서의 이질감을 동질로 연계하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전통과 창작,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21세기 사회성을 담아낸 듯하다. 한국음악 중 가장 어려운 ‘종묘제례악 中 전폐희문’ 음악의 엄중함과 동시에 일상모습을 춤으로 나타낸 것 자체가 작품명에서 말하는 ‘맥락없이 조화롭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종묘제례악을 만들었던 조선시대에서의 소리를 내는 악기가 돌, 쇠, 나무 등이었다면, 현대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수많은 것들 중 비닐봉투나 공 등으로 시대별 특징과 구분을 할 수 있는 차이를 맥락없이 조화롭게 보여준 것은 아닌가 짐작하게 했다.
의미의 창출을 방해하지만 그로 인해 더욱 흥미로운 장면들도 있었는데, 특히 퍼포머들이 좌우로 일정하게 나열돼 춤을 추거나 정지해 있는 장면이 두 곳 정도 있었다. 또한 이 장면들에서 춤은 반복적인 동작들로 이뤄졌으며, 이러한 단순성, 반복성은 순간 퍼포머 자체에 집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어떠한 우선함 없이 배열된 이 무용수들은 마치 게임의 본격적인 플레이 직전의 게임 캐릭터를 골라야만 하는 국면의 캐릭터들처럼 다가왔다. 흥미롭게도 이때의 캐릭터들은 아직 선택되지 않은, 그럼으로써 감정이입 문제와 ‘무용’에 있어서는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신체이입의 문제를 거부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관점을 좀 더 밀어붙여본다면 무대 위 인물들은 자율적 수행성에서 풀려난 객체들, 게임 용어로는 ‘비플레이어 캐릭터(Non-Player Character)’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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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는 듯한 태도를 지닌 작업을 한 안무가의 의도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에는 맥락에서 미끄러지기를 지속적으로 시도하는 이 작업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이 작업을 맥락으로 끌고 오기를 바라는 일부 관객이 있다. 만약 평론가의 역할이 언어구조라는 그물에 예술작업을 쓸어서, 저인망으로 물고기를 잡듯 무엇인가를 자연상태에서 끌어 올리는 것이라면, 이 작품은 계속해서 그물 밖으로 탈출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공연되는 기획이 ‘평론가의 선택’에 의한 것임에도 안무가가 선택 밖의 영역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무가가 선택한 작품이 무대에 풀어헤쳐지는 형식을 고려해볼 때 수긍할 만할 것이다.
박성율 <결(보이지 않은 것과 보이는 것)>
박성율의 <결(보이지 않은 것과 보이는 것)>은 4명의 무용수들(하영미, 이형우, 이화진, 박성율)이 뿜어내는 몸의 에너지에 주목한 작품으로, 존재론적 의미를 찾는 과정이었다. 포스트모던댄스의 비정형성, 자유로움, 미니멀한 음악, 편안한 의상 등이 도드라졌는데, 스스로의 춤에 몰입한 무용수들은 몸을 통해 하나의 결을 형성하고 그 결은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모호함을 포함했다. 몸이 만들어내는 결의 흐름을 쫓는다는 것은 관객들에게 집중도를 요했고, 연륜이 보이는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서 파격보다는 진중함이 다가왔다. 서로의 움직임에 반응하며 반복과 변화를 거듭하는 패턴은 단순했지만 사람 사이의 에너지를 소중히 여기는 안무자의 감성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공연은 무대 중앙 앞에서 머리에 ‘돌’을 얹고 있는 여성 무용수(이화진)의 느린 회전으로 시작된다. 무심코 물에 던져진 하나의 돌이 수면 아래로 침잠하면서 자기 부피와 운동이 가진 에너지의 파동을 사방으로 발산시켜 나가듯이, 이 회전은 점차 무대 전체의 기운을 휘젓기 시작하면서 동세를 만들어 나간다. 이런 시적인 함축성을 지닌 움직임은 이 작품에서 단지 하나뿐만이 아니다. 관객으로 하여금 의식의 고요한 표면에 돌을 던지듯이 모티프가 되는 여러 동작들을 토대로 약 30분의 공연이 이뤄진다. 어떠한 관객에게는 하나의 몸짓이, 다른 관객에게는 또 다른 몸짓이 돌덩이가 된다. 중요한 것은 돌덩이 자체라기보다는 그 부피와 질량이 일으키는 2차적인 의식의 심연이다.
안무가이면서 무대에 선 박성율은 양손으로 머리로부터 얼굴을 쓸어내리는 움직임을 통해 자신 몸의 존재를 확인한다. 이는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시야를 손이 가렸다가 지나가며 다시 눈앞에 나타나는 바깥세상을 받아들이면서 이뤄진다. 다시 말해 세상을 맞대면하는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 그리고 그 시작과 끝을 자신의 능동을 발휘함으로써 자기를 순간순간 재발견한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이 움직임은 물을 닦아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은 상상의 폭포수일 수도 있고, 또는 말 그대로 몸의 배출한 땀일 수도 있다. 이러한 상상과 실존 그 사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물의 중첩은 이전에 언급한 물결을 가르는 회전 동작과 함께 극장 공간을 다른 장소로 전환하는데 봉사하고 있다.
박성율과 동료들이 실천하는 ‘스스로 춤’은 무용수 각자가 스스로의 춤을 추구하는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의 움직임에 대한 지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잠시 더 그 말을 곱씹어본다면 어느새 자리를 바꾸어 ‘춤 스스로’로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춤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말은 무용가들이 간혹 강조하는 수동과 능동이 하나가 되는 상태, 다시 말해 몸이 춤을 추어지는 상태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기다림은 이 무대에서 무릎은 꿇은 몸들로 구체화된다.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자신의 낮춤이나 심지어는 굴욕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겠지만, 이 작품에서는 몸통의 기저라 할 수 있는 골반이 바닥에 머무르는 어떠한 안착 상태로 받아들인다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머무름을 위해서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삶의 지혜는 이 후반의 무릎 꿇음과 함께 행해지는 골반의 구름을 통해서 그 메타포가 극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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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에 이르러 무대 앞쪽에 잠수해 있던 돌덩이가 무용수 하영미의 머리에 얹히는 모습은 닳고 닳은 예술 형식미를 위한 수미상관이기보다는 기다림의 순간에서 벗어나 다시 떠오르고 있는 돌의 운동이라 볼 수 있다. 돌이 운동하고 있다는 것이 불합리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르나 우리의 몸적 상상력은 충분히 이를 합리적인 운동으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다. 그 힘을 믿고 무대에 살포시 얹힌 몸들은, 광대하게 연출된 조명과 뮤지션 김현수의 내공으로 펼쳐진 음악과 내밀한 화합을 이루며, 육박해오는 시간의 무게를 관객들로 하여금 경험하게 했다.
참여자_ 오정은, 윤단우, 이세승, 장지원
대표 교정_ 윤단우
사진제공_ 댄스포럼